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역과 배우의 궁합이란 게, 작품을 보기 전부터 무릎을 탁 치게 될 때가 있다. <봄이오나 봄>의 이봄 역과 엄지원이 그렇다. 시청률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본다면 엄지원의 인생 캐릭터가 될 것도 같다.
매력적이었다. 이봄은 왕년에 잘나간 톱스타였는데 국회의원의 아내가 되어 평범한 삶을 사는, 곱고 예쁘고 착한 여자다. 그런데 천재 과학자가 실험용으로 만든 약을 잘못 먹고 누군가와 몸이 바뀐다. 욕심 많고 와일드하고 결핍이 있는 여자 김보미와. ‘보디 체인지’가 되어 1인 2역을 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이봄 역으로 캐스팅되었지만, 이유리가 맡은 김보미도 연기할 수 있으니까.
벌써부터 2019년 MBC 베스트 커플상은 엄지원과 이유리가 받을 거라는 말도 나온다. 예고편에서 이미 두 배우의 호흡이 엄청나더라. 단지 배역만 바꾸는 게 아니라, 서로의 연기 스타일도 분석해야겠다.
확실히 그랬다. 둘 다 1인 2역을 해야 하니까. 보디 체인지가 되고 나면 이유리는 엄지원의 연기를, 나는 이유리의 연기를 해야 했다. “그 장면에서 내가 새끼손가락을 이렇게 올렸어” “이 장면에선 이런 디테일에 집중했는데, 이걸 연결해보면 어떨까?” 각자 배역을 연기하면서 했던 작은 요소까지 분석해 소통하고 있다. 이유리의 연기는 이전까지 방송을 통해서만 봤다. 표현이 크고, 나와는 스타일과 지향점이 달라 보였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에너지가 다른 두 캐릭터, 두 배우가 붙어 기이한 게 나올 것 같았거든.
엄지원의 과하고, 넘치는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네.
이 작품에 끌린 이유였다. 과하게 표현할 만한 캐릭터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 <봄이오나 봄>은 확실히 편하고 흥미로운 기회다. 한 작품에서 내가 잘할 수 있고, 못해봤던, 대립되는 두 연기를 모두 할 수 있으니까.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연기가 좀 늘지 않을까?
엄지원에게는 여전히 여리고 청순하고 풋풋한 얼굴이 있다. 그 이미지를 지금껏 잘 다뤄온 것 같다. 뛰어넘어보기도 하고, 부딪혀보기도 하고, <봄이오나 봄>의 이봄 역할처럼 잘 활용하기도 하고.
처음 연기를 할 땐 잘 몰라서 계속 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우니까, 당연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내가 아닌 다른 면모를 뽑아내야 한다고.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결국 다 내 안에서 꺼내 쓰는 것 같다. 사람은 다면적이지 않나.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조합하고 섞어서 쓰느냐, 그런 생각을 한다. 게다가 솔직히 지금까지 나는 배역을 처음 만날 때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너무 어려운데’라는 생각부터 한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엄지원에게 반한 건 <싸인>에서다. 그런데 <똥개>나 <스카우트>에서 연기한 캐릭터야말로 엄지원이라는 배우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낸 역할이다. 재미있고 발랄한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엄지원에게서 볼 수 있는 고유한 에너지가 있다.
사실은 코미디가 잘 맞는 것 같다. 올해 2월에 개봉 예정인 영화 <기묘한 가족>도 코미디다. ‘이제 코미디물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난 작품이다.
한동안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해왔다. <소원>이나 <미씽:사라진 여자>(이하 <미씽>), <무자식 상팔자>까지.
영화 자체로도 훌륭하면서,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배우와 사람으로서 한 목소리를 내보고 싶었거든. 원래 장르물도 무척 좋아한다. <싸인> <미씽> <더 폰> 같은.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게, 내가 잘하는 것을 하고 싶다고 슬슬 느낄 때 <기묘한 가족>이 왔다. <봄이오나 봄>보다 촬영은 먼저 했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걸 했을 때라고 크게 반응이 좋지는 않았다. 하하. <기묘한 가족>은 특이한 코미디다. B급 정서가 많다. 그런 코미디를 좋아한다.
"한번 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그런 연기. 아직 내 연기에 스스로 만족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작품 다시 보는 것도 싫어한다."
언젠가 “대중은 나를 몰라도 나는 나를 잘 안다”고 말했다. 나를 잘 몰라서 허비하게 되는, 소모적인 시간은 많지 않았겠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거지 정답을 아는 건 아니다. 나는 나를 잘 아니까 초창기부터 <주홍글씨>나 <가을로>처럼 내가 잘하지 못할 작품들에 달려들었다. 내가 잘하는 거, 나랑 잘 맞는 건 언제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못하는 쪽에 뛰어들어 트레이닝하면 후에 내가 빛날 작품에서는 날아다닐 거라고. 내가 잘할 수 있지만 보여주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는 러브콜이 없는 거다. 기회가 안 생겼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걸 많이 보여주는 것이 더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물론 나에게 어려운 작품과 배역을 일부러 선택하면서 많이 성장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열정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해온 동력이 아니었을까?
