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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만원의 사나이

오정세는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훌륭한 배우가 될 자신은 없었는데 오래 할 자신은 있었어요. 제 호주머니엔 딱 그것뿐이었죠.”

UpdatedOn December 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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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필 무렵(이하 동백꽃)> 촬영이 막판이다. ‘쪽대본’ 받으며 달리고 있다고 들었다. 엔딩 신 대본은 나왔나?
엔딩 나왔다. 너무 좋더라.

배우들은 보통 4부까지 대본을 보고 출연 결정을 하지 않나. 대본의 첫인상이 어땠나?
처음에 4회 차까지 대본을 봤다. 엄청 재미있었다. 무작위로 대본을 펼쳐서 아무 장면이나 읽어도 재미있겠다는 느낌이 딱 들었다. 참 드문, 귀한 대본이었다.

그런 대본 받으면 배우는 신날 것 같다. 일단 대사 치는 맛이 있겠더라. 입에 착착 달라붙고, 리드미컬하고.
너무 신나고 부담되지. 나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 감독님도 그랬을 거다. 대본이 정말 재미있으니까 오히려 잘못 연기하면, 잘 찍지 못하면 안 되겠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대본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을 그대로, 딱 그대로만 전달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밋밋하지도 않게, 적당하면서도 그냥 흘러가지 않는 연기를 하는 것. 선을 지키는 게 힘들었고 그래서 많이 노력했다.

빤히 보이더라. 노규태 역을 위해 많이 준비했다는 게. 현장에선 준비한 걸 되려 덜어내는 작업을 많이 했나?
자꾸 욕심이 나더라. 잘해야 했으니까. 웬만하면 텍스트를 그대로 따랐다. 간혹 빈 공간이 생기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채우고. 현장에서 배우들은 늘 새로운 대본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몇 부 대본 나왔어? 그래서 어떻게 돼?” 시청자와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동백꽃>을 볼 때면 볼륨을 높였다. 대사를 토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흘려보낼 대사가 거의 없다. 대본이 정말 자세한데. 예를 들면, 노규태가 황용식과 투닥거리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규태 대사가 “너 왜 자꾸 말 놔. 이 시끼야. 내가 너보다 위인 거 같은데. 너 맻 학번이야? 대학 나왔어?”였다. 다른 작가님이라면 대본에 “몇 학번이야?”라고 썼을 텐데, 이 작가님은 “맻 학번이야?”라고 썼다. “몇 학번이야?”와 “맻 학번이야?”를 입으로 뱉어보니 느낌이 엄청 다르더라고. 그때 이런 마음으로 연기했다. 제발 10명 중에 1명은 ‘맻’이라고 들어줬으면 했다.

규태가 자영에게 울먹이며 한 대사 “왜 드리프트 타떠”에서 ‘떠’도 대본에 있던 건가?
맞다. “왜 드리프트 타떠”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

임상춘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꽤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어서 무척 궁금하다.
보통의 아가씨? 혹은 소녀 같은 분이다. 작가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동백꽃>은 어떻게 시작하신 작품입니까? 왜 쓰셨습니까? 뭘 이야기하고 싶었습니까?” 그때 들은 답이 인상적이다. 어느 소도시에서 창문이라곤 딱 하나 나 있는 술집들을 봤단다. 물망초라든가, 장미 같은 이름의 술집들. 그 술집 안에 한 여자가 앉아 있는데, 이런 생각을 했단다. ‘어쩌다 저 여자는 저곳에 있게 되었을까’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을까’ ‘저 사람의 인생은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그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쓰신 글이 <동백꽃>이다. 실제로 <동백꽃>도 동백이가 점차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오정세도 규태 역을 위해 디테일에 굉장히 신경 쓴 것으로 안다. 규태가 차고 등장하는 시계 중 하나는 대통령 경호원실 시계였다며? 중고나라에서 구한.
내 역할을 형상화하는 데 도움될 요소들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규태의 방에 외로움을 다룬 책들을 두기도 하고. 그런 요소들이 노규태라는 캐릭터를 잡는 데 일조했다. 나의 스타일리스트가 신경 쓴 규태의 디테일은 이런 거다. 단춧구멍에서 실밥 한 오라기가 삐져 나와 있다든가, 꼭 바지의 벨트 구멍 하나를 빼놓고 벨트를 맨다든지.

