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팝 시장에서 K-팝의 부상은 그간 미국이라는 절대적 중심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파된 대중음악이 아시아를 시발점으로 해 북미와 남미까지 아우르는 다원적 중심부의 구도를 통해 대안적인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음악사적 의미를 가진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미국을 제외한 사실상 유일한 트렌세터가 된 K-팝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또 다른 모멘텀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BTS 현상이라 일컫는 방탄소년단의 정상 등극은 근 몇 년간 K-팝 시장의 가장 큰 뉴스였다. 미국 시장의 잇따른 러브콜과 저스틴 비버의 독주를 막은 빌보드 어워드 ‘톱 소셜 아티스트상’ 2년 연속 수상은 그 자체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이라는 인증이며, K-팝 팬덤을 뛰어넘은 광범위한 음악 팬을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미국 시장을 축으로 이뤄낸 결과라는 점에서 K-팝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방탄소년단이 영어 음반 한 장 없이 폐쇄적인 미국 시장을 매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K-팝이면서 탈 K-팝적인 정체성, 특히 진정성을 내세운 음악적 태도 및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방탄소년단은 여느 아이돌 그룹과 유사한 트레이닝 시스템을 거쳤지만 일찍이 뮤지션의 마인드를 장착하고 음악 작업에 참여했고, 기존의 아이돌은 기피하다시피 한 청춘과 성장의 담론을 꾸준히 제시해 음악에 진정성을 불어넣었다. 이 같은 메시지를 트렌디한 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 그리고 글로벌 트렌드이자 시대정신인 힙합의 언어와 태도를 통해 거칠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아이돌 문화에 배타적이고 아티스트적 진정성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미국 청중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의 약진과 별개로 K-팝의 기존 시스템은 더욱 고도화되고 세련되지고 있다. 최근 ‘뚜두뚜두’로 K-팝 유튜브 조회 수 신기록을 달성한 블랙핑크는 글로벌 시장에서 K-팝 전략의 유효성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변화된 시장의 상황에 맞추어 그 전략이 새롭게 업데이트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사례다. 2016년에 공개된 블랙핑크는 K-팝 대형 기획사 특유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갖추고 해외시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모델을 연상시키는 외모, 완벽하게 훈련되어 준비된 무대, YG의 인-하우스 프로듀싱 팀들이 만든 고른 품질의 음악, 뉴질랜드 교포와 태국 멤버를 포함해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는 전략 등은 이미 K-팝 팬에게는 익숙한 요소며 이 모든 부분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K-팝이 보유한 테크놀로지의 정점을 과시하는 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핑크에 반응하는 해외 팬들은 이들이 가진 지극히 K-팝스러운 매력과 익숙한 공식을 단점이 아닌 미덕으로 여긴다. 출범부터 2NE1을 잇는 그룹으로 정체성을 분명히 한 블랙핑크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YG가 그간 위력을 증명해낸 사운드의 미학 위에 현대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를 더해 일반인부터 마니아층을 아우르며 폭넓은 팬덤을 확보 중이다. 블랙핑크의 성공은 어떤 의미에서 지난 10년간 해외시장을 두드린 K-팝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발전된 형태로 적용 가능함을 말해준다.
블랙핑크의 성공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흐름은 바로 K-팝 시장의 확장과 다변화다. 기존에 주된 타깃이었던 일본과 중화권에 더해 최근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동남아시아 시장과 북미 시장은 블랙핑크가 빠른 시간에 국제적인 지명도를 확보하는 핵심적 동력이 되고 있다. 특히 6억을 넘는 인구를 보유한 데다 아이돌 음악의 전성기인 2010년대 이후 K-팝 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동남아시아는 남미와 함께 잠재적으로 K-팝 팬을 가장 폭넓게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블랙핑크의 폭발적 인기는 K-팝 신의 다른 걸 그룹에 비해서도 유독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팬들의 지지세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지 팬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태국 멤버인 리사의 존재는 결정적인 힘이다. 또한 호주 출신인 로제와 뉴질랜드 유학파인 제니 등 영어에 익숙한 멤버들이 포진함으로써 현재 북미를 비롯한 영어권 K-팝 팬들의 호의적인 반응도 끌어내고 있다. K-팝의 전통적인 전략인 교포 출신 멤버의 활용이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시장의 부상과 맞물려 외국 멤버가 직접 참여하는 현지화 전략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는 것이다.
K-팝이 글로벌 팝으로 거듭난 현재에 NCT의 등장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고 있다. ‘그룹’보다는 오히려 ‘개념’이나 ‘포맷’에 가까운 형태를 띤 NCT는 블랙핑크나 트와이스의 사례처럼 K-팝이 외국 멤버들을 활용해 현지 공략을 하는 현 상황, 즉 K-팝의 현지화 전략 성과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정교한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한 인재 양성, 초국가적 협업 시스템으로 완성하는 K-팝의 제작 노하우 등 그간 SM이 선보여온 K-팝의 기술이 총집결되면서도 이를 단일 그룹이 아닌 확장 가능한 템플릿으로 삼겠다는 것은 분명 야심찬 포부다. 미국의 미키 마우스 클럽, 일본의 쟈니스와 AK48 등 팝 아이돌 개념을 두루 절충해 진화한 이 모델은 이미 NCT 127, U, Dream 등 지역과 콘셉트를 다양하게 조합하며 실험되고 있다. NCT가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K-팝이라는 음악이 그것을 만들어낸 한국이라는 단일한 ‘신’에 종속되지 않고 각각의 문화권에서 직접 제작되어 유통되는, 이를테면 OEM 스타일의 ‘글로컬’ 팝으로 발전될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K-팝이 단일한 장르나 신이 아니라 일종의 ‘모듈화’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다음 단계는 한국이 이 같은 기술과 모델을 기획하고 유통하는 중추가 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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