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을 뜨겁게 달군 영화는 <레토>였다. 러시아의 음악 영웅 ‘빅토르 최’가 불멸의 록스타가 되기 전, 레닌그라운드에서 담배와 맥주만으로 살며 사랑과 인생을 노래하던 그 시절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품을 들고 칸 해변에 등장한 이는 낯선 얼굴의 한국 배우 유태오였다.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20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빅토르 최’ 역할을 맡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혁명에 동참했다. 사실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 자체가 ‘로큰롤’이었기 때문에 감히 ‘혁명’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키릴 감독은 정치적인 이유로 5회 차 촬영을 남긴 상태에서 가택 구금됐다. 제작사 대표가 감독의 변호인과 전화 통화를 해가며 소통했고, 배우와 스태프들은 로큰롤 정신으로 남은 촬영분을 채웠다. 그래서 유태오는 레드 카펫에서 감독 이름을 새긴 팻말과 얼굴을 새긴 배지로 감독의 존재를 알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기막힌 에피소드들을 유태오는 ‘로맨티시즘의 극치’라고 표현했다. 창작의 자유를 부르짖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빅토르 최의 청춘 시절을 만난 것도, 유태오가 <레토>에 참여한 것도, 모두 낭만적인 사건이다. 덕분에 우리는 유태오라는 배우를 알게 됐고, 2019년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갈 수 있게 됐다. 이 또한 참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다.
<레토>는 엄밀히 말해 빅토르 최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한 청춘의 감성과 고민을 다룬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굳이 빅토르 최가 아니어도 괜찮았을 거다. 굳이 실존했던 인물을 끌어들여 연기하는 게 더 어렵진 않았나? 그보다 왜 빅토르 최인가?
일단 키릴 감독은 창작의 자유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안에서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어 한다. 빅토르 최라는 아이콘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좋았다. 2년쯤 전에 나타샤 나우멘코가 남편이자 록 뮤지션 마이크, 빅토르 최와의 삼각관계에 대한 책을 낸 거다. 그건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빅토르 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된 거다.
담배 피우고 맥주 마시면서 음악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그게 영화 속에서는 청춘의 이미지 같더라고. 유태오라는 사람은 청춘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늘 청춘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16세 때부터였나, 청춘을 싫어했다. 그러니까 좀 더 빨리 성숙해지고 싶었다. 10대 때는 20대를, 20대 땐 30대를 동경했다. 30대인 지금은 어서 40대가 되고 싶다.
모든 매체가 청춘을 낭만적으로 표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 터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던진 질문이었다.
의외로,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본다. 그래서 이런 대답을 할 기회가 없었다. 더 빨리 발전하고 싶어서 젊고 서툰 것이 싫었다. 왠지 시간이 아깝고 급했거든. 독일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내내 농구를 했는데, 그만두고 연기를 시작했다. 왜 농구가 아니라 연기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죽고 나면 먼지가 되어버릴 텐데, 그럼 1백 년 뒤에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내 존재에 대한 근거를 남기고 싶어 유전적으로 번식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후손을 남기지 않을 거라면, 뭘 남길 수 있을까? 인류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를, 연기라는 직업을 그렇게 해서 떠올렸다. 내 자신의 예술적인 근거를 남기고 싶었다. 그게 제일 가치 높은 거라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나는 노스탤지어와 청춘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뜨거운 박수를 받은 것도. 로맨티시즘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담겨 있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오디션을 굉장히 많이 봤을 거 같다. <레토> 오디션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
아주 전형적인 단계를 거쳐 캐스팅됐다. 처음에 내 프로필 사진을 보냈고, 영상을 보고 싶다고 해서 셀프 테이프 영상을 보냈다. 그리고 직접 오디션을 보고 싶다며 러시아행 비행기 표를 보내줬다. 모스크바에서 딱 24시간 체류하고 다시 돌아왔다.
오디션을 보면 감이라는 게 오지 않나?
4시간 정도 오디션을 보고, 키릴 감독이 운영하는 극단도 구경했다. PD님이 공항에 바래다주며 이런 말을 하더라. “아까 러시아 말로 해서 못 알아들었을 텐데 아마 태오 네가 캐스팅될 것 같아”라고. 하지만 워낙 많은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두고 보면 알겠지’라고 생각했다. 열흘 뒤에 이메일로 합격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칸 영화제 초청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엄청 기뻤지?
물론. 나에게 아주 큰 경험이었고 인생에 많은 변화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내내 항상 생각지도 못하게 강한 현실과 부딪쳤다. 키릴 감독이 빅토르 최라는 소재를 만난 것도, 내가 빅토르 최처럼 유러피언 코리안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촬영이 다 끝나기 전에 감독이 가택 구금된 것도, 남은 우리끼리 끈끈해져서 영화를 완성한 것도, 그리고 이 영화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뜨거운 박수를 받은 것도. 로맨티시즘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이 안에 담겨 있다. 하나하나 다 신기하다.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드라마 <배가본드> <아스달 연대기> 그리고 영화 <버티고>와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까지. 2019년에 엄청 바빠졌다.
바쁜 게 적응이 잘 안 된다. 항상 불안하다. 한가해도 불안하고 바빠도 불안하다.
그 불안한 감정의 실체는 뭔가?
내 욕심과 꿈을 가치 있게 남기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다. 내가 존경하는 배우인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구나 다 배우를 할 수 있다. 단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된다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천재적인 연기자로 남고 싶다면 매일매일 자신을 괴롭혀라.” 굉장히 공감한다. 안전한 시스템에서 나와 계속 모험하고 도전하면서 나만의 만족과 행복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거다.
그럼 불안 역시 멈출 수 없겠네?
그렇다. 죽는 그날까지 아마 계속 불안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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