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화를 만났다. EXID 정화가 아니다. 이제 그렇다. 가수 정화를 사랑했던 팬들은 아쉽겠지만, 정화는 다시 새로운 꿈 앞에 서 있다. 정화가 통과한 기억들. ‘EXID’로 추억되는 모든 순간들을 꺼내 이야기할 때는 잠깐 눈 속 깊은 곳에서 감정을 힘들게 고르기도 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어쩔 수도 없이 길게길게 늘렸다. 인생을 극본의 1막, 2막으로 나누는 비유는 뻔하지만, 그래도 입에 붙는 이유는 인생이 꼭 그러니까. 선택과 과정과 변화와 사건의 연속이니까. 그런 뻔한 비유를 그녀에게 한 번 더 대입해보면, 챕터와 챕터 사이에 서 있는 정화가 나온다. 새로 시작하는 정화의 챕터는 도전기일까 성장기일까. 아무렴 상관없겠다. 지금 정화에게는 두 가지 이야기 모두 필요하니까.
오늘은 배우 정화로 만났다. 어떻게 지냈나?
시간 여유가 많이 생겼다.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하고 있다. 요즘엔 특히 영화 보러 많이 다녔다. 아, 여름엔 탁구도 배웠다. 내가 집순이에 가까운 편인데, 말하고 보니까 꽤 자주 밖으로 돌아다닌 것 같다. 하하! 개인 시간 외에는 연기 수업도 받으면서 다듬어가는 시간을 갖고 있다.
연기 데뷔가 빨랐다. 2004년에 방영한 드라마 <아내의 반란>이 데뷔작이다. 이후로도 몇몇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꾸준히 연기를 해왔다. 지나온 이력만 보면, 오히려 EXID 정화가 어색할 정도다.
연기도 좋았지만, 연습생 당시 노래와 춤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흥미가 생겼다. 특히 평가 무대나 가상 쇼케이스 무대에 올랐을 때,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짜릿한 감정들이 너무 좋았다. 나를 뜨겁게 만들어주는 느낌? 연기와는 또 다른 흥분이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가수 데뷔의 기회가 왔을 때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EXID 정화로 출발했지만, 여전히 연기에 대한 갈망도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지. 연기 욕구가 강한 편이다. EXID 활동을 하면서도 개인 활동 기회가 주어지면, 꼭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거든. 그런 이유로 연기 연습은 꾸준히 했다. 그렇지만 팀 스케줄이 바쁘다 보니 아무래도 준비하는 시간들이 충분하지는 않았지. 연기에 대한 아쉬움, 갈증 이런 것들을 그때 많이 느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시간이나 기회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요즘은 온전히 연기에 집중하며 준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팀의 막내였다. 곁에는 늘 언니들이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솔로 활동을 한다. 가장 큰 변화라면 어떤 걸까?
팀 활동을 할 때는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게 많지 않았다. 든든한 언니들이 곁에 있었고,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멤버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잘 해결하고, 헤쳐 나갔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게 많아졌다.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들도 훨씬 늘었고.
많이 어렵겠다. 익숙한 일이 아니니까.
아직 커다란 어려움이라든지 걱정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까’ 고민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부담 반, 기대 반 뭐 그렇다. 가끔은 설레기도 한다. 혼자 판단하고 결정해서 무엇을 하게 됐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거든. 꼭 캠페인의 한 장면처럼, ‘내가 해냈어!’ 같은 느낌? 하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라는 사람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다. ‘나’를 잘 알 수 있는 시간이 될 것도 같고. 아무튼 기대된다. 재밌다.
그렇게 잘 알게 된 정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생각이 많다. 뭐든 깊게 생각하는 편이다. 시원시원하게, 쉽게 빠르게 결정하는 성격이 아니다. 판단이 서도 곱씹어보고. 신중한 편인데, 이번에 혼자 활동하게 되면서 그런 성향이 더 두드러지더라.
그런 신중한 정화가 최근 웹 드라마 <사회인>을 선택했다. ‘야구’를 주제로 다루는 만큼, 아무래도 준비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맞다. 일단은 야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내가 야구를 잘 몰랐다. 캐스팅이 결정되고 나서 야구 경기도 보고, 용어 공부도 시작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름 공부를 했는데 하나씩 알아가다 보니까 재밌던데? 하하. 좋아하는 팀도 생기고. 그래서 직관도 갔다. 키움 히어로즈다! ‘넥센 히어로즈’였을 당시 시구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이유는 아니고, 어느 날 경기를 보는데 키움 선수들의 스타일이 나랑 맞는 느낌인 거지. 하하. 신중하다고 해야 하나. 경기가 안 풀릴 때도 급하게 운영하지 않고 천천히, 한 박자 쉬면서 가는 게 보이더라.