동력은 맞는데, 힘들었다. 못하는 건데 잘하려고 하니까. 지금은 어떤가 하면, 연기에 관해 예전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전에는 ‘어떻게 하면 그 인물이 되어서 그 안에서 온전히 연기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지금은 내가 작품을 먼저 접하고 배역을 이해하면서 느낀 마음을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공감하고 싶다. 내가 느낀 걸 누군가에게 똑같이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선이 바뀌었다.
요즘 접하는 시나리오나 제안 중에서 그닥 보고 싶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있나?
아마 있을 거다. 그런데 회사가 시나리오를 솎아내고 나에게 전해주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직접 접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시장 구조 안에서 불평등은 여전히 있겠지. 그래도 지금은 개선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주체가 된 이야기도 재미있으면 많은 사람이 볼 거라고 믿는다.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 것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다. <봄이오나 봄>도 ‘보디 체인지’가 어떤 면에서는 뻔한 구성일 수 있지만, 여성 캐릭터 2명이 주체적으로 코믹한 극을 끌어간다는 점이 좋았고 <미씽>도 비슷한 맥락에서 도전했다. 다양성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개선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를, 배우 입장에서 고민하고 있다. 사실 촬영 과정만 놓고 생각하면 곧 개봉할 <기묘한 가족>이나 <마스터>가 행복하고 즐거웠다. 배우들이 n분의 1로 짐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 내가 작품에 잘 묻어갈 수 있었으니까. 과정을 즐기고 그 과정 속에 있으면 되는 작품들이니까.
특별히 좋아한다고 언급한 배우들의 리스트를 보면 그러한 엄지원의 지향점이 보인다. 이자벨 위페르나 메릴 스트립, 케이트 블란쳇, 이미숙 같은 배우들을 말했다. 시장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업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내야겠다는 고민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나?
배우는 본연의 일에 충실할 때 가장 아름답다. 그 선을 넘어서고 싶지는 않다. 여성 배우의 역할도 연기를 통해서 해내고 싶다. 내가 가진 생각, 의식, 풀어낼 수 있는 지점을 조금씩 넓히면서. 지금은 분명 10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 당시 시장 상황만 봐도 30~50대 여배우는 극에서 주인공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선배님들이 열심히 활동해주셔서 이제는 나도 주연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책임 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언희 감독에 따르면 <미씽>은 제작이 성사되기까지 힘든 여정을 거쳤다더라. 남자 배우가 주연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런데 엄지원과 공효진이 주연 배우로 확정되면서 일이 풀렸다. 엄지원 역시 시장에 그러한 토대를 만들고 있는 여성 배우다.
분발하겠다. 이언희 감독님과는 다음 작품 함께 준비하고 있다.
혹시 남자 캐릭터를 탐내본 적도 있나?
내가 받은 시나리오 중에는 없는데, 그런 이야기는 종종 한다. ‘그 캐릭터는 여자로 바꿔서 나 주면 안 되나?’ 영화계에서는 남자 2인, 3인, 4인으로 구성된 브로맨스가 워낙 장르화되어 있지 않나. 그런 거 보면 ‘왜 남자만 있어야 해? 한 명 정도 여자 넣으면 안 되나?’ 하는 거다.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없었나?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면 늘 긴장하고 설렐 수는 없지 않나. 습관처럼 하게 되는 순간도 생기고.
아직은 없다. 절대 없었다. 습관처럼 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다. 언제 연기를 잘했던 것 같냐, 지금껏 잘해온 것 같냐 물어보면 자신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한다.
요즘 관심 있는 것과 관심 없는 건 뭔가?
관심 있는 건, 대기의 질과 지구 환경. 이 속도로 환경을 망가뜨리면서 살게끔 내버려두어도 괜찮은가? 강력한 제재가 필요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 나는 날씨가 좋을 때 가장 행복하거든. 좋은 날씨라는 건 대가 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선물인데, 결국 자연환경과 직결된다. 지구 환경과 관련해서는 직접적으로 운동을 벌여볼 마음도 있다. 그리고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는 건… 허상. 나의 본질과는 관계 없는 것.
어떤 허상?
배우 엄지원에게는 보이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다. 본연의 나와 1:1로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내보이고 있으니까, 그로부터 생겨나는 많은 부분이 대개 허상이다. 허상에 관심을 두게 되면, 반응이 없을 땐 내가 작아지고 반응이 크면 나도 어깨가 솟는다. 내 자아가 허상에 좌우되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잘 되지는 않지만.
업계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이야기꾼이 있나? 이 사람이 만든 판에서는 한 번 놀아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사람.
김원석 감독님. <나의 아저씨>를 정말 재미있게 봐서 꼭 만나보고 싶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분이다. 사람 사는 모양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무엇인가에 관해 짙은 농도로 펼치고 그렇게 누군가의 감정을 토닥이더라. 내가 배우로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게 그런 거다. ‘잘 살고 있어요? 나도 그렇게 살아요. 나도 그래요. 이런 내가 여기에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듯한 연기를 하고 싶거든.
최종 목표를 ‘괴물 같은 연기’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맞다. 그런 연기 한번 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그런 연기. 아직 내 연기에 스스로 만족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작품 다시 보는 것도 싫어한다. 못한다. 고통스러워서. 요즘 들어서는, 그래도 내가 지난 작품에서 한 걸 제대로 대면하면서 작업했으면 어땠을까 싶지.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마주했다면 조금 더 빨리 성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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