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Night
시작은 런던이었다. 유럽에서는 파리 밖에서 처음으로 펼쳐지는 에르메스 맨스 유니버스. 에르메스가 런더너들을 위해 단 하룻밤 동안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그래픽의 세계를 현실로 펼쳐낸 그 순간.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Veronique Nichanian)의 디렉션 하에 시내 외곽의 옛 우편물 사무소는 마치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동화처럼 환상적으로 변모했다.
‘Step into the Frame’이라는 황홀한 그래픽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하는 건물 안으로 한 발 쑥 들어가면, 네덜란드 출신의 만화가 요스트 스바르터(Joost Swarte)의 작품을 담고 있는 만화책들이 살아 움직이며 실감나는 인터랙티브 체험을 가능케 한다. 역시 세계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이면서도, 항상 불손한 정신과 재치를 기념하고 새로운 발견의 장을 마련해온 에르메스답다. 곧이어 자리에 착석하면 순수한 컬러의 에너지가 전문 모델, 그리고 런던의 유명 인사들과 넘실대는 2019 S/S 런웨이 쇼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아, 그러고 보니 기다란 벤치 한구석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누구? 요즘 런더너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렇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그 남자, 한국어로 ‘오이 형’이라고 명명되곤 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도 에르메스의 맹렬한 팬이다. 쇼 시작부터 끝까지 진지한 표정을 유지한 채 에르메스의 새 시즌 런웨이 쇼를 마음껏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쇼가 끝나면, 곧이어 터널로 들어가라는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첫걸음을 내딛으면 가장 먼저 ‘Silk Comics’ 코너가 관객을 맞는다. 최신 잡지 대신, 커스텀 스카프 패턴의 만화책들이 진열된 색다른 잡지 가판대. 가장 생동감 넘치는 코너는 ‘Hat Fishing a Guide’다. 마치 어부들이 고기를 낚으려는 것처럼 낚싯대에 걸린 모자를 써보라고 참석자들을 유혹한다. 모자를 착용하자마자 ‘수중’ 모습을 포착하려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에 깜짝 놀라게 된다. 가장 스케일이 큰 섹션은 ‘The Colours of the Cosmos’였다. 스크린 터치로 우주를 컨트롤하는 그 광범위한 느낌이라니.
에르메스 행사장에서는 준비한 것들을 모두 체험하는 것 자체가 곧 영감을 얻는 길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The Jukebox Hero’였다. 비밀 문 앞에 쭉 늘어선 줄에 합류해 20분 정도 기다리니 스르륵 문이 열린다. 천장에 매달린 디스코 볼, 바이닐 레코드처럼 생긴 댄스 플로어, 그리고 등을 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한 사내. 문이 다시 스르륵 닫히자 댄스 플로어가 회전을 시작하더니 360도 서라운드로 울리는 음악을 배경으로 사내가 디스코 댄스를 시작한다. 격렬하게, 또는 유연하게, 서툴지만 열정적으로 따라 하는 참가자들.
10개가 넘는 다채로운 콘셉트의 섹션들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덧 출출해질 시간. 곳곳에 설치된 푸드트럭들에서 먹는 가벼운 음식도 좋지만, 제대로 먹는 디너가 절실한 시간. 딱 30분만 식사가 가능한 ‘팝업 레스토랑 The Tasty Edition’에서 타이머를 집어 들고 후다닥 식사를 시작한다. 바로 옆옆 자리에 앉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또한 예외가 없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중간 경계선쯤에 위치한 것 같은 런던에서의 특별한 밤이 저물어간다.
Paris Morning
눈을 번쩍 뜨니 파리라니. 런던에서 보낸 밤의 짜릿함이 아직 그대로인데, 파리에서 보내는 낮은 또 색다르다. 장소는 무려 그랑 팔레(Grand Palais). 유리 돔 천장을 통해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실내로 들어서니 바닥은 온통 모래밭, 천장과 실내 곳곳에 승마를 위한 기나긴 바를 형상화한 총천연색 아트워크가 활짝 펼쳐져 있다. 아, 이곳이 과연 내가 알고 있던 그 그랑 팔레 맞는가?
매년 봄이면 열리는 국제승마연맹이 인증한 가장 높은 등급의 CSI 별 5개에 해당하는, 국제 장애물 점핑 대회인 ‘소 에르메스(Saut Herm es)’가 어느덧 올해로 10회째를 맞았다. 그랑 팔레의 위풍당당한 유리 천장 아래에서 세계 최고 기량의 기수 50명과 신예 기수 20명이 한자리에 모여 실력을 다툰 것이다. 이번 경기를 위해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코스 디자이너 산티아고 발레라 울라스트레스가 프랑스의 코스 디자이너 그레고리 보도와 소 에르메스의 스포츠 자문이자 기수인 미셀 로베르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10개의 경기 코스를 완벽하게 디자인해냈다. 정말 곳곳에 빈틈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짠 코스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랑 팔레의 유리 천장을 통해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3~4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르게 기수와 말들의 휘황찬란한 점프에 푹 빠져 있자니, 새삼 에르메스야말로 말의, 말에 의한, 말을 위한 브랜드임을 실감하게 된다. 에르메스는 파트너 기수들과 국제 승마 이벤트 전문 기획사인 GL 이벤츠, 그리고 그랑 팔레와 함께 10년간 쌓아온 풍요로운 히스토리에 이어, 승마 및 마술 스포츠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입증해내고 있었다. 에르메스 하우스의 ‘첫 번째 고객’이었던 말을 기념하기 위해, 에르메스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진행하는 유일한 대규모 행사. 총 1만6천 명에 달하는 관람객들을 위해 색다른 쇼와 승마를 테마로 한 다양한 액티비티, 다양한 볼거리들이 그랑 팔레 내에 넘쳐나고 있었다.
어느덧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잠깐 쉬는 시간일까, 모래밭 곳곳에 설치된 바와 펜스들을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치우고 있다. 갑자기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조명들에서 불이 툭툭 꺼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웅장한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더니 12필의 백마, 흑마들이 엄청난 에너지로 경기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바이올린 음색에 맞추어 빠르게 걷다가, 현악에 맞춰 더 말발굽을 울리기 시작한다. 기수 로렌조(Lorenzo)가 헝가리 스타일로 말 위에 기립한 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2필의 말들을 일사분란하게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지휘하고 있다. 거대한 그랑 팔레를 십자 형태로 가로지르는, 그저 ‘환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환상적인 순간들.
카미유 생상스, 모리스 라벨의 현란한 음악에 맞춰 경기장을 가로지르고, 놀라운 기술의 움직임을 연달아 선보이며 모두 함께 일사불란하게 펜스를 뛰어넘는다. 원을 그리다가, 구불구불하게, 그 뒤에 이어지는 2회 연속 점프까지. 마치 음악에 맞춘 집단 군무를 보는 느낌이다.
모든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에르메스의, 에르메스에 의한, 에르메스를 위한 ‘말의 축제’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지금, 파리 그랑 팔레는 그야말로 환상과 환희의 꿈속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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