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일이어야만 좋은 걸까? 우연히 하게 된 일이어도 괜찮지 않나? 몇 세 때부터 하고 싶어 했는지가 좋고 나쁨의 척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의식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동윤 이야길 꺼내면 지금도 ‘편의점에서 강도 잡았던 그 대학생?’이라고들 말한다.
데뷔 이후에 수백 번은 들었다.
배우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히 어떤 생각이 들었나?
뉴스를 보고, 지금 속한 소속사에서 SNS로 연락을 해왔다. 솔직히, 기회다 싶었다. 배우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거든. 특별한 사람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안을 받으니 해보고 싶더라. 당시 취업 준비생이었다. 해보고 아니면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 계획이었다.
두렵진 않았나?
궁금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새로운 거 좋아한다. 결단력도 있고.
배우가 된 과정이 선입견을 만든 것 같지 않나?
뿌리가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었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쟤는 우연찮게 배우가 됐지, 원래 하고 싶던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어야만 좋은 걸까? 우연히 하게 된 일이어도 괜찮지 않나? 몇 세 때부터 하고 싶어 했는지가 좋고 나쁨의 척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의식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라는 일이 본인의 정체성과 잘 맞나?
원래 성격과는 잘 맞는다. 중간에 잠시 나 자신을 잃었는데… 원래의 나는 자존심이 무척 세다. 자존감도 높다. 새로운 것을 다양하게 해보기를 좋아한다. 배우라는 직업과 잘 맞는 성격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면 시행착오를 겪지 않나. 잘 몰랐던 세계라,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이건 대중 예술이잖아. 보는 사람들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 일의 그런 특성 때문에 나의 정체성이 흐려지던 때가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이 안 나고, 본래 성격이 어땠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많이 회복했다. 적응했거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렇다. 배우는 자신을 사랑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인 것 같다. 둘러보면 이 일을 하다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사람이 많더라. 나를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중심을 잡기 힘들어진다. 그건 건강하지 않은 거다. 물론 신경은 쓴다. 그래서 외모 관리도 하고 다이어트도 한다.
다이어트를 특히 힘들어하던데?
하하. 먹는 걸 워낙 좋아하거든. 이제는 도가 텄다. 살 빼야 할 상황이면 쭉쭉 잘 뺀다.
이제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구나 하는 느낌이 드나?
최근에 확신이 섰다. 계기가 따로 있진 않았는데, 적응하다 보니 좋아졌다. 자존감이 높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중학교 때는 공부를 안 하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거든. 고등학교가 치맛바람 센 동네에 있었다. 대구 수성구의 경신고등학교. 그 동네가 서울로 치면 대치동 같은 곳이다. 공부를 못하니까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더라고.
자존심 좀 상했겠다.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반에서 1등 하는 친구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해보니 나보다 잘하던 친구들보다 내 성적이 잘 나오기도 하더라. 할 맛이 나더라고. 그때는 공부라는 게 새로운 세계였다. 지금 겪고 있는 배우의 세계처럼.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내 성향을 만들었을 거다. 배우 일도 적응하면서 배워나가다 보니 좀 알겠고, 확신도 선다. 나는 타고난 것보다 노력을 신뢰하는 편이다.
<뷰티풀 데이즈>로 첫 영화 필모그래피를 쌓게 됐다. 젠첸 역을 하기 위해 미리 연변 말투를 준비해갔다고?
이유준 배우, 오광록 선배님과 함께 조선족 사투리 수업을 들었는데, 수업 전에 미리 혼자 연습을 했다. 언어적인 부분이 가장 걱정됐거든. 말부터 자연스러워야 뭐든 연기할 수 있을 테니까. 유리했던 것이, 조선족 사투리가 경상도 사투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더라고. 분명히 있다.(웃음) 유준이 형도 부산 사람인데 둘 다 그런 걸 느꼈다.
젠첸은 자신과 공통점을 찾기에 힘든 캐릭터였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서. 예전에는 어떤 캐릭터에 내 모습을 일부 섞어서 연기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나라는 사람이 딱히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젠첸은 나를 완전히 지우고 했다. 쓰는 말부터 다르니까 가능하더라.
모성과 가족에 관한 영화다. 윤재호 감독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다. 젠첸은 모성이 향하는 대상인,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다. 연기하며 느낀 정서나 감정이 궁금하다. 게다가 배우 이나영이 엄마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실제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두 사람이 모자 관계로 나온다는 사실이 꽤 파격적이지. 그래서 궁금했다. 어떻게 만들어질지. 촬영 때 이나영 선배님에게 감정적으로 받은 게 정말 많다. 나는 거기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면 됐다. 감독님은 대체로 지켜봐주셨다. 저 사람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연기 스타일이 어떤지.
감독의 개입이 많지 않은 현장이었나?
윤재호 감독님은 거의 개입을 안 하시는 편이다. 대신 편집에서 좋은 걸 뽑아내려고 하신 것 같다. 영화를 보면, 롱 테이크가 굉장히 많다.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장면들도 많고. 기숙사 침대에서 찍은 신이 있는데, 그때 카메라가 코앞에 있었다. 얼굴과의 거리가 20cm에 불과했다. 나는 그 방식이 좋았다. 집중하기에 편했다.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반면 촬영 기간은 무척 짧았다고? 여러 컷 찍어도 제대로 모니터링할 시간조차 없었다던데. 배우로서 나름 자구책이 필요했을 것 같다.
