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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90년대 히어로

여전히 연말이 되면 1990년대 히어로들을 소환한다. 홍콩 영화의 쿵푸 히어로, 홀로 집에 남은 케빈, 파이 좀 먹을 줄 아는 미국 친구 등. 다시 만나고픈 20년 전 히어로들과 2019년을 갈무리한다.

UpdatedOn December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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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Hero 1  
홍콩 경찰 성룡

성룡은 명절마다 싸웠다. 전두환 정권인 제5공화국 시절부터 성룡은 부정한 인물들의 ‘뚝배기’ 부수는 일을 도맡아왔다. 영화에서 성룡은 소시민으로 등장해 다양한 직업군을 전전했는데, 가장 장기 근속한 직업은 경찰 공무원이다. 1983년작 <프로젝트A>에서 해양 경찰을 시작으로 2017년작 <블리딩 스틸>에 이르기까지 무려 34년 동안 홍콩 경찰로 활동했다. 1985년에는 <폴리스 스토리>를 통해 성룡은 정의로운 홍콩 경찰의 상징이 됐다. 섹시한 홍콩 경찰은 양조위, 잘생긴 홍콩 경찰은 금성무였다. 어쨌든 <폴리스 스토리>는 시리즈를 이어가며 흥행 기록을 썼고, 1990년대 성룡은 정의와 자비를 두루 갖춘 싸움 잘하는 ‘따거’였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나에게 성룡은 훌륭한 홍콩 관광 가이드이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꿈만 꾸던 시절 비디오를 틀면 성룡은 온몸을 던져가며 홍콩의 구석구석을 안내해주곤 했다. 피를 흘리며 ‘여기 와서 이것 좀 봐’라고 안내하는 열혈 가이드였다. <폴리스 스토리>에서는 당시 홍콩 최고의 쇼핑몰을 알려주기 위해 ‘윙오브플라자’ 백화점 난간에서 맨몸 낙하 액션을 펼쳤고, 홍콩이 대중교통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임을 보여주기 위해 달리는 버스에 매달려 격투를 벌였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 내게 홍콩은 세련되고 터프한 낭만의 도시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젊은 시절 성룡은 홍콩 지킴이였고, 자비로운 히어로이자, 웃기는 형이었으며, 누구보다 홍콩 구석구석을 잘 아는 토박이였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홍콩을 지키지 않는다. 부조리를 향해 주먹을 뻗지 않으며, 홍콩보다 베이징이 잘 어울리며, 주름과 흰머리가 늘었다. 지금 홍콩 시민 특히 젊은 세대는 성룡에게 실망했다. 검은 옷을 입은 홍콩 시민에게 성룡의 온화한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굽은 등만 보일 뿐이다. 홍콩이 시위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국내 블로그에는 홍콩 여행 후기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디즈니랜드에 사람이 없어서 좋다는 등 시위 여파로 한산해진 홍콩 관광지의 풍경을 묘사한다. 집회로 한적한 홍콩 어딘가를 걷다 보면 1990년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기왕이면 20여 년 전 시민을 위해 몸 던지던 <폴리스 스토리>의 진가구 형사와 함께 홍콩 거리를 걷고 싶다. 침사추이도 가고, 딤섬도 먹고, 쿵푸도 배우고, 홍콩 사람들한테 왜 그랬냐고 묻고도 싶다.
EDITOR 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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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Hero 2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본 영화들이 어렴풋이 기억날 때가 있다. 오락 영화 <내 사랑 컬리 수>라거나 <뉴욕 세 남자와 아기> <베토벤>이라거나. 스트리밍 시대에 꺼내기엔 너무 오래된 추억인가? 하긴, 그때 우리가 ‘비디오가게’라고 불렀는지 ‘비디오대여점’이라고 불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음악가 베토벤이 아닌 개가 나오는 영화 <베토벤>이 버나드종이라는 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귀여운 아이, 또는 동물과 갑자기 엮이며 일어나는 소동극 형식의 코미디 영화들은 90년대의 한 장르를 이루었다. <나홀로 집에>는 이 소동극에 정점을 찍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시카고의 상류층 가족(그 많은 인원이 함께 성수기에 파리에 가다니)의 저택에 홀로 남은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이 혼자 집을 지키며 도둑 마브와 해리를 무찌르는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대전제를 유쾌하게 비틀고, 다시 가족과의 화해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였다.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는 아예 비디오테이프를 사주었고 우리는 별일이 없어도 수없이 함께 보곤 했다. 영화의 가장 신나는 장면은 도둑을 무찌르는 장면이 아닌, 집에 혼자 남게 된 케빈이 저택을 오가며 파티를 즐기는 장면이다. 케빈은 시리즈를 거듭하며 크리스마스마다 찾아왔고, TV에서는 지치지도 않은 것처럼 이 영화를 틀어댔다. 영화를 함께 보던 코찔찔이 동생들이 시집과 장가를 갔고, 나는 케빈이 번번이 도착하지 못한 파리와 마이애미를 아무런 무용담도 없이 다녀오곤 한다. 그럴수록 신기한 건, 이 영화만큼 연말 분위기를 충실히 담은 영화는 없더라는 거다. 커다란 진짜 나무로 만든 트리나, 소복히 쌓인 눈, 합창단의 성탄 노래들… 어디선가 <나홀로 집에>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흘러나오면 크리스마스가 1년 중 생일 다음으로 특별했던 날이었던 때를 돌아보게 된다. 아역 스타가 되어 그 당시 이미 수백억원을 벌었던 매컬리 컬킨에게도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부모는 황금알을 낳은 그의 재산권을 두고 다퉜고 그럴수록 그는 불행해졌다.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거다. 웹드라마에서 자신의 대사를 패러디하기도 하고, 작년에는 자신의 영화 <나홀로 집에>의 주요 장면을 패러디한 구글 어시스턴트 광고를 촬영했다. 화가가 되어 여전히 뉴욕의 고급 맨션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거면 됐다. 성공한 인생만이 인생은 아니고, 살아남은 자에게 새해는 또 온다.
WORDS 허윤선(<얼루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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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Hero 3 
연걸 형, 나도 순정이 있다 

