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검색한다. 출연자의 이름을 찾고, 필모그래피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 배우가 그였음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 배우 박해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비슷하다. 그는 늘 새로운 역할에 도전해왔다. <나의 아저씨>에서 겸덕 스님이었던 박해준은 <미생>의 천과장이자 <독전>의 마약상 박선창이며 <4등>의 독한 수영 강사 광수였다. 매 작품에서 새 얼굴을 보이고 있는 박해준을 만났다. <악질경찰>을 보고 만나서, 예민하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친근한 동네 형 같아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와 부부로 출연한다고 들었다.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는 이영애와 부부로 나오고. 쟁쟁한 배우들과 잇따라 부부 연기를 하게 됐다.
함께 호흡 맞추는 게 정말 영광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연기해온 느낌을 받으면 너무 좋다. 옆에서 연기하는 보습을 보면 대단하다 싶을 정도다.
박해준의 연기를 보면 항상 준비를 많이 했다는 느낌이다. 강한 캐릭터를 많이 맡았기 때문인 것도 같다.
맡은 인물을 깊게 생각해보는 것이 준비다. 감독님과 상의하고, 상황에 맞게끔 촬영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안 풀릴 때면 대책 없이 현장에 간다. 직접 부딪치는 편이랄까. 부딪치다 보면 그 안에서 뭔가 나오니까. 어쨌든 내가 맡은 배역을 좋아해야 한다. 이 캐릭터의 어떤 면이 좋은지 고민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준비인 것 같다.
인상적인 악역은 <악질경찰>의 권태주와 <독전>의 박선창이었다. 권태주와 박선창은 어떤 점을 좋아했나?
<악질경찰>의 태주는 명확하게 악한 인간이다. 근데 인간이란 사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권태주는 큰 권력의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근사해 보이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내면에는 결핍이 있다. 그 부분을 동정했다. 마지막에 돈다발 위에 쓰러져 죽는데, 그때 자기가 쫓던 목표가 잘못됐음을 깨닫는 느낌이어서 마음이 조금 아련했다. 씁쓸해 보이길 바랐다. <독전>의 박선창도 비슷한데, 권태주보다는 진중하지 못하고, 약에 찌들어 있다. 눈앞의 즐거움에 집착하기도 하고. 그래서 멀리 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 순간을 즐겼다. 촬영 현장에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갔다. 악한 행동을 즐겁게 해야만 했으니까. 상대를 괴롭힐 때도 즐거워야만 박선창이라는 인물이 설명됐다.
악역에만 특화된 배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시선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일반적이지 않은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매번 도전하는 것이 배우에게는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악역들에 도전했는데, 사실 쉬운 역할이 하나도 없었다. 하하. 사람들은 내가 악한 역할에만 특화된 배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시선이 두렵지 않다. 내 본심이 나쁘지 않다면 언제든 다른 인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지금 내 영역을 많이 넓혀놓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도전할 수 있는 역할이 곧 배역 선택의 기준인가?
작품의 메시지도 중요하다. 영화라는 성에 내가 어떤 벽돌을 쌓을 수 있느냐, 그러니까 어떻게 작품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또 내면에 비밀이 많은 캐릭터를 좋아한다. 관객들이 그 인물의 내면을 고민해볼 수 있거나, 궁금해하는 인물들을 선택해왔다. 명백한 답이 나오지 않는 인물을 좋아한다.
2019년 한 해 동안 거의 여섯 편의 작품이 발표됐다. 체력이 굉장하다.
힘들다. 쉬고 싶은데 쉬면 일이 없어질까 봐 불안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일을 해오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하하. 스스로를 압박한 적도 없다. 최대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신중하게 고민해 선택한 작품들이고 시기가 잘 맞물려서 이번 연도에 많이 개봉하게 됐다. 쉼 없이 달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동일 인물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아저씨> 때의 겸덕 스님이 <미생>의 천과장인 줄도, <독전>의 마약상인 줄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작품이 공개될 때 관객이 내 연기를 보고 배우 박해준이라고 인지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고 찾아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늘 새로운 배우로 생각되길 바란다고, 정지우 감독님에게 얘기했었다. 원하는 대로 되기는 했다. 어떤 선배는 이런 조언도 했다. 내가 대중적인 인지도가 없어서 손해 보는 것도 있다고. 대중과 가까워지는 과정이 늦어지는 게 안 좋다는 뜻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 과정이 무척 신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로서 작품에 녹아든 것 자체가 참 고마운 일이다. 그 작품을 내가 잘해냈다는 것. 그게 나에게는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이다. 대학 때 ‘예종의 장동건’이라 불렸다는 소문이 있다.