다른 작품을 할 때에도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일에 힘썼나?
그때도 신경 썼지. 그런데 <동백꽃>에서는 규태의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마치 나에게 ‘메인 잡’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신경 썼다. 규태를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바꾸기보다, 규태를 둘러싼 세계를 구현하려고 한 거다. 나는 대본의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조금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촬영하고 싶었다. 100퍼센트의 구현. 동백이에게 “야! 빙수 먹고 가!”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두 번째 테이크에서 내가 문득 “빙수나 먹고 가!”라고 한 적이 있다. 한 글자 바뀌었을 뿐인데 굉장히 크게 작용을 하더라. 대본대로 하려고 했다, 무조건.

 

“이번에는 작품 덕을 많이 봤다.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작품이 뭔가를 말하지 않으면 극 전체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동백꽃>은 빛나는 작품이다.”

 

연기의 흐름을 짜는 고유의 방식이 있나?
정해둔 방식은 없다. 문득 도움이 될 요소가 생각나면 그걸 적당히 취하는 식으로 만들어간다. <동백꽃> 촬영 중에 어떤 음악을 듣는 순간 규태의 주제곡 같았다. 그때부터 규태의 OST를 만들었다. 나를 위한, 나만의 노규태 OST. 용식이 OST도 있고 동백이 OST도 있다. 다른 배우들에게 추천하며 들려주기도 했다.

규태의 OST에는 어떤 곡이 있는가?
가수 정우의 노래인데, 지금 틀어주겠다.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인터뷰하자.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훅 뛰어올랐다는,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 않나? 그런 느낌이 온 적 있나? 혹은 이 일이 조금이나마 편해진 시점이라든가.
그렇게 ‘점핑’했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 없다. 1년 혹은 2년 단위로 그릴 수 있는 성장 그래프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건 못 그리겠다. 늘 그랬다. 현재를 기준으로 2~3년 안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공존했다. 다만 저 멀리 10년 전쯤의 나와 지금의 나를 놓고 보면 조금은 큰 것 같다.

<동백꽃> 촬영은 분명 좋은 시절로 기억되겠지?
그렇지. 이번에는 작품 덕을 많이 봤다.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작품이 뭔가를 말하지 않으면 극 전체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동백꽃>은 빛나는 작품이다.

신인일 때는 잘 모르는 것투성이고 모든 게 어렵지 않나.
나는 지금도 여전히 모르겠고 어렵고 도전이고 욕심이 난다. <동백꽃> 초반에 정말 욕심 많이 부렸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봤다. 술을 잘 못하는데, 어느 날에는 술 취한 연기를 날것으로 해보고 싶더라. 노규태가 술에 취하는 신이 많잖아. 나는 이선균 선배의 술 취한 연기를 되게 좋아한다. 술 취한 연기는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문득 술 마시는 장면의 촬영을 앞두고 욕심이 난 거다. 나의 평소 연기 스타일을 뛰어넘어, 날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노규태의 첫 술자리 신에서 나의 주량보다 조금 많이, 살짝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촬영에 임했다. 그런데 ‘액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내가 준비한 연기를 하고 있더라. 날것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크게 실망했다.(웃음) 이후부터 다시는 술을 먹고 연기하지 않았다. 한번쯤 다 내려놓은 규태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나는 연기 ‘덕후’다. 
뭐든 독특한 걸 발견하면 연기할 때 꺼내 쓰기 위해
내 속에 담아놓는다.”

 

평소에도 스스로를 내려놓는 순간이 많지 않은 편인가?
그렇다. 놓는 게 잘 안 된다. 예전부터 그랬다. 이유는 모르겠다.

연기 외에 오래 지속해온 일이 있다면?
특별히 없다. 나는 연기 ‘덕후’다. 뭐든 독특한 걸 발견하면 연기할 때 꺼내 쓰기 위해 내 속에 담아놓는다. 어떤 사람이 내 눈에 얍삽해 보이면 저 사람은 왜 얍삽해 보일까 분석해서 잘 기억해둔다. 연기할 때 쓰려고.

오정세가 절대 할 수 없는 연기도 있을까?
사람들이 ‘오정세가 저걸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만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 멜로가 되었든, 악역이든 상관없이.

