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우의 나이가 궁금한 적은 없다. 그가 대역 없이 격한 액션 연기를 소화했다는 기사를 보고,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연기를 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대역 없이? 했겠지. 권상우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권상우와 인터뷰 약속을 잡은 후에야 그의 나이를 검색했다. 한국 나이로 마흔넷. 권상우가 더 나이 들면 지금의 재키 찬이나 톰 크루즈처럼 될까? 대역 없는 액션 연기의 ‘끝판왕’이 되려나? 권상우의 촬영을 앞두고는 흰 티셔츠 입은 남자 사진을 그러모았다. 하얀색 반소매 티셔츠 하나. 그렇게 입은 권상우가 궁금했다. 지금껏 남자들에게서 흰 티셔츠에 청바지 입은 여자에 대한 ‘로망’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가. 그러나 이것은 남녀 불문의 문제다. 하얀 티셔츠는 건강한 멋쟁이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종이인 법. 나이가 몇 살이든 하얀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멋지다. 지금 흰 티셔츠를 입은 마흔넷의 권상우처럼. 권상우는 3편의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 첫 테이프를 <두번할까요>로 끊는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다. 영화에서 권상우는 팬티를 판다. 속옷 회사의 영업팀 과장이다. 촬영 때문에 전날 밤을 꼬박 샜다는 권상우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스튜디오에 왔다. “안녕하세요.” 조용하고 편안한 말씨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약통을 꺼내 알약을 몇 개 입에 툭 털어 넣고 삼켰다. 그리고 엷게 싱글거리며 스튜디오 곳곳을 걸었다. 낯선 게 없는 사람이구나. 불평도 없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나?
너무 좋아한다. 인터뷰도. 배우는 관심받지 못하면 외롭다.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생기면 여과 없이 내 얘길 하는 편이다. 나와 인터뷰하면 기자들은 뽑아낼 게 많다. 솔직하니까. 숨기거나 꾸며 말하는 걸 못한다.
가볍게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야구 모자를 쓰거나 후디를 입어도 좋더라. 여전히 그런 게 잘 어울려서 좋겠다.
총각 때는 나름 피부과도 다녔는데. 이제는 동안인지, 외모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나태해진 건 아니고. 그냥 내 나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영화든 드라마든, 대본도 안 보고 출연하겠다고 나선 적 있나? 대본 아닌 다른 부분에 끌려서.
아니. 시나리오가 언제나 먼저였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어도, 캐릭터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 돌아섰고. 영화는 첫 작품 혹은 두 번째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과 많이 일했다. 대부분 곧 일을 낼 것 같은 감독들이었다. 그런 작품에, 잔뜩 기대하며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두고 봐’ 하는 거지. ‘우리가 해냈어’ 하는 순간을 꿈꾸고.
<두번할까요>의 박용집은 어떤가? 곧 일을 낼 감독인가?
박용집 감독이 연기를 잘한다. 촬영 때 감독이 연기 시범을 보일 때가 있는데, 재미있게 잘해준다. 유연한 감독이다. 박용집이 <두번할까요> 같은 영화를 또 찍으면 좋겠다. 보통 배우가 영화 출연을 결정하는 시점은 투자사와 배급사가 결정된 다음이다. 그다음 책(시나리오)을 본다. 그런데 난 <두번할까요>를 책만 보고 선택했다. 투자사와 배급사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만큼 책이 재미있었다.
영화의 첫 신이 ‘이혼식’이라던데?
‘그게 뭐야? 말이 되나?’ 싶을 거다. 그게 말이 되도록 만든 영화다. 과장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잔재미가 있다.
맡은 배역의 이름은 현우. 이혼식장에 서는 남자다.
아주 평범한 남자다. 이혼 후의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권상우는 결혼 전 싱글 라이프를 얼마나 즐겼나?
안 그래도 그런 생각했다. 내게는 싱글 라이프가 얼마나 있었나. 서울 올라와서 딱 9개월 혼자 살아봤다. 그때가 유일한, 혼자만의 시절이다. 좋긴 했다. 눕고 싶을 때 눕고. 난 아침형 인간이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누워 있는 건 원래 못하지만. 그래도.
권상우는 주연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화만 놓고 보면 조연 한 번 하고, 바로 주연 자리에 섰다.
데뷔가 늦었다. 그 후로는 생각보다 빨리 이름을 알렸고.
자고 일어나면 팬 카페 회원 수 앞자리가 바뀌던 때였다. 당시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하나?
글쎄. 모르겠다. 난 그냥 운때가 잘 맞았던 것 같다. 배우는 결국 타이밍 싸움이다. 찰나의 감정을 어떤 감독님이 어떻게 뽑아 만드는가. 자신과 잘 맞는 작품을 만날 수 있나, 없나. 좋은 작품도 시기가 안 좋으면 묻힌다. 배우들은, 상위 0.1퍼센트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역량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민식, 송강호, 황정민 같은 배우가 될 수 없다. 그 0.1퍼센트의 배우들과 나를 구별하는 나만의 무기가 액션 연기라고 생각한다.
<두번할까요> 이후에는 <귀수> <히트맨>도 개봉 예정이다.