하하. 내가 한 말은 아니다. 그렇게 불린 적도 없다. 한예종 선후배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내 입장에서야 너무 영광이지.
동기들이 일찍부터 영화계에 등장한 것과 달리 연극 활동을 오래 하다, 뒤늦게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졸업하고 나서 공연을 해보고 싶었다. 다 함께 만드는 창작극에도 관심이 있었다. 좋아하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에 극 작업을 많이 했다. 조금 실험적인 공연을 해보려고 지원금을 받고, 몇 명과 함께 연습실 구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실 연기를 잘하지 못해서 실험적인 공연에 시선을 돌렸던 것도 있다. 그 뒤 극단 차이무의 이상우 선생님 연출작에 출연하게 됐다. 대학 선생님이신데, 학교 다닐 때와 다르게 많이 좋아졌다고, 배우 해도 되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부터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도 보고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흘러오게 됐다.
창작극이 자양분이 되었나?
과거에는 무대 공연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를 분리해 보는 것 자체가 그랬다. 극단 차이무에서 이상우 선생님과 작업하며 관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게 됐고, 많은 도움이 됐다. 영화 매체를 촬영할 때도 도움이 된다. 카메라 렌즈가 관객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역할이라 생각하고 연기한다.
지금도 무대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것 같다.
하고 싶다. 엄청 재미있는 작업이다. 한 달, 길면 석 달 동안 한 작품을 위해 여러 명이 놀아볼 수 있는 기회다. 좋기는 하지만 시간이 잘 안 나서 못하고 있다.
무대에서의 연기와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기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한다. 촬영장도 스태프들만 최소 사오십 명 많게는 백 명까지 된다. 그들을 관객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편하다. 스태프 모두가 내 연기에 집중한 상태이고, 그럼 나는 응원을 받으며 연기를 하는 것이다. 공연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역할에 대한 고민이 잘 안 풀릴 때면 무작정 현장에 간다고 했다. 현장에서 새로운 영감이나 자극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조금 일찍 촬영 현장에 가서 가만히 있으려고 한다. 현장이 주는 기운을 많이 받는 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다. 귀 기울이는 편이고, 상대가 없는 신에서는 상상해서 하려고 한다. 감독님과 주변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많이 수용하는 편인데, 아주 고맙게 잘 받아먹고 있다. 하하. 내가 사실은 굉장히 순종적이다.
만약 상대 연기자가 예상 밖의 연기를 펼치면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하하. 생각해보면 한 작품에서 내가 욕심부릴 장면은 얼마 안 된다. 이 인물이 꼭 보여줘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감독님과 충분히 상의하면 해결된다. 그 외에 다른 장면에서 많은 욕심을 부리다 보면 작품의 큰 틀이 흔들리는 것 같다. 그냥 잘 들어주고 잘 내어주고 잘 먹을 수 있게 떠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전에는 총과 칼을 든 배우였다면 이제는 형제와 남편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 앞으로 어떤 역할에 도전할 것인가?
최근에는 세상을 편안하고 바르게 볼 수 있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실제 나와 가까운 인물을 표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욕심내기보다는 좋은 작업자들과 즐겁게 일하고 싶다.
좋은 배우란 무엇일까 궁금증도 든다.
좋은 배우라… 좋은 배우는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포장하기보다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 생각한다. 말이라는 게 그렇다. 대화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도 하나의 표현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야 말할 수 있다. 연기도 비슷한 것 같다. 그 인물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를 이해하고 잘 표현해내는 게 좋은 배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고민은 뭔가?
이번 작업에서는 준비를 많이 해서 명확한 연기를 하고 싶다. 이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울지 고민했다면, 이제 자연스럽지만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책임감도 살짝 생겼다. 내 일만 잘해내면 되겠다는 생각에 캐릭터에만 몰두했는데,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든다. 하하하.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감투를 받거나,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지는데, 이제는 짐도 짊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책임감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 아주 명확하고 정확하게 해낼 거야라고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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