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호텔 코스테, 뉴욕 노매드 호텔을 꾸민 자크 가르시아의 인테리어. 19세기 프랑스 궁정 사회로 탈출한 듯한 강렬한 공간이 주는 비일상성. 제2 외국어를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프랑스어로 선택한 엘리베이터 안내 멘트의 이질감. 런던의 플로리스트 토니 마크루가 풍성하게 늘어뜨린 플라워 데커레이션. 펜할리곤스, 마틴 마르지엘라와 일한 조향사 알리에노르 마스네의 달콤한 시그너처 향. 그리고 알란스의 비스포크 유니폼을 차려입은 스태프들까지. 남대문시장과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연결되는 회현역 앞 부티크 호텔, 레스케이프 호텔이 7월 19일 정식 개장했다.
3년가량 준비를 거친 레스케이프 호텔이 가진 화제성은 한둘이 아니다. 신세계조선호텔 그룹에 속한 호텔이지만, 1백 년 이상 역사를 이어온 조선호텔의 매끈한 고전성과 안락함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빈번히 회자되는 슈퍼 엘리트 인력들과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로 손잡았으니 말이다. 물론 호텔 도시가 된 서울에서 새로운 호텔이 하나 더 생기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놀라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이 호텔에 대해서는 유별난 기대감이 형성돼 있었다. 호텔 안에 어떤 식음업장이 채워질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
미식가로 알려진 정용진 부회장, 그리고 신세계그룹의 식음 분야 핵심 인력인 김범수가 총지배인으로서 이끌어가는 호텔 프로젝트이니 온갖 기대, 또는 호기심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세계를 누비며 먹는 ‘미식 노매드’로서의 일상을 기록해온 파워 블로거 ‘팻투바하’ 김범수는 대중에게도 일정한 신뢰를 쌓아온 인물이다. 그랜드 오픈과 함께 공개된 식음업장은 총 5곳. 모던 차이니스인 ‘팔레 드 신’이 6층에, 컨템퍼러리 레스토랑 ‘라망 시크레’와 바 ‘마크 다모르’가 최상층인 26층에, 리셉션 층인 7층에는 ‘르 살롱 바이 메종엠오’와 ‘헬카페’가 배치됐다.
“어벤저스 군단이죠.” 레스케이프의 식음업장에 관한 김범수 총지배인의 첫마디다. 그가 레스케이프 호텔의 ‘토니 스타크’로 칭한 곳은 팔레 드 신이다. 홍콩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자 모던한 트위스트의 차이니스 퀴진으로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모트32’와 협업했다. 서울 호텔가에 없던 모던 차이니스 레스토랑이다. 그다음 ‘토르’쯤 되는 곳이 라망 시크레일 터다. 이곳 역시 뉴욕에서 손꼽히는 레스토랑 ‘더 모던’과 협업했다. 샌프란시스코 ‘퀸스’의 수셰프로 있던 요리사 손정원 셰프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손 셰프는 김범수 총지배인이 거의 모든 경력을 지켜봐온 해외파 요리사다.
피에르 가니에르, 또 야닉 알레노 같은 세계적인 스타 셰프의 레스토랑이 호텔에 입점하는 경우는 전에도 있었다. 일종의 ‘동업 분점’ 개념으로, 고유성을 수입하는 물리적인 결합이었다. 그러나 레스케이프 호텔이 취한 이식 전략은 물리와 화학을 융합한 교배 방식이다. 어디까지가 모트32이고 팔레 드 신인지, 더 모던이고 라망 시크레인지 구분할 수 없는 완전한 결합.
이 방식은 국내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 시도되는 컬래버레이션이다. 김 총지배인은 “느슨한 계약 관계”라고 두 레스토랑의 결합을 설명한다. 두 레스토랑에선 창의를 담당하는 요리사들이 만나 이야기와 맛을 나누는 동안에 자유로운 공동의 아이디어가 도출된다. 매일 레스케이프 호텔 주방에서 모트32와 팔레 드 신, 더 모던과 라망 시크레의 ‘포핸즈(4 Hands)’ 팝업 레스토랑이 열리는 셈이다.
서울은 물론 해외에서 여행 온 푸디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흥미롭고 도전적인 방식이다. 이것이 레스케이프 호텔이 지구 최전선의 미식을 서울로 이식한 방법, 첫 번째다. 일반적인 분점 유치였다면 소모했어야 했을 어마어마한 로열티도 아꼈다. 바 마크 다모르 역시 크리에이티브 칵테일로 명성이 높은 런던 랭햄 호텔 바 ‘아르티장’의 바텐더 팀 ‘택소노미’와 결합했다.
이들의 이식법 두 번째는 음식 언어의 문법에 대한 것이다. 사실 한국의 맛은 전 세계 미식 흐름이 추구하는 맛과 별개인 독보적인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홍콩의 맛과 뉴욕, 런던의 맛은 공통된 취향이 있지만, 한국의 맛은 그와 다른 위치의 균형을 공략한다. 이제까지 많은 호텔들이 식음업장에서 세계적 기준의 맛을 추구하다가도 한국인 고객의 입맛에 가로막혀 결국은 한국적인 원형성에 집중, 또는 타협하는 일들이 있었다. 레스케이프 호텔은 일단은 ‘타협하지 않은’ 세계 공용어의 음식 문법을 선보였다. 택시 타고 홍콩과 뉴욕, 런던의 맛에 도착할 수 있는 셈인데, 따라서 맛에 대한 반응이 엇갈리는 모습이 관찰된다.
서울 안에만 있었던 고객은 대체로 낯설어하고, 해외 미식 경험을 다양하게 쌓은 고객층은 반색한다. 물론 오픈 초기인 만큼 완벽하게 손발을 맞추기까지 시행착오도 감안해야 하지만, 김 총지배인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레스케이프 호텔만큼은 국제적인 취향을 견지할 수 있으리라. 반면 르 살롱 바이 메종엠오와 헬카페는 서울의 개성을 원형대로 설치한 작품이다. 용산구 보광동의 소박한 헬카페의 맛과 공기 그대로, 서래마을 실력파 양과점 메종엠오의 완성된 맛을 그대로 우아한 호텔 공간 안에 블록 조립하듯 꽂았다. 강배전에서 나오는 굵고 고소한 맛과 향의 헬카페 커피는 해외의 요란한 제3의 커피 물결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개성 있게 서울의 일면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며, 피에르 에르메와 조엘 로부숑에서 경력을 쌓은 오오츠카 테츠야, 이민선 파티시에의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호텔이 요구하는 기준치를 충족한다는 것이 김범수 총지배인의 이야기다.
마지막, 세 번째로 레스케이프가 보여줄 미식 최전선은 창조적이고 돌출적인 아이디어의 각종 이벤트를 통해 구현된다. 이미 오픈 첫 달부터 세계적인 내추럴 와인 생산자가 방한한 와인 디너, 갈라 디너 등을 선보인 바 있지만 김 총지배인은 앞으로 레스케이프에서 벌어질 일들이 더 흥미진진할 것이라 단언한다. 실버 스푼을 들고 태어난 미식가, 그리고 전 세계 미식을 탐지한 열성적인 미식가가 총지배인이 되어 펼쳐내는 호텔 레스케이프의 미식 세계는 지구 최전선의 미식을 서울의 새로운 맛으로 안착시킬 준비를 단단히 마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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