학창 시절, 난 참 애매한 놈이었다. 공부는 15등 언저리였고 싸움도 적당히 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패고 다닐 정도로 깡패는 못 됐다. ‘통’이라든가 ‘원터치 쓰리 강냉이’ 같은 존재면 모르겠는데 애매한 ‘찐따’라 더 자주 싸웠다. 중국 영화를 좋아한 건 놀이터에 드나들 때부터였다.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다 흙밭에 나뒹굴었던 밤, 이연걸 영화를 보며 그날의 싸움을 복기했고 내 타격기를 시뮬레이션했다. 매주 토요일은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펼쳤다. TV 편성표를 보고 토요 명화에 이연걸 영화를 방송하는지부터 찾았다. <태극권> <동방불패> <소림오조> <정무문> <황비홍> 등 어린 나이에도 취향은 확고했다. <영웅본색>처럼 격투 없이 총질만 해대는 건 싫었다. 이소룡은 10cm를 움직일 때마다 “아뵤!” 소리를 질렀다. 정신 사나웠다. 성룡은 때리는 만큼 많이 맞았기에 우상으로 삼기엔 역부족이었다. 역시 이연걸만 한 배우가 없었다. 잘생겼고 목소리도 중저음이었다. 총, 칼, 창, 봉 등 다루지 못하는 게 없었다. 뼈가 탈골하면 ‘우두둑’ 소리를 내며 혼자 끼워 맞추는 게 상남자로 보였다. 영화 <황비홍>에 이연걸이 높은 곳에서 우산을 낙하산처럼 쓰고 안전하게 착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단해 보였다. 일말의 고민 없이 2층 높이에서 ‘꾸러기 수비대’가 그려진 노란 우산을 쓰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퍽!” 소리가 났다. 무릎에 입술이 부딪쳐 터졌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는데도 성공했다며 좋아했다. 세월이 흘러도 액션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뜬금없이 ‘마샬아츠&기계체조’ 학원에 등록했다. 어렸을 적 완성하지 못한 뒤로공중돌기를 마스터하기 위해서였다. 주변 사람들은 “양학선이야. 뭐야”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벌써 세 달이 지났다. 앞공중돌기, 옆공중돌기는 마스터했고 이제 매트 위에서 아슬아슬한 확률로 뒤로공중돌기를 한다. 40대가 되기 전에 뒤로공중돌기를 할 수 있다니,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 2020년 <뮬란> 실사판에서 그를 볼 수 있다. 일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기다릴 생각이다. 메이웨더, 파퀴아오, 맥그리거가 날고 기어도 역시 발차기는 이연걸이 최고니까!
WORDS 박한빛누리(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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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Hero 4 
스티플러는 굴복하지 않아

