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의 파인 다이닝 요리사들은 재료에 집중한다. 맞춤 재배해주는 농장에서 얻은 채소나 심혈을 기울여 직접 재배한 작물 따위를 접시 위에 힘주어 올린다. 도외시하던 재래종 재료와 존재도 알지 못했던 야생 들풀 역시 핵심 타깃이다.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와 블루힐의 댄 바버를 방불케 할 만큼 재료의 탐색에 열정을 불사른다. 재료로, 오직 재료만으로 자신의 요리에 개성과 희귀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서울의 요리사들이 만들고 있는 이 흥미로운 움직임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고 있을까?
EDITOR 이경진
재료는 요리사들의 마지막 필살기다
매달 세 번 열리는 마르쉐@ 농부시장과 채소시장에 가면 손종원 셰프를 어김없이 만난다. 레스케이프 호텔 라망 시크레에 스카우트되어 미국에서 들어온 그는 단 한 번도 마르쉐@에 결석한 적이 없다. 아침 일찍 달려와 개장 시간에 맞춰 장을 보고 런치 서비스를 하러 호텔로 부랴부랴 돌아간다. 주렁주렁 매달린 장바구니엔 진귀한 재료가 한가득이다. 마르쉐@엔 바질이나 루콜라 같은 흔한 허브부터, 농부들이 철마다 수확하는 재래종 채소, 과일이나 이국적인 채소, 야생의 나물과 허브 꽃, 심지어 소박한 들풀까지 일반적으로 구할 수 없는 품목들이 항상 모여든다. SSG푸드마켓에는 절대 없는 별다른 맛이 이 시장에 있다. ‘개근상’ 손종원 셰프 외에도 라이프와 오스테리아 오르조의 김호윤,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 등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이 마르쉐@를 즐겨 찾는 이유다.
아예 농부의 밭을 분양받은 요리사들도 일군을 이룬다. 마르쉐@을 통해 요리사들과 인연을 맺고 텃밭에서 접시까지 밀접하게 의견을 나누며 새로운, 그리고 더 맛있는 식재료를 생산하고 있는 이장욱 대표의 남양주 밭은 미쉐린 별 밭이나 다름없다. 이장욱이 일구는 ‘준혁이네 농장’에서는 2백여 종 다품종이 소량으로 재배된다. 이 밭에는 강민구, 주옥의 신창호, 권숙수의 권우중, 오프레의 이지원, 임프레션의 서현민 셰프 등의 전용 구획이 있다. 파인 다이닝의 화폭 같은 접시 위에 쓰기 좋은 마이크로 허브를 많이 재배하고 있지만, 백미는 따로 있다. 이를테면 지난봄 오프레 접시에 오른 슈거스냅 껍질콩은 오로지 오프레에서 쓰기 위해 씨앗을 심고 셰프가 원하는 맛과 향, 크기로 재배했다. 최근 이장욱 대표는 임프레션에서 사용할 영콘 수확을 시작했다고, SNS에 소식을 알렸다. 셰프가 원하는 특수 채소를 맞춤 재배하는 것이다.
2010년대 들어 한국 파인 다이닝은 급격한 발전 궤도에 올랐다. 유학과 해외 경험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돌아온 젊은 요리사들이 도제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귀국과 동시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시작한 그들은 파인 다이닝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전 세계에서 부는 발효 트렌드를 타고 한식이 주목받았다. 한식의 기본 양념인 장 맛이 재평가되고 섬세하게 재정립되었다. 고조리서에서 발굴된 한식 조리법은 서양에서 들어온 조리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지평으로 접어들었고, 한국 식재료를 다시 찾는 움직임도 동시에 일어났다. 식문화가 단절되어 산촌의 할머니들이 아니고서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야생 나물이며 토종 작물들이 높은 가치로 격상됐다. 새로운 세대의 요리사들이 넓어진 시야로 요구하는 해외 식재료도 준혁이네 농장과 같이 요리사와 결합한 농부들이 국내 환경에 맞춰 재배한다.
트러플과 캐비아, 푸아그라, 거기에 좀 더 꼽아보자면 1++ 등급의 한우 안심, 그리고 큼직한 로브스터 정도? 비싸고 희귀한 식재료조차 이토록 흔해지자 해묵은 진미보다 낯선 생선이나 처음 보는 푸성귀 잎사귀 한 장이 더 별미로 느껴지기 마련. 짜장 라면에 휘휘 두른 트러플 오일보다는 앙큼한 산미를 내는 토끼풀(옥살리스)이 훨씬 맛깔스럽다.
파인 다이닝이 정착되어 생겨난 시장 안에서 경쟁하는 요리사들에게 남은 차별화 전략이란 기실 독특한 식재료, 아니면 더 맛있게 키운 식재료 외엔 없다고 할 수 있다. 지식과 기술, 그리고 창의성까지 요리사로서의 특성은 상향 평준화되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에서 한 끗 차이밖에는 없다. 레스토랑의 급을 결정하는 서비스나 인테리어, 기물 등도 대개 일정 레벨 이상. 투입한 자본과 인복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타날 뿐이다. 그러니 그날 밤 손님들의 눈길을 끌고 미각을 만족시킬 마지막 필살기는 결국 재료. ‘세계 3대 진미’니 하는 요란스러운 미사여구조차 라면 위에 올라앉은 신세이니 요리사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농부를 만나려고 텃밭을 드나들고, 팔도 산천을 떠돌며 희소한 식재료를 찾아다닐 수밖에. 모든 요리사가 맛의 기본인 재료에 회귀한 셈이다.
요리사가 재료에 대한 탐미에 빠지면 최종 완성형은 결국 자연으로 간다. 아침마다 개미를 잡고 해변의 이끼를 채취하는 채집 요리로 전 세계 푸드 트렌드를 바꿔놨던 덴마크 노마(Noma)나, 뉴욕 북부에 광활한 농장을 운영하며 모든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키우고 심지어 육종학자와 손잡고 자기만의 채소 품종을 만들기도 하는 미국의 블루힐(Blue Hill)이 그 종착지다.
청정 자연이 협소하고 부동산이 투기 대상인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채집 요리나 팜투테이블 레스토랑을 구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그리하여 합리적인 대안으로 요리사들은 마르쉐@에서 젊은 농부가 야생에서 채집해온 재료를 구하거나, 다품종 소량 생산 농부와 계약해 특정 재료를 공급받고 있다. 아예 소규모 농장과 독점 계약해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식재료를 사용하는 제로 콤플렉스나 모수의 예도 있다. 모수는 야생 재료를 구하기 위해 요리사들이 산을 타고 들판을 누비기도 한다. 인상적인 생선 요리에 사용하는 깨알 크기의 솔방울은 안성재 셰프가 요리사들과 함께 비밀스러운 숲속에서 솔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봄에 채집해두고 절여서 연중 사용하는 그만의 식재료다.
일부 독특한 재료가 갖는 존재감을 치트키 이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요리사도 분명 있다. 단지 특이하다는 이유에 함몰되어 요리의 완성도를 놓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샐러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루콜라만 사용하면 훌륭한 샐러드가 되기라도 하는 양 알맹이 없이 과대포장하는 대학가 식당처럼. 그러나 안심하라. 대부분의 파인 다이닝 요리사들은 지금 진지하게 열중하고 있다. 덕분에 이 땅의 잊힌 재료가 현재에 되돌아오고 없던 재료가 정착해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니, 이 아니 즐거운가.
WORDS 이해림(푸드라이터)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