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 최초로 5G 서비스가 개통된 나라다. 미디어는 분주하게 이 소식을 나르며, VR과 AR 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테크 산업에서 세계 최초에 목을 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계 최초로 5G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콘텐츠는 미비하다. 콘텐츠가 없으니 소비자가 5G를 써야 하는 당위가 없다. 개발자에게는 의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5G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보다 2시간 빨리 기회를 얻었으니까. 세계 최초라는 것이 정말 중요할까?
EDITOR 조진혁
한국은 짝수 버전
지난 4월 3일 오후 11시 한국에서는 세계 최초 5G 가입자가 탄생했다. 첫 가입자는 엑소의 백현과 카이, 김연아 선수, 이상혁 선수, 윤성혁 선수, 박재원 씨 등이다. 우연히(?) 유명한 사람들이 밤 11시에 가입한 것에서 인위적인 성격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미국의 버라이즌 통신사에 비해 2시간 먼저 5G 서비스가 시작됐다. 세계 최초를 자축하려던 버라이즌은 한국의 5G 기습 개통에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기도 했다.나는 비교적 회의론자에 가깝기 때문에 세계 최초 경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1세대 이동통신은 미국이 시작했고, 2세대 GSM 통신은 EU에서 먼저 시작했다.
한국은 2세대에 CDMA라는 독자 규격을 최초로 시작했지만 GSM보다는 늦었다. 3G는 기술적 갈라파고스 제도로 유명한 일본에서 최초 서비스를 시작했다. 4G는 와이브로, HSDPA, LTE라는 여러 단계를 걸쳤고 이후에도 LTE-A, LTE-U 같은 후속 서비스가 나오면서 세계 최초만 여러 나라다. 표준에 벗어났던 나라가 다음 표준에 올인해 빨리 시작한 경우(3G-일본)도 있고 서비스 단계나 방식이 세분화(4G)되어 세계 최초가 아무 의미 없는 경우도 있었다. 김연아 선수가 세계 최초로 5G를 이용했다는 것은 흥미롭지만 1년만 지나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2시간 먼저 시작한 것을 기록할 ‘기술의 명예의 전당’도 없다. 위키백과에 한 줄 정도 추가될 뿐이다. 기술의 세계는 스포츠가 아니다. 20세기에는 세계 최초가 의미 있었는지 모르지만 기술 혁신 속도가 빨라진 21세기에 세계 최초가 기술자에게는 의미 있을지 몰라도 소비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똑똑해진 소비자들은 ‘유료 베타테스터’가 되지 말자며 신기술을 경계하기도 한다.통신 역사에서 홀수 버전(1G, 3G)은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다. 정작 열매는 짝수 버전에서 맛보았다. 2G CDMA로 문자와 데이터의 시대가 열렸고 4G LTE로 영상의 시대가 열렸다. 5G 역시 과도기적 기술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지금 5G에 대한 청사진은 대부분 6G 시대에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삼성전자, LG전자라는 세계적 통신단말기 생산업체이자 가전회사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5G의 빠른 상용화가 이득이 될 수 있다. 특히 5G 상용화 덕에 빛을 볼 것으로 예상되는 IoT 기술이나 자율자동차 산업은 다른 나라보다 한 발 빠르게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간을 벌 가능성이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짝수 버전에 강했다. 2세대 CDMA를 가장 잘 활용한 나라고 4G LTE 역시 가장 발전한 나라다. 진정 기술적 신세계가 열릴 6G 시대를 조금 더 빨리 준비한다는 것 정도로 이번 5G 세계 최초의 의미를 정리하면 될 듯하다.
WORDS 김정철(IT 칼럼니스트)
누구를 위한 세계 최초였나
유난히 이동통신 업계는 ‘최초’에 예민하다. 이동통신 3사 사이에도 LTE 개통을 비롯해 VoLTE나 아이폰 개통까지 모든 과정에서 서로 최초를 다퉈왔다. IT 업계에서 ‘처음’의 의미는 곧 기술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이 복잡하고 고도화되면서 한 기업이 모든 기술을 결정할 수 없다. 5G 상용화도 따져보면 이동통신사의 노력뿐 아니라 전 세계 이동통신사와 협업하는 네트워크 장비 기업,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함께 만들어낸 성과다. 새로운 기술 도입에 투자를 서두르고 기술 개발에 함께해온 것은 높이 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세계 최초 5G 개시는 오로지 처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심지어 당일 정부가 이동통신사에게 미국보다 몇 시간이라도 빨리 개통을 하라고 요청하면서 원래 예정됐던 서비스 개시일을 조정했다. 밤에 기습적으로 서비스가 열리다 보니 일반인은 가입할 수도 없었다. 밤 11시에 미리 예정해두었던 연예인, 유명 인사들에게 단말기를 제공하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세계 최초 5G 서비스’가 시작됐다. 저녁 9시 이후 통신 개통이 불법이라는 논란이 이어지고, 일반인에게는 이틀이나 뒤에 개통이 이뤄진 것을 보면 최초 상용화라는 딱지는 썩 개운하지 않다.
최초 뒤에 숨은 부작용이 슬슬 터져나오는 중이다. 통신 3사는 새 네트워크 서비스를 위해 막대한 마케팅을 쏟아붓고 있다. 단말기도, 요금도 비싼 편이지만 열흘 만에 15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5G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가입자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서비스 품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만 5G로 접속되고, 5G에서 LTE로 넘어갈 때는 서비스가 끊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5G 스마트폰이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가상현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갤럭시 S10 5G 단말기의 차이 외에 사실상 LTE와 크게 다른 서비스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5G는 스마트폰의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쓰던 네트워크 인프라를 고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신망이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차량이나 원격 진료를 비롯한 새로운 서비스를 위한 밑바탕인 것이다. 스마트폰에도 쓸 수는 있지만 사실상 5G 시대에는 클라우드와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개개인이 갖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PC 등 기기의 성능 의존도는 낮아진다. 스마트폰 개통보다 산업계에서 5G를 이용한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이 더 시급한 상황이고, 통신사와 정부가 더 공을 들여야 할 일이기도 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세계 최초였나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결국 이용자들이 원하는 것은 처음,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나은 서비스다. 신통치 않은 초기 서비스 경험에 자칫 ‘5G가 별 볼 일 없더라’는 무용론이 먼저 자리 잡을 수도 있다. 1등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1등 서비스의 수식어는 ‘먼저’가 아니라 ‘좋은’이다.
WORDS 최호섭(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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