뒤의 두 영화에 액션 신이 많은 것 같던데. 데뷔 초부터 꾸준히 몸을 만들고 유지한 이유가 언젠가 그런 작품을 하고 싶어서다. 두 영화를 보면 놀랄 거다. ‘권상우 이제 40대인데. 오히려 더 세졌네’ 하고.
욕심이 있었나? 20대 때보다도 센 액션을 보여주고 싶다는.
옛날엔 ‘몸짱’ 하면 권상우였는데. 하하. 이제는 내 액션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겠지. 액션 연기는 여전히 내가 가진 무기니까 마음껏 보여주고 싶다. 55세가 되어도 지금과 같은 스피드, 파워로 액션 연기를 하고 싶거든.
그게 지금까지의 목표였나? 언제고 파워풀하고 빠른 액션을 소화하는 배우가 되는 것.
그런 건 아니다. 무명 때 어떤 카탈로그를 찍고 엄청 큰 돈을 받았다. 80만원이었나. 그 돈을 받아 지하철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했다. PCS폰으로. 모델 일 하고 돈 받았다고. 금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말했다. 나의 목표는 ‘어느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세상이 나라는 사람을 알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 이뤘네?
내가 잘해서 이룬 건 아니고 상황이 잘 맞아서.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청춘 코미디 영화도 하고,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성장 영화도 하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도 하고. 누가 몰라줘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위안이 되는 영화들도 있고.
궁금하다.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는 영화는 어떤 건가?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나 <통증> 같은 작품. 최근엔 부산에서 계속 촬영했는데, 어느 새벽에 잠이 안 와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를 다시 봤다. 역시 좋더라고. 좋아서 또 잠을 못 잤다.
권상우는 스타가 될 거라고 예견한 사람이 주변에 있었나?
힘을 주던 분들은 있지. 매니저 몇이 ‘참신한 캐릭터가 하나 나타났다’고 말했었고. 그래도 연기를 배운 적조차 없으니 스타고 주연이고 생각 없었다. 근데 주연을 한 번 하고 나니까 연기 욕심이 나더라고. 사람은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연기 욕심, 작품 욕심은 지금이 제일 크다. 근래에 열심히 씨를 뿌려두었다. 곧 다 보여줄 거다.
설레나?
엄청 설렌다. 지금의 나를 설레게 하는 건 별로 없거든. 좋은 옷이든 맛있는 음식이든 별 감흥 없다. 그런데 현장 가면 너무 좋다. 빨리 이것저것 많이 하고 싶다.
멋지다. 일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면 정말 좋지.
한 장면 찍고 나면, 다음 신 들어가기 전에 스태프들이 세팅을 하지 않나. 배우는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현장 스태프들이 “죄송합니다. 빨리 할게요” 한다. 요즘 그런 말 들으면 이렇게 말한다. “죄송할 거 하나도 없어.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좋아.”
삶에 여유가 있어, 일을 더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웬만한 건 다 갖지 않았나. 예쁜 아이도 둘 있고.
물론 그런 것도 있지, 확실히. 이런 생각도 한다. 아이에게 보여줄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할아버지가 됐을 때, 아이가 내 영화를 본다면 행복할 것 같다.
대역 없는 액션 연기는 언제까지 하고 싶은가?
최대한 오래. 지금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몸으로 만들면서 한국에는 없던 캐릭터가 되고 싶다. 현장에서 땀 흘리며 몸으로 연기할 때, 속으로 이런다. ‘상우야. 너 정말 잘하고 있다. 허투루 살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
작품 하면서 느끼는 본인의 존재감이 있지 않나. 요즘은 어떻게 느끼나? 본인의 존재감에 대해.
솔직히 이제는 사람들이 권상우가 주연인 영화라고 해서 보지는 않지. ‘0.1퍼센트’의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쏟아도 안 되는 영화가 있는데. 내 모든 걸 쏟아붓고, 관객에게 질리지 않게 다가가고, 다양한 장르 소화하고. 그냥, 이런게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에 한 인터뷰에서 서른다섯에 은퇴할 거라고 말했던 것 아나?
그런 말 매번 했던 것 같다. 서른다섯에는 또 ‘마흔 살이 되면 은퇴해야지’ 생각했고.
왜 계속 그런 마음을 먹나?
나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고. 그런데 제대로 쉰 적이 없다. 축구를 되게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해외 축구 팀 경기 ‘직관’한 적도 없다. 나는 미래를 위해서만 살았다. 진짜 하고 싶은 건 마음속에 묻어뒀다. 미련 없을 만큼 일하고 업계를 떠나서, 묵혀둔거 다 하며 살고 싶다.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일한다.
사람들은 이제 권상우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기대하는 게 없을 것 같은데? 난 이 세계의 중심부에서 한참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내 역할 잘하다 보면 나를 알던 세대는 가끔 기억해주겠지. 그럼 좋은 거고.
그 세계를 멀찍이서 보니 어떤가?
모르겠더라. 이젠 그 세계를 모르겠다. TV를 잘 안 보기도 하고. 나이 먹었다고 느끼는 게,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이 제일 재미있다. 오락 프로그램은 재미가 없더라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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