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io___ra
얼음을 물들인 것 같은 색감의 오브제들. 모두 ‘핸드다이드’ 방식으로 염색한 아크릴이다. 공예를 전공한 윤라희는 지금 일반적인 공예의 경계 너머에 있는 재료로 오브제를 만든다. 재료를 통해 분위기의 확장성을 표현하고 싶어 독립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한 그의 시작은 언제나 재료다.
지난 2018 공예 트렌드 페어에서 아크릴로 만든 인상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SNS에 올라온 페어 후기에는 윤라희의 아크릴 피스가 꼭 들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공예 페어’에서 그러한 작업을 볼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도자도 아니고 설치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고 화병도 아닌 것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는 것에 호기심을 갖는 것 같다. 다른 작가들은 작업물을 많이 판매하는 식이었는데, 나는 조금 달랐다. 인테리어 업계 종사자들이 내 작업에 영감을 받고 접촉해와서 몇 개의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열려 있는 상태의 작업이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만드는 오브제에 명확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어떠한 물건이 되기’가 목적이 아닌 작업을 하겠다는 방향을 설정했나?
맞다. 그리고 그런 오브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나타나는 힘도 보여주고 싶었다. 개인 작업은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사실 스튜디오를 열던 시점 이전에는 쓸모없지만 갖고 싶은, 사고 싶은 오브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 이렇게까지는.
지금은 어떤가?
기능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버려질 수 있는 물건에도 호기심을 갖고, 사기도, 팔기도 한다. 다른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이기 때문에 나의 작업을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분야의 다양성이나 유동성,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크릴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아크릴을 다룬 지 오래되어서다. 독립 디자이너로 스튜디오를 열고 내 작업을 하기 전에는 디스플레이 디자인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그때 가장 많이 쓴 재료가 아크릴이었다. 모든 게 아크릴에서 시작됐다. 아크릴을 조금 다르게,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고민이 지금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아크릴이라는 재료에서 도출하고 싶은 것이 있었나?
재료를 변형해 완전히 다른 성질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재료를 파괴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아하는 색깔과 좋아하는 마감을 연구하고 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재료가 가장 순수하게 보이는 상태를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의 작업으로 발전했다.
입체의 아크릴에 색을 입힌다. 직접 손으로 칠하기에 ‘핸드다이드’ 기법이라 부르던데.
사대문 안에 공장이 3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중 한 곳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맡겨 염색하고 있다. 원래는 동대문에 납품하는 단추 등을 만드는 기술자들이다. 공예를 전공했기에 내 손으로 100% 완성하는 작업도 좋아하지만, 처음에는 산업적인 재료로 다양한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손으로 하는 작업을 아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상업 공간 작업이나 협업 등에 관심이 있는데 이때 필요한 제작 방식은 대부분 소규모 공방들이 해결해준다. 공방과 함께 일하면서 서로 몰랐던 새로운 방향을 찾기도 한다. 작년 중순부터 석고 재료를 새롭게 탐구하고 있다. 올해 중순쯤부터 선보일 예정이다.
아크릴 작업에 영감이 되어온 것들이 있나?
재료 자체와 이미지. 그리고 오브제들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내가 모으고 있는 다양한 재료로 만든 작은 오브제들. 지금 이 작업실에도 일본의 유리 스튜디오 ‘바쿠 글라스’나 교토의 무명 금속 작가의 작품이 있는데, 그런 물건들을 관찰하고 그 위에 색채나 텍스처 실험을 해보기도 한다.
아크릴과 석고의 공통점이라면 역시 상업적인 재료라는 점이겠지?
공예의 범주 안에 든다고 볼 수 있는, 공예과에서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이 금속, 염직, 도자, 나무, 옻칠 등이다. 아크릴과 석고는 그 범주 밖에 있는 재료다. 보통 공예의 재료로 인지하지 않는.
산업적인 재료를 선택한 이유는 더욱 자유로운 실험을 하기 위해서인가?
계속해서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해보고 싶다. 그러기에는 일반적인 공예의 범주 바깥에 있는 재료들을 소재로 삼는 것이 더 자유롭다. 석고 작업은 매트한 질감을 좋아해서 시작했다.
공예를 전공했지만 기존 공예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공예를 공부할 당시 공예 작품은 언제나 전시장 안에 있었다. 사회에 나가선 공예가들이 서로 작품을 사고파는 시스템도 있더라. 그런 흐름이 답답해 학부 때 디자인을 부전공했다.
기존의 공예가 사회적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느꼈나?
그 당시 공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예술품’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기능이 없는, 조각도 아닌, 회화도 아닌 중도의 것이었다. 공예과를 졸업할 때, 공예로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많은 공예가들이 다양한 협업을 하며 새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공예는 외딴 섬에 있었고 쓰임새도 명확하지 않았다.
지난 2년간 다양한 브랜드, 편집숍, 작가들과 협업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다. 협업할 때 윤라희의 작업에 요구하는 것들은 무엇이던가?
협업을 할 때마다 미션처럼 주어지는 숙제들이 있는데, 탐구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풀어낼 것들이 수반된다. 최근 오르에르의 포인트 오브 뷰와 협업을 했다. 오르에르 대표가 80쪽 분량의 PPT를 보내왔다. 포인트 오브 뷰의 콘셉트, 영감받은 이미지, 회화 작품들까지. 명확한 디렉션을 받기보다, 80쪽의 자료 안에서 영감을 받아 자유롭게 풀어냈다.
직접 만들기도 하고 재료를 탐구하여 물건을 만드는 디자이너이기도 한 입장에서 지금의 공예 혹은 장인 정신을 무엇이라 정의하고 싶은가?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는 만드는 물건에 자신을 충분히 투입하는 일 역시 장인 정신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물건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대체 불가능한 그런 힘을 갖고자 한다면 수작업이라는 수단이 강력한 역할을 할 것이다.
아크릴과 석고 이후에는 어떤 재료들을 탐구하고 싶은가?
계획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나이에 내가 더 잘 다룰 수 있는 재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이 들면 오히려 공예의 범주 안에 있는 재료들을 다루고 싶다. 그땐 더욱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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