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번득한 눈알이 매력적인 펭수는 등장한 지 6개월 만에 시대적 현상이 되었다. 교육방송 EBS에서 탄생한 이 펭귄 캐릭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인들의 대통령’으로 불린다. 펭수는 어떻게 ‘직통령’이 되었을까? 얼마 전 펭수가 부산에서 연 팬 사인회에는 서울에서 찾아온 팬이 있는가 하면 어느 열성 팬은 펭수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감격해 울기까지 했다. 펭수는 젠더리스다. 그는 모든 이에게 무해하며 따뜻하고 친절하면서도 자존감 높고 당당하며 엉뚱하다. 방송계를 비롯해 곳곳을 뒤집어놓은 펭수의 인기는 지금 성인이 사랑하는 ‘아이콘’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방증한다.
EDITOR 이경진
펭수 하이, 펭하!
너도나도 펭수를 앓는다. 지난 11월 13일 출시된 카카오톡 펭수 이모티콘은 이모티콘 역사상 유례 없는 매출 신기록을 세웠다. 현재까지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굿즈는 EBS 초등 교재 <만점왕>. 커버 모델이 펭수라서 출간 기념 팬 사인회를 돌고 있다. ‘방송국 놈’들도 펭수에게 숟가락 얹기 경쟁에 돌입했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서 ‘초통령’으로 불리는 크리에이터 도티와 춤 대결을 통해 찰떡 호흡 한 번 보여주더니만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 SBS <배성재의 텐>까지 접수해버렸다. 또 <정글의 법칙>과 <아는 형님> 등의 출연이 예약되면서 방송사 간 대통합을 이루고 있다. 펭수는 최근 외교부를 방문해 강경화 장관을 만났는데, JTBC <뉴스룸>에서도 언급되며 손석희의 관심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손석희는 “그래서 펭귄 탈 속에 있는 사람이 남자냐”는 질문을 해댔고, 이에 펭수 팬들은 “손석희 눈치 챙겨”라는 댓글로 응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펭수는 ‘펭귄 인형 탈’이 아니라 ‘남극에서 최고의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헤엄쳐 한국에 온 10세짜리 펭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펭수는 젠더리스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래서 구독자 5만 축하 라이브를 하면서 감사 인사할 때 남자식 절과 여자식 절을 한 번씩 올리기도 했다. 이런 젠더 감수성을 파괴하는 ‘펭수 탈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남자냐’는 질문은 정말 가당치도 않다. 우리 펭수는 걸 그룹 오디션을 보러 가서 심사위원에게 뒤돌아 ‘충성!’을 할 수 있는 펭귄이란 말이다.
지난 4월 첫 방송을 시작한 교육방송 EBS에서 제작한 <자이언트 펭TV>의 주인공 펭수. 유난히 작은 검은 눈동자, 그래서 더욱 희번득 느껴지는 눈알부터 ‘어린이용’ 캐릭터인지를 의심케 한다. 펭수의 어머니인 이슬예나 PD는 탄생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EBS 프로그램은 ‘동생 애기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어른이 시청하는 예능을 같이 보거든요. EBS를 멀리하게 된 어린이도 좋아할 만한 감성으로 ‘펭수’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분명 10세 이상 어린이 보라고 만든 것 같은데, 정작 유튜브를 통해 ‘한때 어린이였던 것들’, 즉 직장인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 ‘어른이’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EBS 김명중 사장 이름 석 자를 함부로 내뱉는 펭수의 배짱 때문이었다. 펭수는 구독자 만 명에게 선물을 주자고 제안하면서 “누구 돈으로 선물을 사냐”는 제작진의 물음에 주저 없이 “김명중”을 외쳤다. 창작 시를 적으면서도 ‘참치가 비싸 못 먹을 땐 김명중’이라는 구절로 울림을 안겨줬다. 어른들은 법인카드의 참맛을 알아버린 10세 펭귄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했고, 어린이용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별걸 다 아는 펭수에게 동년배로서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주관이 뚜렷하며 엉뚱하고 때로는 되바라지게 받아치는 펭수의 모습에서 대다수 직장인은 오늘 낮에 있었던 성질 나는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대신 욕을 해주는 ‘김수미 아줌마’에게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펭수의 멘트에는 무해함이 있다. 조금 불리할 때 “저 10세인데요”라고 말하면 그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상황에서 정말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뿐, 그 어떤 악의도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어른이 눈치를 보느라 솔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펭수만의 해롭지 않은 솔직함이 귀여운 되바라짐으로 비치면서 기분 좋은 웃음을 유발한다.
펭수에게 본격 입문하기 위해서는 EBS 아이돌이 다 모여 육상대회를 한 ‘이육대’를 빼놓을 수가 없다. 뚝딱이, 방귀대장 뿡뿡이, 뽀로로와 한 팀이 된 펭수는 짜잔형, 번개맨 등과 육상 대결을 한다. 뽀로로 선배가 계주에서 늑장을 부리자 맹비난을 하다 주먹다짐까지 이어질 뻔한다. 그 때문에 ‘하극상의 아이콘’으로 ‘인성’이 아닌 ‘펭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교육방송답게 선을 넘는 것처럼 보여도, 진짜 선을 넘지는 않는다. 펭수는 그저 눈치를 보지 않을 뿐이다. ‘이육대’ 출연 소감을 두고 “유명하신 선배님들 봬서 기분이 좋았어요. 닮고 싶은 건 없어요. 저는 저니까요”라고 말하는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힘내”라는 말 대신 “사랑해”라고 해주고 싶다는 감동적인 멘트에도 인간들 마음은 녹아내린다.
이렇듯 곁에 두고 싶은 재미있고 솔직한 친구가 된 펭수는 참 열심히도 살았다. 구독자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홍대나 여의도 등지를 돌며 “저 좀 구독해주시겠어요?”를 간청하고 다녔다. 뽀로로 선배님과 인기 대결을 하기도 하고, 랩과 트로트, 요들송과 트워킹 등의 개인기 역시 툭 치면 그냥 나올 정도로 몸에 익혔고 말이다. EBS 연습생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던 구독자들은 <자이언트 펭TV>가 유튜브 실버 버튼을 받았을 때 함께 감격했다.
펭수는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준다.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비록 EBS 소품실 한구석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BTS를 누르겠다는 커다란 꿈 등. 매일 무미건조하게, 꾸역꾸역 살아가던 2019년의 어른들은 펭수를 보며 내 안에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래서 펭수가 ‘You’ve got a friend in me’를 불러줄 때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펭수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동년배를 위해 일요일 밤에 콘텐츠를 업로드해주는 센스를 발휘해준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에 EBS를 떠난 이 땅의 많은 어른들은 펭수를 통해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찾는다. 단순히 ‘귀여워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펭수처럼 당당해져야지’라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본받고 싶은 인간이 없는 이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롤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이슬예나 PD는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를 위한 콘텐츠가 필요하다’ 했지만 사실은 퍽퍽한 현실을 사는 어른을 위한 콘텐츠도 필요했던 거다. “어떤 위치든 상관없이 그냥 펭귄과 사람 이렇게 대하는 겁니다. 똑같아야 됩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똑같아야 되고요.”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며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펭수를 어떻게 앓지 않을 수 있을까.
WORDS 서동현(대중문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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