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있었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에 대한 환상이다. 확대해서 생각하자면 운동선수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겠다. 동계 스포츠에 출전하는, 그것도 스피드스케이터라면 거대한 체구가 필수다. 북유럽 거인들과 경쟁하려면 그들만큼 벌크업해야 할 테니까. 텔레비전으로 본 이상화는 커 보였다. 다른 유럽 선수들 사이에서도 돋보였다. 그리고 허벅지. 올림픽 중계를 보면 스케이터는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쫄쫄이’ 운동복을 입고 있지 않나? 눈에 띄는 것은 허벅지다. 허벅지 두께로 실력을 가늠하듯 시청자는 누구의 허벅지가 더 두꺼운지를 비교한다.
선수들은 크고 우람한 근육질의 허벅지로 얼음판을 힘차게 밀어낸다. 자전거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타봤으면 이해할 거다. 순간 스피드와 체력 모두 허벅지에서 비롯된다. 그런 연유로 이상화의 두꺼운 허벅지를 기대했다. 아니 걱정했다. 옷이 안 맞으면 어떡하지? 치마만 입혀야 하나? 4년 전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만났을 때는 허벅지를 강조한 사진을 촬영했다. 이번 만남은 올림픽이 끝난 지 두 달여가 지나고 이루어졌다. 휴식 기간의 그녀는 올림픽 기간 때와는 달랐다. 보통 체격의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굵은 허벅지도 없었다. 가녀린 여자가 귀엽게 웃으며 인사했다. 메달리스트 이상화였다.
“소치 올림픽 이후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요. 정상에 서서 또 다른 올림픽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조국에서 개최하는 올림픽 출전을 포기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죠. 사람들은 3연패냐 아니냐만 관심 갖는 것 같았어요.”
4년 전 소치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이상화를 만났다. 당시 그녀는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메달을 따고자 하는 열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자신감이 당혹스러웠고 당혹감은 이어서 의구심으로 변했다. 왜? 어떻게 저리도 솔직한 걸까? 솔직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올림픽인데 두렵지는 않을까? 다른 선수들은 겸손한 말만 하던데…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솔직함은 자만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종류가 달랐다. 올림픽을 준비하며 흘린 땀과 치열한 승부욕에서 파생된, 버티기 위한 수단이었다. 솔직한 태도는 그녀가 운동선수로서 버티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 ‘진인사대천명’, 올림픽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끝내고 마땅한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주저함이 없었다. 사실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게 더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네트워크를 쌓다 보면 더욱 절실하게 경험한다. 감정은 감춰야 하고, 솔직해서는 안 된다. 세상살이란 이해관계에 따라 회전되는 것이기에 모난 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유명인에게 일방적인 겸손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면 아니 올림픽 메달 가능성을 지닌, 전 국민이 주시하는 선수라면 자신의 감정은 숨기는 편이 낫다. 또 쉽다. 편하다. 언어와 태도는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필요한 논쟁의 중심이 되기 십상이다. 그녀도 안다. 그럼에도 그녀가 택한 방식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저는 정말 그 대가를 받아야 해요. 열심히 노력했으니까요. 대가를 받게 해주시겠죠.”
자만과 자신감은 한 끗 차이다. 이상화와 처음 대화를 나누며 단번에 진의를 파악하긴 쉽지 않았다. ‘겸손’만 되풀이하거나, 말만 앞선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혹시 그 대가가 금메달이냐고, 정말 받을 만하냐고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정말!”
그녀가 솔직한 답변을 건넨 후 인터뷰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상화 특유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아침 방송부터 저녁 뉴스까지 온통 이상화의 ‘독특한’ 출사표를 전했다. 미디어는 이상화의 새로운 모습과 당찬 포부를 전하며 경기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높은 기대와 뜨거운 이슈 몰이에 빙상연맹이 그만 보도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금메달이었다.
그녀는 화제의 중심에서 목표를 이뤘다. 사람들은 그녀를 뜨겁게 관찰했고 그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차갑게 달렸다. 승부사 기질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스포츠는 종종 드라마와 비교된다. 그녀는 시청률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 모두가 원하는 결말은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다. 새로운 스포츠 스타의 탄생이었다.
“전 이미 모든 것을 이루고 끝냈으니까요.”
눈물의 평창
은메달이어서가 아니다. 4년 전 금메달을 획득한 후 사석에서 조심스레 평창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너무 먼 일이라며 답을 피했다. 욕심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욕심이 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첫 올림픽 무대를 밟은 2006 토리노, 최정상에서 스스로를 세계에 각인시킨 2010 밴쿠버, 2014 소치와는 전혀 다를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소치 올림픽 이후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요. 정상에 서서 또 다른 올림픽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조국에서 개최하는 올림픽 출전을 포기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죠. 사람들은 3연패냐 아니냐만 관심 갖는 것 같았어요.”
힘든 건 단지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화는 올림픽을 1년여 앞두고 하지정맥류 수술을 강행했다. 전신 마취가 필요한 큰 수술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대수술을 진행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출발선에 섰을 때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다른 대안이 없었죠. 수술 후 틀어진 자세와 감각을 바로잡는 것 역시 대단히 힘든 도전이었어요. 메달이 아니라 선수 생명을 건 도전이니까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경기가 끝나고 이상화는 눈물을 쏟았다. 복받친 듯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 이상화의 눈물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서른을 앞둔 노장 선수로서 여전히 최정상을 확인한 것에 대한 만족,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것에 대한 위로, 무엇보다 힘들었던 지난 4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메달에 대한 아쉬움이 눈물에 섞이진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안도감과 후련함뿐이었죠. 경기를 즐긴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단 한 번도 즐겨본 적 없거든요. 매번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았어요. 특히 지난 4년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어요.”
이상화는 이제야 속을 털어놓고 울 수 있었다.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선수 이상화는 빙상에서 눈물을 훔치며 20대의 마지막을 보냈다. 그녀는 대한민국과 올림픽을 시청한 세계인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했다. “저도 이제 제 경기가 앞으로는 주목받지 못할 걸 알아요. 전 이미 모든 것을 이루고 끝냈으니까요. 그래도 선수 생활을 지속하겠다고 한 건 스케이팅을 즐기고 싶기 때문이에요. 은퇴하지 않겠다고 한 건 그런 의미예요.”
오랜 선수 생활 동안 무거운 기대와 힘든 연습 속에 스스로 다그쳤을 그녀가 떠올랐다. 애써 어른스럽고 자신 있는 모습을 보였을 이상화. 이제야 마음 놓고 펑펑 울 수 있게 된 그녀. 드디어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저의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에너지를 어느 곳에 쏟을지 결정하지 못했어요. 김연아 선수처럼 대한민국 스케이팅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젠 선수가 아닌 이상화로 새로운 곳에서 ‘금메달’의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보여줄 또 다른 모습일 거예요.”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것은 빙상 위 모습에 불과했다. 빙상 밖은 그보다 훨씬 넓고, 많은 기회가 존재한다. 이상화의 성장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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