오정세에겐 어떤 게 좋은, 탐나는, 꼭 잡고 싶은 대본인가?
기준 같은 건 없다. 다만 어떤 맛이 나는 걸 좋아한다. 무미건조하면 무미건조한 대로, 지루하면 지루한 대로 그 안에서 미학이나 맛이 존재하는 극이 좋다.

지금껏 정말 많은 작품을 거쳐왔더라. 우리가 생각하는 오정세의 시작과 실제 오정세의 시작에는 갭이 있는 것 같다. 첫 영화와 첫 배역이 기억나는가?
장길수 감독님의 영화 <아버지>에서 행인2 역할을 맡았다.

그때는 배우로서 어떤 관점과 신념, 시각을 가지고 연기했나?
글쎄. 두 번째 작품은 <수취인불명>인데. 경찰로 등장했다. 소지품 검사를 하는 신이 기억에 남는다. 범인에게 “아!” 하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입에 뭐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봐야 하니까 입 벌리라고. “아!” 근데 “아, 해봐!”가 너무 하고 싶더라. 그게 편한 것 같고. 촬영 전부터 당일까지 한참 고민했다. 한 글자를 넣을지 뺄지를 6개월 동안 고민한 적도 있다.

그때도 디테일의 귀재였네. 당시에는 무엇을 이루고 싶었나? 어떤 청사진이 있었나?
훌륭한 배우가 될 자신은 없었는데 오래 할 자신은 있었다. 내 호주머니엔 딱 그것뿐이었다. 걸어서 열 정거장 거리를 가야 할지라도, 호주머니에 1백만원이 있으니까 덜 지쳤던 거다. 배우가 되기에 나는 외모나 연기나 한참 부족했다. 물론 지금도 많이 부족하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케이. 나는 30년, 50년 동안 할 자신 있어. 여기저기 부딪히고 떨어져도 열심히 할 자신 있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게 나의 원동력이고 자산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다. 오디션에서 떨어지거나 하고 싶던 배역을 놓치면 ‘뭐, 오케이. 또 어떤 작품이 나에게 오려고 떨어진 걸까?’ 하고 생각했다.

거쳐온 작품들 중 지금의 오정세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나?
소소한 사건과 사고와 아픔, 기쁨이 다 뭉쳐서 내가 됐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작품 하나를 꼽는다면 역시 <남자사용설명서(이하 남사용)>다. 배우로 살면서 많이 도전하고 깨졌지만 그 모든 경험의 집합체가 <남사용>이다. 나는 원래 이 영화에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으로 캐스팅되었거든. 당시 인지도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주연이 안 잡힌 채로 시간이 흐르니까 감독님께서 ‘네가 해볼래?’라고 던지신 것을 턱 잡아버린 거다. 누구도 나를 그 역할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객도, 영화사도, 배급사도, 투자자도 모두 설득해야 했다. 쉽지 앉았지만, 일단 해보자며 달려들어 한 산, 한 산 넘어봤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
울렁증. 대중과 카메라 앞에서, 무대 위에서의 울렁증. 사실은 아직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첫 리딩이나 첫 촬영 현장에서는 울렁댄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 10년 전의 나와 비교해보면 그때보다는 지금이 낫다.

<동백꽃>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작가가 그린 결말과 관계 없이, 오정세는 마음속으로 노규태의 결말을 어떻게 그렸나?
3가지 버전이 있다. 첫째는 군수 선거 편. 용식이가 규태에게 그러지 않았나 ‘난 너 절대 안 뽑아!’ 그래서 진짜 군수 선거에 나간 노규태가 1표 차로 낙선하는 거다. 두 번째는 노규태가 용식이, 소장님과 함께 까불이 잡는 일에 일조해서 특별 전형으로 경찰이 되는 거다. 경찰이 딱 됐는데 용식이 후배로 들어가는 것. 하하. 마지막 하나는 규태가 자영이랑 잘되어서 규태 주니어가 탄생하는데 허세 가득한 의상에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까지… 딱 리틀 노규태로 그려지는 장면. 이런 결말들을 생각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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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곽기곤
STYLIST 전진오
HAIR & MAKE-UP 이은혜
ASSISTANT 정소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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