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의 주소록을 뒤적였다. ‘류승범’이라는 이름 석 자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 번호는 주인을 잃어버린 공허한 숫자가 되었다. 대략 2012년 즈음부터였을 거다. 그는 한국을 떠났다. SNS를 통해 간간이 전해지는 소식은 파리에서의 자유로운 삶, 발리에서 파도를 타는 여유 혹은 국외 어딘가에서 떠도는 듯한 이미지였다. 그렇게 류승범은 방랑자가 되었다. 간혹 작품 혹은 개인 활동이 있을 때 잠시 돌아왔다.
우리의 시작은 한 통의 이메일에서부터였다. 폴로 랄프 로렌과 표지 모델을 물색하던 중,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미 사장된 전화번호를 통해 연락이 닿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메일을 보냈다.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은 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낸 연락이었다. 내가 기댈 믿음이라곤 2004년 <아라한 장풍대작전> 개봉 당시 인터뷰부터 2009년 즈음 이루어졌던 <아레나>의 촬영까지 연결된 가는 인연의 끈 하나뿐이었다. 꼭 한 시간 만에 회신이 왔다. “이렇게 이메일을 통해 다시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새로운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 홍보차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나마 여유가 있다는 하루를 우리를 위해 할애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류승범과 우리는 목소리가 아닌 텍스트로 소통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인터뷰에 대한 것이었다. “저의 마지막 제안은 인터뷰를 생략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침묵하며 지내온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 더더욱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난감한 부탁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인터뷰를 생략하는 것에 동의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토록 공손한 부탁의 글에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나. 동시에 그가 말하는 ‘침묵의 시간’이 어쩌면 더 성숙해진 류승범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마저 증폭시켰다.
약 16년 전쯤 처음 대면한 그는 시쳇말로 ‘양아치’스러운 청년이었다. 이 수사는 그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님을 명시하고 싶다. 그냥 누구나 그렇게 느꼈듯, 류승범의 연기에도 그 같은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류승범의 초기작들을 본 관객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믿는다. 아무튼 당시 그는 급부상하는 충무로의 주역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삶 속에 묻어온 세월의 때는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다.
지금도 에디터의 뇌리에 명징하게 남아 있는 그의 답변. 질문은 이러했다. “만일 당신이 형 류승완 감독의 작품을 통해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당시 스물다섯 살의 청년 류승범은 답했다. “조금 더 어렸으면 ‘삐끼’. 그걸 하기에도 나이가 좀 있으니 웨이터나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 솔직한 대답은 애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배우에 대한 사랑을 더욱 커지게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지금 류승범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의 이미지는 더욱 멋스러워졌다. 신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그 어떤 록 뮤지션보다 길게 흩날리는 헤어 스타일. 입과 턱 주변을 무성하게 뒤덮은 수염. 되려 16년 전의 그보다 더 청춘의 표상 같았다. 과거의 ‘양아치’스러운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도 느낀 바였다. 지금의 류승범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젠틀맨’이 되어 있었다. <아레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여유가 넘쳤고, 유머러스했으며, 위트 있는 신사였다. 더욱이 폴로 랄프 로렌 제품들을 걸쳤을 때 그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졌다. 카메라 앞에서 웃통을 훌쩍 벗어던지는 행동에서의 자유로움은 그 어떤 셀러브리티도 표출해내지 못하는 ‘사람’의 순수함이었다.
이번 류승범과 촬영장에서 나눈 사람다운 교감은 말의 공허함으로 채워진 그 어떤 인터뷰보다 더 진솔한 인터뷰였다. <아레나>와 류승범은 이미 이번 촬영을 위해 나눈 이메일상의 텍스트를 통해 진심을 다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커버 스토리에는 시간을 쪼개어 공식적으로 나눈 질문과 답이 없다. 하지만 그는 사진으로 충분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 이미지와의 대화 속에서 도출된 부러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분명 류승범은 이 시대 최고의 배우 중 하나이자, 셀러브리티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그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라이프스타일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이다.
촬영 막바지 그는 내게 말을 건넸다. “10월 즈음 파리에 올 계획은 없어요?” 이유인즉, “만일 그러면 다시 한번 멋진 촬영을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요”라는 것. 11월이나 12월은 안 되냐고 반문했다. “그때는 제가 파리에 있지 않을 예정이에요. 친구의 전시회 때문에 슬로바키아에 머무를 것 같거든요.” 기회를 만들어서 날아가겠노라고 답했다. 꼭 촬영이 아니어도 파리에 들를 일이 있으면 보자고. 배우 류승범이 아닌 사람 류승범을 그곳에서 만나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류승범은 자신의 이름 석 자 앞에 ‘사람’이라는, 쉬우면서도 좀처럼 붙이기 어려운 수식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류승범의 이름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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