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 곡씩 만들고 녹음을 했어요. 늦게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작업량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꿈이 있을 거다. 이를테면 배우가 되어 칸의 레드 카펫을 밟는다거나,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되어 엘런 쇼에 출연한다거나 하는 것들. 이 꿈이 너무 거창하다면 조금 좁혀서 래퍼가 되어 <쇼미더머니>에 나가는 것도 괜찮을 거다. 쿠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외국 힙합을 듣고 혼자 연습장에 가사를 끄적이던 힙합 꿈나무였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했고 힙합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꿈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민은 계속됐다.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사이에 군대를 다녀왔고 수강 신청을 클릭하며 복학을 맞이했다. 먼저 음악을 하던 친구들의 작업실에서 ‘취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녹음한 트랙이 데모 테이프로 만들어졌고, “이거 래퍼들한테 뿌려볼까?” 하는 친구들의 말에 쿠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피드백이었다. DJ 킹맥에게서 연락이 왔고 래퍼 빌스택스는 급기야 직접 만나자고 요청해왔다.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빌스택스는 “첫 번째 트랙과 세 번째 트랙 랩은 누가 한 거야?”라고 물었고 그가 궁금해했던 목소리는 전부 쿠기의 것이었다. “빌스택스 형이 ‘다음에 또 보자’라고 했는데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 또 볼 일 있겠나 싶었죠. 이제 복학하고 취업 준비해야 하니까. 근데 바로 연락이 오더라고요, 내일 보자고. 내일은 안 된다고 했죠. 1학점짜리 사회봉사 활동을 채워야 했거든요.” 내일은 안 되기 때문에 모레 만난 바로 그 자리에서 빌스택스는 대뜸 쿠기에게 “계약을 하자”고 청했다.
부모님이 직접 빌스택스를 만나고 ‘컨펌’을 받고 난 뒤에야 쿠기의 음악 모험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곡씩 만들고 녹음을 했어요. 늦게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작업량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해서 2017년 10월 첫 믹스테이프가 세상에 나왔다. “그 믹스테이프를 듣고 래퍼들에게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씨잼, 닥스후드, 식케이 그리고 기리보이도요. 기리보이가 ‘우주 비행 파티’ 무대에 서달라고 해서 클럽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꾸준히 교류하고 작업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워낙 쟁쟁한 뮤지션들과 활발히 작업물을 만들어낸 탓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저도 리스너 입장에서 ‘얘 별론데 왜 이렇게 띄워주지’ 하는 뮤지션들이 가끔 있었거든요.(웃음) 그래서 저의 행보가 조금 아니꼬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저는 아는 사람의 ‘빽’이나 ‘인맥’ 통하지 않고요, 직접 DM 보내서 피처링 섭외를 다 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음악을 하는 쿠기라고 합니다. 당신과 작업하고 싶은데 꼭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냈더니 대부분 음악 듣고 연락해주시더라고요. 우디고 차일드, 슈퍼비, 키드밀리, 나플라까지 전부 다요. 제 힘으로 해낸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만만한 쿠디의 다음 행보는 <쇼미더머니 777>이었다.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이 프로그램에 안 나가고도 잘되는 분들이 멋있기도 했고요. 아, 방송에 나간 분들이 멋있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꼭 방송이 아니어도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죠.” 결국 쿠기는 긴긴 예선을 거쳐 방송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안정적이면서도 듣기 좋은 톤의 랩, 그리고 트렌디한 비트를 고르는 감각 덕분에 ‘파이트 머니’는 쭉쭉 올라갔다. 아쉽게도, 부모님이 공연을 보러 오신 날 탈락했지만. “일단 무대가 그렇게 클 줄 모르셨을 텐데 아마 그것 때문에 놀라셨을 거예요. 제가 첫 행사 뛰었을 때도 부모님은 놀라셨거든요. 많은 분들이 저를 보러 오셨다는 것 때문에요. 결과야 어찌됐건 저는 아주 흡족해요.”
우승 욕심은 없었을까 했는데 오히려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고. “애초에 라인업이 워낙 좋아서 저 같은 신인이 낄 자리는 한두 개 정도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준결승까지만 가자. 준결승에서 이상한 노래하고 자진 하차하자’ 막 그랬는데.(웃음) 오히려 임팩트를 더 주지 못한 점이 후회돼요. 1:1:1 대결할 때 상위 랭커들이랑 붙어볼 걸 싶어요. 그럼 내가 더 시선 집중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점들이 아쉽지 마지막 탈락이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랩 경연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다면 쿠기는 이런 조언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경연을 나가는 것과 음악을 하는 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갈까 말까를 고민한다면 한번 나가봐야죠. 저 역시 음악을 제대로 하지 않던 시절에도 <쇼미더머니>에 한 번 나가려고 했었어요. 살면서 언제 이런 거 해보겠나 싶어서요.(웃음) 시즌 3 때였는데 군대 가기 직전이었어요. 근데 과제 제출날이랑 <쇼미더머니> 신청 날짜가 겹쳐서 못 했던 거예요.”
같은 <쇼미더머니 777> 출신 래퍼 마미손이 말했듯이 인생은 길고 음악도 길다. 마지막 결승 날 특별 공연까지 선보인 쿠기는 이제 새로운 음반을 준비 중이다. 쿠기의 최대 강점은 트렌디한 감각.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대중이 원하는 것의 균형을 맞춘다는 건 어려워요. 제 곡 중에 ‘쿠기’라는 트랙이 있어요. 이 곡을 발표한 후 사람들한테 욕을 엄청 먹었거든요, ‘이게 랩이냐’고.(웃음) 근데 전 그 노래를 되게 좋아해요. 당시에 그런 느낌의 곡이 한국에 없다고 생각해서 먼저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대중의 반응을 보니까 너무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길은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더콰이엇 형님도 조언을 해주셨어요. ‘나도 그 노래를 제일 좋아하지만 대중의 호흡보다 너무 빨라도 좋지 않다’고.”
누군가는 1년 만에 이 자리까지 ‘광속’으로 올라온 쿠기에게 ‘운이 좋다’고 말한다. “운도 좋았어요. 하지만 1년 차 치고 정말 많은 곡을 발표한 편이에요. 이미 힙합 신에서 오래 음악을 하신 분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저도 열심히 작업을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거의 매일 공연이 있고 공연을 하지 않은 날엔 곡 작업을 한다. 꿈꾸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쿠기는 현재를 ‘너무나 축복받은 삶’이라고 말한다. 자칫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해서 ‘끼 많고 랩 잘하는 신입 사원’이 될 뻔했지만, 쿠기는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꽉 움켜잡고 본격적으로 모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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