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씨네 쿼 넌 | 만프레드 크랭클
데니스 호퍼는 영화 <이지 라이더>를 만들 때 편집 과정에서 자를 법한 불완전한 쇼트를 적극적으로 썼다. 거칠고 자유분방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이 영화를 반긴 건 반사회적 히피들. 오스트리아 태생의 와인메이커 만프레드 크랭클의 인생 영화 역시 <이지 라이더>다. 오스트리아를 떠나 캐나다, 그리스로 옮겨 다니며 살던 만프레드 크랭클은 영화 속 황야와 오토바이 굉음을 동경하여 미국에 정착했다.
크랭클은 와인메이커 하면 연상되는 보편적인 고상함과 거리가 멀다. 그런 양조가에 비하면 괴짜에 가깝다. “전형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다분히 예술가”라 했던 제임스 서클링의 말대로다. 세상에 같은 와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만프레드 크랭클의 첫 번째 철학. 절대 같은 와인은 만들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그는 씨네 쿼 넌의 모든 빈티지에 각기 다른 이름, 레이블을 짓는다. 심지어는 보틀의 모양조차 제각각이다. 레이블에는 어둡고 기이한 삽화를 넣기도 하고, 양성의 나체를 묘사하기도 하며, 허벅지에 총탄 다발을 두른 여자의 신체를 삽입하기도 한다. 모두 리노컷(판화 기법) 방식으로 크랭클이 직접 작업하는 아트워크다. 장인 정신으로,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만드는 와인인 만큼 다른 어떤 이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으로 똘똘 뭉친 와인을 완결형으로 선보인다.
만프레드 크랭클이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가 LA에 정착한 초창기 일이다. 레스토랑 ‘캠퍼닐리’를 운영하며 식당에서 사용할 요량으로 와인을 만들었고, 이것이 곧 로버트 파커에게 엄청난 평가를 받으며 와인계의 스타가 됐다. 만프레드 크랭클의 천부적인 와인 양조 능력이 그 비결이다. 그 자신도 미처 몰랐던 엄청난 능력이었다.
크랭클은 각 빈티지의 블렌딩 비율을 블라인드 시음을 통해 조율하고 결정한다. 다양한 품종을 사용해 와인을 극소량 생산하는데, 이 뛰어난 품질의 빈티지들은 이성적인 접근을 마비시킬 정도로 압도적이다. 씨네 쿼 넌에는 와인이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마력이 높은 밀도로 응축돼 있다.
씨네 쿼 넌의 맛을 ‘풍부한 과실 향’ 등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보다 스릴이나 관능과 같은 단어로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양조 과정은 모두 크랭클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생산량은 늘 변한다. 그러나 그는 작황이 나쁜 해에도 로버트 파커에게 100점 만점을 받은 와인을 탄생시켰다. 기후에 좌우되지 않고 주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철저하게 완벽한 유기농법만으로 와인을 완성하기에, 전 세계 컬렉터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씨네 쿼 넌은 로버트 파커에게서 15회의 100점 만점을, 11회의 99점을 받았다.
동시대 최고의 천재 양조가인 만프레드 크랭클은 지금도 자신의 와인을 끊임없이 재창조하고 있다. 씨네 쿼 넌은 그가 의도적으로 편집해 완성하는 완벽한 미완의 와인이다. 데니스 호퍼가 ‘불완전한 쇼트’를 사랑했던 것처럼. 매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새로운 빈티지를 전 세계에 동시 출시, 사전 예약 방식으로 판매하는데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품절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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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몰리 두커 | 사라 마르퀴스, 스파키 마르퀴스
뜨거운 태양 아래 과숙한 호주의 레드 와인에는 포악한 평가가 따르곤 했다. 섬세함이 결여됐다거나, 그저 과일 폭탄에 불과하다는 식이었다. 몰리 두커는 이러한 한계를 부수며 호주 컬트 와인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이전의 호주 와인이 지닌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농밀한 타닌’이었다. 몰리 두커의 오너이자 부부인 사라와 스파키 마르퀴스는 이러한 호주 와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실의 풍미와 볼륨감을 끌어올리는 일에 집중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두 사람이 합심해 아예 뿌리부터 매만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하여 몰리 두커의 시그너처 시스템인 ‘마르퀴스 빈야드 워터링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흙이 물을 얼마나 머금고 있는지 측정해 성장 과정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으로, 마르퀴스 부부의 특허 기술이다. 일조량이 과다한 시점이 오면 포도가 지나치게 빨리 익어 당도만 높아진다. 이 프로그램은 일조량이 과다해지는 시점을 찾아 정확한 양의 물을 공급한다. 당의 축적을 방지하는 것이다.
