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에 한번쯤 소지섭이 다녀간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배우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말 한번쯤은 소지섭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다. 과묵하고, 우수에 찬 눈빛 속에 담겨 있는 지고지순함, 아픔을 감내하는 순정 같은 것들이 조금 촌스러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확 와 닿을 때가 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우리는 지난해 영화 <군함도>에서 그 현상을 이미 목도했다. 무뚝뚝하고 거칠지만 뜨거운 정의, 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지닌 남자. 훈도시를 입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격투를 벌이는 바로 그 장면에서 많은 여성들은 끝내 무너져 내렸다. ‘내 평생 소지섭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던 그녀들이 ‘이제서야 소간지의 매력을 알게 됐다’고 간증하기 시작한 거다. 요즘 젊은 것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진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소지섭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그에게서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 적이 있다. 소지섭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처음으로 ‘아빠’를 연기했다. 그는 자신의 ‘아빠 연기’에 51점을 주었지만, 관객은 늘 불안정하고 이뤄지지 않는 사랑을 할 것 같던 그에게서 가슴 따뜻한 가장의 모습을 보았다. 사실 그는 그동안 검증된 ‘멜로 장인’이었다. 연식이 있는 사람들은 알 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 속 소지섭이 당대에 어마어마한 멜로 아이콘이었음을, 굳이 또 설명하지는 않겠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헌신하거나 혹은 짐짓 아닌 척 잘해주는 뻔한 멜로 남자 주인공 캐릭터 사이에서, 고독한 카우보이 같은 매력으로 장안을 뒤흔들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연기하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재미없고 어설프고 엉성하다’고 표현했지만,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람들은 그를 배려심이 많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군함도> 속 모습과 <아레나> 커버 촬영 현장 속의 모습, 둘 사이 엄청난 간극이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예고도 없이 출연한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은 또 어떻고. 마이크를 굳이 달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과묵하게, 하루를 채워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잠을 자고,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음식을 해 먹고, 조용히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행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며 산다”던 그는 자연스럽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갔다. 단순한 무채색에 흔한 장식 하나 없지만 그 자체로 멋스러운 옷처럼, 그는 소란스럽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자기 방식대로 ‘예능 프로그램’을 꾸려나갔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멋있게 살아온 덕분에, <아레나>는 소지섭을 ‘7월의 남자’로 선택했다. 그날은 이상한 토요일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후덥지근하고 습한 날씨도 이상했지만, 서울의 한 호텔에서 시작된 커버 촬영이 지나치게 순조로웠던 것도 이상했다. 제 시간에 촬영장에 도착해 익숙하게 옷을 갈아입고, 쌤소나이트 가방을 들고 있는 그에게서는 어떠한 결점도 찾기 어려웠다. 장소를 이동해 촬영할 땐 옷을 갈아입을 공간이 마땅치 않았는데 “이거 입으면 되나요?” 한마디 툭 던지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화장실로 걸어가버렸다. 몇 걸음 안 되는 그 짧은 동선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어머, 소지섭, 소지섭!’ 같은 호들갑에도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면서. 익숙한 스태프들과 때로 들릴 듯 말 듯 농담을 주고받고, 때로는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저녁을 훌쩍 넘겨서 끝날 것 같았던 촬영은 저녁 식사를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끝이 나버렸다.
내내 수상하던 날씨는 마지막 컷을 찍을 때 갑자기 강풍을 동반한 빗줄기로 응답했지만 소지섭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메라와 장비를 걱정하면서 또 한 번 멋을 보여줄 뿐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난 소지섭은 언젠가 다시 만나면 웨스트 코스트 힙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차림이었다. 엄청 박시한 흰 티셔츠에 와이드한 검은 팬츠 차림으로 샌드위치를 양손 가득 먹는 모습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재미없고 어설프고 엉성하다’고 표현했지만,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람들은 그를 배려심이 많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군함도> 속 모습과 <아레나> 커버 촬영 현장 속의 모습, 둘 사이 엄청난 간극이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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