<아메리칸 파이>를 본 사람이라면 스티플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님의 대저택을 기꺼이 친구들에게 내어주는 파티광. 지루한 일상을 참아내지 못하기에, 그는 세 가지 행동을 반복한다. 신나게 놀거나, 누군가를 놀리거나, 새로운 이성을 꼬시거나. 이런 스티플러의 캐릭터는 바로 다음 해 개봉한 영화 <로드 트립>에서도 이어진다. <로드 트립>은 당시 <아메리칸 파이>의 대학판이라고 불린 캠퍼스 코미디물. 감독도 배우들도 다르지만, 오로지 스티플러만 다시 등장한다. ‘스티플러의 대학 생활’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참고로 <로드 트립>의 감독이 바로 토드 필립스다. 이후 토드 필립스는 <보랏>(2006), <올드스쿨>(2003), <행오버> 시리즈 등을 통해 에디터의 ‘최애 감독’이 되어갔다. 어쨌든 다시 캐릭터 얘기로 돌아오자면. 스티플러를 다시 만난 건 2012년이었다. <아메리칸 파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19금 동창회>. 극 중 30대가 된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의 상사는 학창 시절 공부만 했을 것 같은 지질한 인물이었는데, 유독 스티플러에게 주말 근무와 잔업을 시키며 과거의 한풀이를 하는 모습이었다. 모두 회사원이 되었고, 누군가는 결혼을 했다. 스티플러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유독 무거웠다. 결국 동창회 당일에도 야근을 하느라 회사를 떠나지 못한 스티플러. 친구들은 그의 회사로 찾아오고, 야성을 회복한 스티플러는 상사에게 통쾌한 한 방을 먹이고 사표를 날린다.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가 혼합된 결말. 솔직히 말하면 허무했다. 사표를 날린다고 삶의 무게가 없어지진 않는다. 오늘밤은 친구들과 기분 좋게 한잔하겠지만, 내일이면 숙취에 젖은 채로 혼자 일어날 테니까. 백수와 노예,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도 여전하다. 잔치는 끝났다. 스티플러는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그 영화도 벌써 오래전 얘기다. 사실 몇 달 전 그를 다시 만났다. 부쩍 나이 든 모습이었지만 새로운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유의 째지는 미소가 아니었다면 못 알아볼 뻔했다. 일상에 파장을 일으키고, 파티에 흥이 돋운 이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스티플러는 사회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았다. 파티는 더 커지고 수많은 이들이 뛰쳐나왔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위선 대신 분노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토드 필립스가 감독뿐 아니라 제작, 각본까지 맡은 이 영화. 혼돈을 꿈꾸던 스티플러는 그렇게 조커가 되어 있었다.
WORDS 원호연(<에비뉴엘>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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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조진혁
ILLUSTRATION Heyhoney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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