마르퀴스 빈야드 워터링 프로그램은 상당한 양의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다. 나무의 새싹이 돋기 시작할 때부터 성장기 내내 각 포도나무의 성장 속도를 측정하고 당도 등을 체크한다. 이 데이터를 모아 다음 3일간 줘야 할 정확한 물의 양을 계산해낸다. 몰리 두커 와인은 어떤 빈티지이든 당도와 산도의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한다. 탁월한 균형감을 지니기에, 진한 풍미, 높은 알코올 함량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매력을 뿜는다. -
3 도멘 알렉산드르 방 | 알렉산드르 방
프랑스 루아르 지역은 내추럴 와인, 비오디나미 농법 등의 용어가 전혀 낯설지 않은 동네다. 내추럴 와인에 정통한 루아르 지역에서도 알렉산드르 방은 ‘내추럴 와인의 수호자’라 불리는 와인 생산자다. 그는 그야말로 내추럴 와인계의 스타다. 와인 평론가 중 내추럴 와인 성애자이자 권위자로 손꼽히는 이자벨 레제롱은 알렉산드르 방의 와인에 대해 자신이 마셔본 푸이 퓌메 와인 중 최고였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방은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푸이 퓌메(Pouilly-Fume) 포도밭에서 비올로지크, 비오디나미 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한다. 질 좋은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생산하는 포도만이 과실 고유의 맛과 테루아의 특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철학을 고수한다. 그는 내추럴와인협회(AVN)의 규정을 철저히 따르며 와인을 생산한다. 화학 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모든 포도는 손으로 수확하고, 병입 시 일반 와인의 안정화를 위해 사용하는 이산화황을 극소량으로(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일반 와인의 15분의 1 이하) 쓴다. 여과와 정제 과정도 거치지 않는다. 최대한 인간의 간섭을 줄이고 테루아와 빈티지 특성을 고스란히 옮기는 데 힘쓰는 것이다. 다만 자연이 포도에 준 생명력에 의지해, 정교하고 섬세한 테루아와 기후를 반영한 와인을 선보인다.
알렉산드르 방은 순수하게 노동으로 와인의 맛을 이끌어낸다. 포도 재배부터 와인을 병에 담는 순간까지 그가 내리는 신중하고 치밀한 결정은 수없이 많다. 알렉산드르는 특히 포도가 완전히 익었을 때 수확하는 것을 중시한다. 포도를 지나치게 일찍 수확하면 충분한 아로마를 얻을 수 없고, 결국 배양 효모 혹은 인위적인 첨가물 등을 넣어야 하는 상황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4 까사 로호 | 호세 루이스 고메즈, 로라 무노즈 페드레노
까사 로호는 아직 역사가 짧다. 2010년에 와이너리를 설립해 2012년에 첫 빈티지를 출시했으니까. 하지만 역사에 비해 이미 명성이 높은데, 이유는 바로 스페인 주요 와인 산지와 그 지역의 토착 품종으로 가장 창의적이고 트렌디한 와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대다수 대형 와이너리들이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와 같이 누구나 아는 국제적인 품종에 집중하는 데 반해, 까사 로호는 스페인 지역 품종을 중심으로 와인을 출시한다. 토착 품종이야말로 그 지역의 테루아에서 잘 적응한 품종인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품종이기 때문이다.
까사 로호는 오너 와인메이커이자 부부인 호세 루이스 고메즈와 로라 무노즈 페드레노를 필두로 와인 업계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전문가가 팀을 이뤄 이끈다. 이들은 스페인 와인 신의 어벤저스와 같은 존재다. 까사 로호는 지금껏 9가지 와인을 완성했다. 모두 스페인 내 주요 와인 산지 9곳의 토착 품종으로 빚은 와인들이다. 토양의 특질에 따라 품종의 순수한 형태를 그대로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두고, 유기농, 내추럴, 비오디나미 방식으로 와인을 빚는다.
까사 로호의 7가지 와인을 하나씩 천천히 즐기다 보면 품종과 기후에 따라 얼마나 다른 와인이 탄생하는지 느낄 수 있다. 까사 로호의 9가지 와인을 마시는 일은 스페인 주요 지역을 여행하는 여정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레이블로 그린 마초맨의 별난 외모를 보고 이 와인을 장난스럽거나 귀엽게만 여기지만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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