편견을 깨기 위한 노력은 분명 한계가 있을 테니까.”
그런 게 보이면 이미 빅팬 다 된 거다.
그럼그럼! 경기가 없는 월요일 빼고 꾸준히 야구 경기를 본다. 생중계를 놓친 날이면 스포츠 뉴스라도 본다. 경기 이겼나 졌나 궁금하거든. 아. 이번에 <사회인> 촬영하면서 진짜 ‘사회인 야구단’도 만들었다. 야구단 이름은 ‘하트피플’. 드라마 감독님께서 자연스럽게 감독을 맡으셨고 중요한 건, 내가 단장이다! 하하하! 그래서 단톡방에서 소통도 열심히 한다. 보통 토요일에 경기가 있는데, 스케줄이 맞으면 꼭 참가한다. 야구 재밌다, 정말!
<사회인>에서 정화가 맡은 ‘성시은’은 어떤 캐릭터인가?
시은이는 남자들만 있는 야구단에서 유일한 여자 선수다. 거칠고 불편할 법한데 밝고 활달하게 어울리는 쾌활한 캐릭터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스스로 깨지 못하는 두려움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이다. 내가 해석한 시은은 밖보다 안, 타인보다 본인 스스로 만들어놓은 울타리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두려움을 꽁꽁 감추고 있는 듯이.
그 두려움을 깨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에서 번트만 대다가 어느 순간 타격을 하는 장면. 극 중 시은처럼 정화도 깨고 나온 무엇이 있다면 어떤 걸까?
깨고 나왔다기보다는 깨달은 쪽에 가까운데, 한 번은 앨범을 준비하는데 ‘앨범 콘셉트에 꼭 맞아야겠다’ ‘잘 어울리는 모습을 꼭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박힌 때가 있었다. 너무 잘해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정말 악착같이 준비했다. 노래도 비주얼적인 노력도, 퍼포먼스도 전부. 이번 앨범만큼은 내가 중심을 잡고 원하는 방향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고집 있게 매달렸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보니까 더 중요한 게 있구나, 소중한 게 있구나, 싶었다. 일보다 내가,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보였다. 물론 그렇게 악착같이 몰입한 시간을 통해 깨달은 거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나를 일에만 놓아두거나 가두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옳은 방법임을 깨우쳤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제는 ‘배우 정화’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아이돌이었다. 배우로 전향해 연기하는 것에 어느 정도 편견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노력해 결과로서 돌파해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노력의 방향이 ‘편견’을 향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편견을 깨기 위한 노력은 분명 한계가 있을 테니까. ‘배우’라는 인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석해서 자연스럽게 노력으로 이어진다면, 편견도 어느 순간에는 사라지지 않을까.
출발선 앞에 서 있는 느낌일 것 같다.
그동안 웹 드라마는 <마스크> <내 남자는 육아도우미> 그리고 <사회인>까지 3편을 쭉 했다. 등산에 비유하자면 <사회인> 전 두 드라마는 등산을 앞두고 가방도 사고,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준비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고. <사회인>은 장비들을 챙겨 들고, 메고 산 입구에 서 있는 느낌? 이제 막 출발선에 선 느낌이다.
오르려고 하는 산이 어렵고, 높고 아득하게 느껴질까?
어렵고, 높고 아득한 건 맞는데, 또 그래서 즐겁다. 내가 쉽고 편한 선택은 잘 하지 않는 성격이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을 정도다. 하하하! 그런데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게 낫지 않나? 배워야 하는 시기고, 배워야 하는 과정 앞에 있다면. 어렵더라도 그 과정을 통과하면 얻는 게 분명 있을 테니까.
배우 박정화는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까?
연기를 하고 싶은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연극 작품을 통해 위로를 많이 받았다. 정확히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위로받았다.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 안전하게, 잘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맛있는 음식 먹을 때 가족한테, 친구한테도 맛보여 주고 싶은 마음 있지 않나. 그렇듯이 내가 연기로 위로받았듯이 누군가에게도 위로를 전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다. 그런 배우로 성장하고 싶다.
이제 2019년도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매년 1월 1일 하나의 단어를 정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단어 하나를 정해놓고 그해의 키워드로 삼아 노력하는 거다. 올해는 ‘끈기’였다. 사전적 의미는 ‘쉽게 단념하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 그래서 올해 남은 목표라면 ‘끈기’ 있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거? 그렇게 잘 보내고 나면, 2019년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또 다른 시작을 했던 한 해로 기억되지 않을까. 아니, 또 다른 시작을 잘해냈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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