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문을 연 위키드와이프 와인가게에서 와인을 권하고 판매하는 방식은 조금 수줍다. 낯을 많이 가린다고 해야 할까. 가게를 오픈하는 날짜와 시간대를 SNS에 공지한 뒤, 미리 예약한 손님에게만 그달의 와인을 판매한다. 나는 방문 고객이 마셔왔던 와인 얘기를 들어보고, 그간의 취향과 입맛을 고려해 다음에 마실 와인의 방향성과 그달에 추린 계절 와인 리스트를 권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흐름에 질문 하나가 꼭 추가된다. ‘내가 마시는 와인이 내추럴 와인’이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 또는 그렇다고 했을 때 실망감이나 호기심의 감정이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지난, 뷰티 브랜드 이솝의 신상품 론칭 행사 때 기획했던 내추럴 와인 테이스팅에서 체리 주스 맛이 나는 탄산 레드 와인을 마신 이들의 표정처럼, 복잡 미묘하다.
2, 3년 전만 해도 수입상과 소믈리에만 걱정하고 논평했던 내추럴 와인이 올해는 도심 한복판으로 뛰쳐나왔다. 이태원의 빅라이츠, 회현동의 피크닉, 녹사평의 슬로크가 우리가 궁금해하는 내추럴 와인을 마셔보고 싶도록 거침없이 권한다. 그들은 유기농과 비오디나미, 내추럴 와인의 차이라든가 각각의 와인에 포함된 이산화황의 수치에 대해 거들먹거리거나 설교하지 않는다. ‘저물녘 물드는 노을을 통째로 삼키는 맛이에요’라고 권하는 슬로크의 이윤경 대표 표정은 장난스럽지만 솔직했다. 잔을 받아 든 이들의 표정은 가지각색. 작은 쇼크를 경험하기도 하고, ‘에퉤퉤’ 뱉기도 하고, 비타민제를 들이켠 표정도 짓는데, 공통점은 모두 명랑하고 생동감 있게 이 장르의 와인을 마신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내추럴 와인이 주는 이 동적인 장면에 매료되었으나 첫인상만으로는 이런 문장을 내어주기 힘들었다. 2004년 처음 와인을 접한 뒤 와인 잡지에 취직해 10년 넘게 클래식 와인(컨벤셔널 와인)에 길든 혀가 모르는 맛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 오줌처럼 톡 쏘았고, 시큼털털했으며, 산화된 오렌지 원액같이 역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근 1년간 오갔던 도쿄, 교토, 홍콩, 런던, 파리, 뉴욕, 오슬로의 도심에서 의도적으로 들른 내추럴 와인 바에서 나는 점점 더 이 장르에 마음을 뺏겼다 소믈리에는 나라와 품종과 와인메이커의 역사를 장황하게 읊는 대신, “오늘 기분이 어떤데? 우울하다면 이걸 마셔봐, 아주 상큼하고 맛있거든. 이게 널 위로해주길 바라”라며 경쾌하게 설명하고 재빠르게 떠났다. 잔을 받아 든 이는 오후 3시경 창가에 앉아 맥북을 앞에 두고 그것을 콜라나 커피처럼 마셨다. 파리의 르 가르 로브(Le Garde Robe), 뉴욕의 에스텔라(Estela), 오슬로의 테리토리에(Territoriet)에서 비슷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우리는 ‘편하고 쉬우면서 나를 존중하고 취향까지 부여해주는 현상’에 끌린다. 와인, 막걸리, 사케, 싱글 몰트위스키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주류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내추럴 와인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 지금의 우리를 열광하게 한다. 조금 더 알고 나면 내추럴 와인은 그보다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2010년부터 내추럴 와인만 전문적으로 다뤘던 와인엔의 곽동영 대표는 “이산화황이나 인공 효모를 쓰지 않고, 포도밭의 해충이나 유해한 생명체에 개입하지 않고 포도가 그저 포도주가 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고 담백하게 설명했다.
곽 대표는 유년 시절 극심한 아토피로 고생했는데, 국내 최초로 프랑스에서 공인하는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한 뒤에도 몸이 편안하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내추럴 와인에만 정진했다고. 공감한다. 이제 거대한 미국과 호주의 레드 와인을 마시면 휘청거리는 나에게 내추럴 와인은 헤비 드링커가 상상할 수 없는 편안함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내추럴 와인은 안 취한다’는 문장은 거짓말이지만, 커피 한 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체질이라면 클래식 와인보다는 편하다고 느낄 거다.
지난 1년간 나는 많은 이들에게 내추럴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와인의 재료도 결국 과일, 즉, 음식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시는 와인은 최소한 유기농이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던 피크닉 소믈리에 클레멍의 대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유기농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부여하는 인증 마크에 따라 규제하는 인공첨가물의 범위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인증 마크를 발견한다면 최소 ‘좋은 포도’를 마시고 있다고 안도할 수 있다. 론 지역의 몽티리우스(Montirius)는 비오디나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시다. 유기농 와인이 와인 재배에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복지’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비오디나미 와인은 우주까지 조화와 균형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달과 행성의 움직임에 따라서 포도 재배 작업 시기를 조정하고, 유기농 비료에 소뿔을 넣어 땅속에 묻어 반년간 삭힌다. 그리고 정해진 날짜에 꺼내 정해진 시간대에 광활한 포도밭에 손톱만큼 뿌려서 사용한다.
내추럴 와인에는 등급과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식도 없다. 프랑스 쥐라에서 뱅존(산화된 스타일의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할아버지 와인메이커들이 등급을 매기거나 표식을 달자는 얘기를 들으면 콧방귀를 끼거나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늘, 당연히 만들어왔는데 왜 새삼 그것을 증명해야 하느냐”고.
1년 후에 내가 어떤 의식으로 이 와인을 대할지 지금은 모르겠다. 그런데 1년 전과 달리, 지금은 취향이 생겼다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나라와 지역과 품종을 그대로 반영하되, 첨가된 것 없이 그저 깨끗하게 만든 와인을 좋아하게 됐다. 누군가 말해주기 전에는 내추럴인지 아닌지 알쏭달쏭 분간하기 어려운 와인 말이다. 처음부터 거칠게 드러내는 내추럴 와인은 매력 또한 단편적이라 오래 사귀기 어렵다. 결국 좋아하는 맛을 구별하고 인지하는 것이 내추럴 와인 카테고리보다 중요하다. 인지하는 훈련이 되면, 그게 언제라도 우리는 맛있는 술을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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