세 번째 장편 영화 <극한직업>이 1천6백만 관객을 동원했다. '대박'쳤다는 이야기다.
연출에 대해 다짐하고 계획을 세운 게 딱 10년 전이다. 단편 영화를 찍으면서도 연출자로서 내 자신에게 어떤 확신도 없었다. 그때 결심한 게 '딱 10년만 쉬지 말고 해보자'는 거였다. 죽어라 해보자고. <스물>을 만들면서부터 일정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그리고 <극한직업>은 목표를 초과 달성한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영화감독에게 천만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다가오던가?
말조심해야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게 그 성공은 대단히 혼란스러운 어떤 것이었다. <극한직업>은 일종의 기획 영화였다. 사실 영화감독으로서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을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블랙 코미디를 워낙 좋아하지만, 그쪽으로는 투자나 캐스팅이 여의치 않다. 나는 아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한, 그러니까 성공하지 못한 감독이다. 전작 <바람 바람 바람>을 연출하면서 애먹었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 반면 <극한직업>은 흥행에 높은 가능성을 두고 접근한 기획 영화다. 만일 실패하면 나에게 상당한 데미지가 있을 거라는 부담이 있었다. 재미있게 작업도 했다. 그런데 너무 잘되니까 되려 혼란스럽더라. 내가 하려 했던 영화는 제작 자체가 쉽지 않은데 이건 아주 잘됐다.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그럼 2019년은 감독 이병헌에게 어떤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나.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그려가야 할까? 다음 작품은 뭐가 되어야 맞나? 이미 정해진 게 있으니 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이 아주 많은 한 해였다. 더욱이 드라마 <멜로가 체질>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청률이 안 나왔다. 영화는 1천6백만 관객 동원을 했는데, 드라마는 시청률이 1%대였다. 오래 준비했고, 원했던 작품으로 내 욕구는 충족되었지만 시청률이 저조하니 더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하하.
"일단 나는 메뉴판 보는 걸 진짜 좋아한다.
그리고 택배 받는 낙으로 산다.
그걸 받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영화 이야기는 너무 잘 아니 드라마 이야기를 좀 해보자. 시나리오 한 편 쓰기도 힘든데 16부작 대본까지 썼다. 진짜 힘들었겠다.
죽을 뻔했다. 사실 촬영 전까지 대본을 써놓을 시간이 있었다. 세 편을 남겨두고 영화 흥행이 너무 잘되면서 살짝 멘붕이 왔다. 아무것도 못했다. 나머지 세 편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들던지….
드라마 보면서 이병헌이라는 남자도 극 중 손범수(안재홍 분) 같은 인물일지 궁금해지더라.
나는 평소에 말이 없다. 말투는 비슷한데 말은 손범수처럼 많지 않다. 그리고 조금 더 나른한 쪽이다. 대사가 너무 많아서 배우들이 힘들어서 죽으려 했다. 하하.
<멜로가 체질>을 보면서 <스물>의 연장선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사실 별게 없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큰 설정도 없고. 그냥 주변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수다 떨 듯하는 걸 좋아한다. 결국 소소한 이야기로 접근하다 보니 연령이 소재가 되고, 그 또래가 소재가 되면 그들이 좋아하는 문화가 포함되는 방식인 듯하다.
이제 마흔이 됐으니 20대, 30대를 넘어 40대의 이야기를 풀어낼 건가?
40대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대여섯 살은 더 먹어야 될 것 같다. 그러니까 50은 돼야 하겠지.
이병헌의 코미디를 두고 '병맛'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수준 높은 위트를 담은 스탠드업 코미디, 블랙 코미디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말이다.
나는 A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B라고 하니까. 대신 내가 의도한 바가 잘 전달되고, 웃었으면 하는 지점에서 웃어주면 그걸로 된 거다. 분명 병맛 코드의 만화 등을 좋아하긴 한다. 영향도 받았을 테고.
원래 코미디 장르를 좋아했나?
어렸을 때 시작은 누아르 장르였고, 사춘기 때는 멜로를 좋아했다. 영화를 본다 싶을 나이가 됐을 때부터 가벼운 코미디부터 블랙 코미디까지 좋아하게 됐다.
멜로? 어떤 영화들?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있고, <첨밀밀>을 아주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아비정전>을 굉장히 좋아했고.
<멜로가 체질>의 수많은 명대사 중 '택배 뜯는 거 좋아하고, 메뉴판 보는 거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연출을 더 좋아한다'가 있다. 당신도 그런가?
일단 나는 메뉴판 보는 걸 진짜 좋아한다. 그리고 택배 받는 낙으로 산다. 택배가 좋은데 그걸 받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하하.
영화감독을 언제까지 할 셈인가?
최근에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건방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스태프들과 은퇴 이야기를 종종 한다. 쉼 없이 일을 너무 많이 한 것도 같고. 아무튼 지금은 차기작 <드림>(가제) 이외에 연극 제작을 하고 있다. 영화 말고도 연극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남아 있으니까.
벌써 은퇴?
몸이 너무 힘들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극한직업> 이후 신체의 모든 부분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지금은 호전되었다.
은퇴하면 뭐하며 살 건가?
글 쓰고 싶다. 힘든 글 말고 지금까지 취미처럼 써온 글이 있다. 시나리오도 있고, 산문도 있고. 이런 글 쓸 때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되려 힐링된다. 물론 팔리지 않는 게 대부분이지만. 하하.
2020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제목은 안 정해졌지만 <드림>이라고 알려진 작품을 준비 중이다. 박서준이 캐스팅 확정이고, 대부분 캐스팅되었다. 영국 단체 '빅이슈'가 홈리스, 중독자 등으로 멤버들을 구성한 풋살 대회를 연다. 한국에서도 2010년에 대표팀을 보낸 실화 이야기다. 그 작품 연출하다 보면 2020년도 다 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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