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서동현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 연대기
1990년대 심은하, 고소영, 전도연으로 대표되는 트로이카 시대가 막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전도연이 독보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 캐스팅 0순위로 불렸던 전도연은 어떤 캐릭터도 물불 가리지 않고 소화할 수 있는 스펀지 같은 배우였다. 그녀는 <밀양>(2007)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의 정점을 찍었으나 <카운트다운>(2011)부터 깊은 수렁에 빠지면서 2010년대에는 배우로서 흥행력을 상실했다. 2000년대에 전도연이 감독들의 욕망을 충실하게 채워주는 팔색조 배우였다면, 한국 장르 영화의 대중적 성공을 묵묵히 이끌었던 여배우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은 하지원이었다. 호러 퀸으로 시작한 그녀는 섹스 코미디 <색즉시공>(2002), 한국형 블록버스터 <해운대>(2009) 등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2010년대 한국 영화는 제작비가 급상승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도둑들>(2012) 같은 멀티 캐스팅 영화의 붐이 일었다. 눈부신 카리스마로 김혜수와 전지현이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여자 배우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영화 투자가 전적으로 남자 배우 위주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들을 위한 시나리오 개발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엄정화가 연기했던 ‘위기에 처한 여인’에 관한 소소한 스릴러도 곧 중년 남성 배우의 차지가 되었다. 더욱이 많은 제작비로 여성 주연의 원톱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 됐다. 지금 원톱이 가능한 여배우로는 40대 후반의 김혜수를 빼놓을 수 없다. <모던 보이>(2008)의 참패로 수모를 겪은 그녀가 진짜 배우임을 입증한 것은 <이층의 악당>(2010)부터다. 규모는 작지만 <차이나타운>(2014), <굿바이 싱글>(2016)은 그녀가 아니면 감히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급변하는 영화판에서 멜로라는 영원불멸의 틈새시장을 적확하게 공략한 것은 의외로 손예진이었다. <클래식>(2002)으로 로맨스 퀸을 차지한 후 <오싹한 연애>(2011),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7)까지 이어지면서 계속 생존했다. 반면 다시 곱씹어도 안타까운 배우는 장진영과 김민희다. <청연>(2005)으로 꺾인 날개 때문에 고난과 슬픔의 시간을 보냈던 장진영은 <싱글즈>(2003)의 나난을 우리에게 선물한 후 너무 일찍 떠났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아가씨>(2016)로 연기에 눈을 뜬 김민희는 관객과 통하자마자 스캔들로 사실상 대중 영화에선 사형 선고를 받았다(이 땅에서 김민희가 오직 사랑을 좇았던 잉그리드 버그먼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 공효진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쓰 홍당무>(2008)부터 독특한 캐릭터를 꽤 연기했다. 여전히 수컷들의 세계에서 개성 만점의 모습을 보여줄 배우라는 점은 변함없다. 그리고 앞으로 미래를 기대할 만한 배우는 <리틀 포레스트>(2018)로 20대 여성을 대변한 김태리 정도다. 해마다 신인들이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선보이기는 하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여자 배우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무게를 감당하면서 영화계에 한 획을 긋는 것은 선택받은 일이 분명하다.
WORDS 전종혁(영화 저널리스트)
반가운 여성 캐릭터들
우선 여성 경찰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해다. <뺑반>은 강압 수사의 오명을 쓰고 뺑소니 전담반, 즉 ‘뺑반’으로 좌천된 경위 시연(공효진)의 활약상을 담는다. 시연이 따르는 경찰 상사 윤과장(염정아), 뺑반의 팀원이자 경찰대 수석 출신 우 계장(전혜진)까지 조직 내 유능한 인물들을 여성 캐릭터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게 왜 흥미롭냐고? 지금까지 당연하다는 듯 남자 경찰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얼마나 형편없이 그려졌는지 사례를 꼽으라면 차고 넘친다. 마찬가지 이유로 <걸캅스>도 기대를 모은다. 제목부터 ‘투캅스’의 여성 버전을 표방한 것이 분명한 이 영화는, 전설적 에이스였지만 결혼 후 민원실 내근직으로 발령 난 미영(라미란)과 초보 형사 지혜(이성경)의 의기투합을 다룬 코믹 수사극이다.
불안정한 사회에 내던져진 채 버티듯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정유미와 공유의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던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 입문서’가 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어느 날 친정 엄마와 언니 등으로 빙의하기 시작한 김지영(정유미)이 그려낼 여성 차별과 불평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한편 <버티고>는 멜로지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30대 여성 서영(천우희)의 내면을 따라 짚는 작품이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도 여성 캐릭터는 두드러진다.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 무려 14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알린 이영애의 <나를 찾아줘>가 대표적이다. 그가 연기하는 정연은 6년 전 실종된 아들과 생김새가 똑같다는 아이를 찾아 낯선 마을로 가는 인물이다. 이곳에서 정연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에 휘말린다. <콜>은 2019년과 1999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에 살고 있지만 전화로 연결되는 두 여자 서연과 영숙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박신혜와 <버닝>(2018)의 신데렐라 전종서가 각각 서연과 영숙을 연기한다. 김성령과 이엘이 연기하는, 두 주인공의 어머니 캐릭터들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을 것으로 알려졌다. 돈 가방을 두고 얽히고설키는 인물 군상을 그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연희(전도연)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바라본다. 극 중 그는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되지만 그 뒤에 더 많은 이야기를 숨긴,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여성 서사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다뤄지는 노년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중심에 놓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소공녀>(가제)는 부산 달동네에 사는 할머니 말순(나문희) 앞에 어느 날 존재를 들어보지도 못한 손녀 공주(김수안)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유쾌한 ‘가족 스캔들’을 다룰 예정. <우리들>(2015)로 관객과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윤가은 감독의 신작 <우리집>도 기대를 모은다. 이 영화에는 가족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해체될 위기의 가족을 봉합하고자 나름 모험을 감행한다. 자신들만의 모험에 나서는 성장 영화의 주체가 소년이 아닌 ‘여자아이들’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반갑다.
WORDS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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