기간으로는 한 달 조금 넘게, 회차로는 15회 차. 장편 영화를 15회 차에 찍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육체적으로는 지치지 않았다. 체력이라면 워낙 자신 있으니까. 다만 젠첸에게는 감정적으로 무난한 신이 전혀 없었다. 아빠에게 왜 나를 한국에 보내려고 하냐, 엄마는 왜 찾느냐 따지고, 한국에서 엄마를 만나고, 엄마 애인을 만나고, 엄마가 술 취한 모습을 보고, 엄마가 쓴 편지를 읽는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감정적으로 가장 휩쓸리게 되는 인물인 것 같다.
맞다.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관객이 젠첸의 감정과 시선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고. 적은 회차에, 극의 시간적 순서와 다르게 촬영하면서 감정적으로 표현할 게 많아서 힘들었다. 나는 차라리 즉흥성에 기대는 방법을 취했다. 어떤 감정을 정해놓지 않고, 상황에 집중하려고 했다. 감정을 계획해서 잘 보여주는 선배님들도 많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는 안 되고.
<뷰티풀 데이즈>가 말하는 것들 중에 어떤 부분이 가장 값지다고 생각하나?
희망을 던진다는 거. 해체된 가족, 비극적인 상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이들에게도 어떻게든 희망이 생기고 아름다운 날들이 올 수 있음을 보여주거든. 아프고 상처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가족이 있잖아. 경계에 선 사람들이 주인공이지만 아주 보편적인 감정을 담았다. 가족 이야기니까.
취미로 시를 쓴다고? 다른 인터뷰에서 이미 몇 번 밝혔지만, 그래도 궁금한 게 많다. 어떤 때에 주로 썼나?
초등학생 때부터 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가장 활발하게 쓴 건 고등학교 때다. 교육청이 지원하는 문예창작 영재교육원에서 시 부문 수업을 듣기도 했다. 시는 뭐랄까. 숙명처럼 주어지는 것 같다. 어느 초등학생이 취미로 시를 쓰겠나.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 하지.
주로 쓰는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상처와 아픔이 있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생계 유지하느라 허덕이는 사람들에 관해서 썼다. 인터넷 검색해보면 내 시가 몇 편 나오는데, 다 그런 시들이다.
그런 삶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나?
감정적으로 슬프고 불쌍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현실을 그대로 그린다. 담담하게. 내가 시를 읽을 때, 그런 식으로 써내려간 언어를 좋아하거든.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라는 시처럼. 또 음… 내가 시 쓰는 건 좋아하는데, 시를 많이 읽진 않는다. 하하. 외울 수 있는 시가 한 편도 없다. 내 것도 못 외운다. 내 시는 3페이지씩 되기도 하거든.
엄청나게 긴 호흡이네.
일단 문장 호흡이 길다. 지금 말할 때도 그렇지 않나? 장황하지? 하하. 잘하면 될 줄 알고 신춘문예에 많이 냈는데, 건방진 생각이었다. 신춘문예에서 계속 떨어져서 소설문학상에 내봤는데 그땐 바로 됐다. 거기까지였던 거지.
영화도 워낙 좋아해서 중학생 때부터 개봉 영화 포스터들 모으고,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했다고?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해서, 깝죽거리면서 시나리오도 써봤다.
<정글의 법칙>에 출연하며 알려진 바로는 인명구조 자격증이 있다던데. 정적인 것만 좋아하진 않나 보다.
전혀 그런 타입 아니다. 어릴 때부터 수영을 했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해서 누가 알려달라면 가르칠 수도 없을 거다. 대학교 들어와보니 내가 잘하는 것 중에 수영이 있더라고. 수영으로 할 거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자격증을 땄다. 그때 밴드 동아리 활동도 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랑 라디오 헤드를 좋아했거든. 그러면서 기타도 배웠다.
바른 청년 이미지가 있다는 거, 알고 있나?
있더라고. 나는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는 스스로 세운 금기가 많았다. 영화 보지 말자, 노래 듣지 말자, 연애하지 말자, 공부 열심히 하자. 나는 자존심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잖아. 그래서 내가 멋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조심했던 게 많다. 나를 지키려고. 떳떳하지 않은 일, 쓰레기 같은 짓을 하면 자괴감이 들 테니까. 창피하지 않게 살고 싶다.
다들 배우는 특별한 직업이라고 하지 않나. 모든 배우들이 그 특별한 사람들 속에서 더 빛나고 싶어 하고. 배우가 된 지금은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걸 하나?
빛나는 삶을 말할 때 대부분은 세속적인 성공을 떠올린다. 인기와 명성을 얻고 부를 축적하고. 그런데 나는 나를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건강하게 가려고 한다. 속도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더 빨리 대한민국 사람 절반 이상이 아는 사람이 되는가를 시합하는 일은 아니니까.
자존심이 센 사람은 보통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인이었어도 나는 특별해지고 싶어 안달이 났을 거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생각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세계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아예 뒤집었다.
첫 영화를 선보였고 앞으로 또 다른 기회가 열릴 거다. 어떤 걸 해보고 싶나?
도전할 만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탐구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 좋다. 일단 액션. 몸을 안 사리거든. 사회 부조리를 밝히는 열혈 기자나 변호사 역할도 원한다. 이제 스물일곱인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여름 향기 나는 청춘 멜로도 해보고 싶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것. 말하고 보니 참 많네. 앞으로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해봐야지.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조심했던 게 많다. 나를 지키려고. 떳떳하지 않은 일, 쓰레기 같은 짓을 하면 자괴감이 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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