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장에 들어서면 정신이 없다. 수많은 업체들이 저마다 눈길을 끌기 위해 현란한 조명과 장식, 음악으로 눈과 귀를 잡아끈다. 정신을 차리고 우선 익숙한 브랜드를 찾아 들어서면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제품이 깔린 전시대가 펼쳐진다. 인파와 화려한 사인, 탐스러운 신제품들. 전시장은 소리 없는 전쟁터다. 수천 개의 제품이 우리의 기억에 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독일 베를린에서 6일간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 2018도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미래에도 생존하기 위한 50여 개 나라의 1천7백 개 기업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전쟁터의 승자는 누구일까?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TV다. 사실 TV는 제품 자체가 크기 때문에 원래 눈에 잘 띈다. 혼란스러운 전시장을 떠올려보면 다른 건 몰라도 TV만은 확실하게 남는다. LG전자는 88인치 8K 올레드 TV를 선보였다. 올레드 TV로서는 세계 최대 크기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LG는 55인치 올레드 TV 2백58대를 이어 길이 16m짜리 ‘올레드 협곡(canyon)’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회의 가장 큰 스타였다. 삼성전자는 85인치 8K QLED TV를 들고 나왔다. LG전자에 못 미쳐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다. 삼성전자가 내놓는 QLED는 LG전자의 올레드(OLED)와 이름은 비슷하지만 좀 다른 기술이다. 올레드는 백라이트가 필요 없는 자체 발광 소자를 이용한 TV다. 반면 QLED는 퀀텀닷이라는 소자를 이용하지만 아직 백라이트가 필요하다. 기술적으로는 올레드가 앞서지만 수명이나 내구성 등에서는 QLED도 장점이 있다. TV 분야 1위인 삼성전자는 올레드에 비해 저렴하고 실용적인 QLED로 당분간 시장점유율을 유지할 예정이다.
그 밖에도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샤프, 하이얼, TLC, 창홍 등의 일본, 중국 업체들도 8K TV를 내놨다. 그러나 주인공은 역시 한국의 두 회사 LG전자와 삼성전자다. 한편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인 TV들은 대부분 8K다. 현재 주로 판매되는 4K TV에 비해 화소 수가 4배 이상이다. 판매 대수만 보면 아직 한 해 6만 대 수준에 불과하지만 2022년이면 5백30만 대 시장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다음 주인공은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전시의 스타는 소니의 ‘아이보’다. 1999년 첫 등장한 아이보는 꽤 신기하고 귀여웠지만 몇 가지 행동 알고리즘을 탑재했던 자동 로봇에 가까웠다. 그러나 2018년 다시 만든 아이보는 클라우드 인공지능으로 학습하며 행동을 보정하는 진짜 인공지능 로봇이다. 소니 주장대로라면 이번 아이보가 7세대다. 7세대 아이보는 22개의 관절로 상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정해진 알고리즘이 아닌 불규칙한 행동을 한다. 털만 수북하다면 진짜 강아지처럼 보일 정도다.
아이보는 지난 1월에 일본에서 발매됐지만 일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그동안 해외 버전을 만나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구입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구입하자 이제 해외 입양이 시작된다. 이번 IFA 2018에 처음 선보였고 9월부터 미국 내에서도 판매를 개시했다. 가격은 약 2백만원이다. 여기에 3년간 소프트웨어 관리 비용 90만원, 케어 서비스를 추가하면 총 1백50만원 정도를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좀 비싸 보이지만 아이보는 배변 교육을 해줄 필요 없고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되며 신발을 물어뜯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참고로 아이보는 클라우드 서버에 접속해야만 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정식 출시된 국가가 아니면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 한국에 무작정 사오면 안 된다는 뜻이다.
LG전자도 자사의 8번째 로봇인 ‘클로이 수트봇’을 공개했다. 클로이 수트봇은 웨어러블 로봇으로 보행이 불편한 노인이나 환자들의 하체에 착용하면 근력을 지원한다. 건설업이나 제조업 등 현장에서도 사용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그동안 출시한 7개의 로봇도 함께 선보였다. 하지만 아이보처럼 재주를 부리거나 사랑스럽진 않다. 그래도 LG전자는 귀여운 편에 속한다. 무서운 것은 구글과 아마존이다. 소니와 LG전자가 눈에 보이는 인공지능 기기를 소개했다면 구글과 아마존은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의 주인공이다. 구글의 구글 어시스턴트 플랫폼과 아마존의 알렉사 플랫폼은 전 세계 첨단 기기와 가전제품에 탑재되어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했다. 이곳저곳에서 많은 관람객이 스피커나 TV에게 말을 거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봇대에 말을 걸던 술 취한 학창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다만 근성의 삼성전자는 ‘빅스비’라는 독자 플랫폼으로 스마트홈을 시연했다. 삼성전자의 단짝 LG전자는 ‘딥씽큐’ 플랫폼을 밀면서도 소심하게 구글과 알렉사 연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독자 플랫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LG전자가 선보인 초프리미엄 가전 ‘시그니처’ 시리즈와 드롱기, 지멘스, 밀레 등의 유럽 가전 브랜드, 파슬(Fossil)을 비롯한 스마트워치, 뱅앤올룹슨의 스피커 등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IFA 2018의 전시회 주제는 크게 커다란 TV와 스마트홈, 인공지능으로 나눌 수 있다. 이 트렌드는 1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100인치 가까운 커다란 LCD TV, 네트워크로 연동되는 스마트홈, 지금보다 약간 멍청한 로봇들이 전시장에 끌려 나왔다. 그러나 10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전시회용이 아니라 ‘진짜’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커다란 크기에 맞는 화소 수를 갖춘 TV, 소비자의 불규칙한 음성 명령에 반응하는 스마트홈, 학습하고 똑똑해지는 로봇이 전시장을 채웠다. 예전의 전시회장 제품들이 뻥튀기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리얼하다. 이런 기술들은 대부분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하이얼, 창홍 같은 글로벌 대형 기업이나 구글, 아마존 같은 기술 기업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작은 기업이나 제품 자체만의 매력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향평준화로 대부분 비슷한 모습에 인공지능 플랫폼을 누가 얼마나 잘 탑재하느냐의 게임으로 바뀌고 있다. 결국 모든 전자제품들이 스마트폰화되는 느낌이다. 우리는 큰 고민할 필요 없이 애플, 삼성, 화웨이, LG의 4~5가지 스마트폰 회사들과 iOS, 안드로이드 플랫폼 중에 하나를 2년마다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뻥튀기로 가득했던 가짜투성이 박람회가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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