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 신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 몸집을 키웠지만 팽창한 규모만큼 다양성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다. 설령 누군가 새로운 걸 하더라도 자본의 수단이 되지 않을 경우 또는 자본적 요소가 없을 경우 곧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마련. 이러한 폐단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국 음악 신 전체가 안고 있는 숙제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기존과는 다른 스타일이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작년부터 페노메코를 주목했다.
페노메코는 인간사 이면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래퍼가 아니다. 그가 속한 크루 팬시차일드의 일원 지코, 딘, 크러쉬가 그러하듯, 페노메코 역시 스타일리시함을 겸비한 래퍼다. 특유의 목소리에 세련되고 멜로디컬한 랩을 구사하고 샤프함과 섹시함을 겸비한 보컬까지 소화해낸다. 메시지가 어떻든 페노메코는 그만의 음악을 한다. 색이 강한 뮤지션. 1년 만에 재회한 그는 〈쇼미더머니6〉를 두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티저였다고 말했다. 보여줄 게 가득하니까, 기대하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떨림이 전혀 없었다.
지난 〈FILM〉 발매 이후 1년 만에 재회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
음악 시작한 이후 가장 바쁜 한 해였다. 중학생 때 꿈꾸던 것들이 현실이 됐으니, 그만큼 스트레스와 즐거움도 컸다. 〈쇼미더머니6〉 이후 많은 게 변한 거다. 많은 사람 앞에서 경쟁하는 게 나랑 안 맞아서 사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예선에서 했던 랩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인 압박도 최고였다. 〈쇼미더머니6〉 이후에 ‘랩 비트쇼’에서 첫 단독 무대에 올랐는데, 관객이 내 노래를 ‘떼창’하더라. 처음 느껴봤다. 내 음악에 ‘떼창’이 나온 건 처음이었거든. 소름 돋더라. 팬시차일드 친구들과 함께했을 때만 해도 나를 굉장히 생소하게 느꼈을 텐데. 단독 무대에서 환영 받은 게 처음이었던 거지. 잊지 못할 기억이다.
에이솔과 붙어서 떨어졌다. 프로듀서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냉정하게 페노메코가 랩이든 희소성이든 훨씬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3차 예선에는 욕심을 많이 냈다. 1, 2차에서는 떨어져도 ‘절지만’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3차부터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욕심이었던 것 같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과해 보였던 게 아닐까. 물론, 에이솔도 이를 갈고 나왔더라. 아쉽긴 했다. 하지만 페노메코라는 래퍼가 세상에 있음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이제는 음악을 보여줄 차례라고. 한편으로는 예선에서 떨어진 게 잘된 일인 것 같다. 티저처럼 짧지만 임팩트는 컸으니까. 다음을 기대하라고 말하고 싶다.
지코가 〈쇼미더머니6〉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솔직히 지금도 저한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가 페노메코다.”
지금 들어도 기분이 좋은 말이다. 사실, 음악을 잠시 쉬는 기간이 있었다. 음악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때도 지코는 늘 나를 아티스트로 대했다. 내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걸 공유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의 얘기가 놀랍고 듣기 좋았다.
짓궂은 질문이겠지만, 지코와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랩을 잘하는 것 같나?
지코는 랩을 정말 잘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한계점을 아무렇지 않게 깨버리는 친구다. 그래서 음악을 쉴 때에는 내가 그 친구를 따라잡을 수 있는 지점이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다시 음악을 시작하면서 나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게 여럿 생기더라. 일단 내가 지코보다 노래는 잘 한다. 하하.
이번에 발매하는 싱글 〈L.I.E〉를 미리 들어봤다. 전에 발표한 곡들에 타이트한 랩이 가득했다면 〈L.I.E〉는 보컬 비중이 크고 랩이 전반적으로 안정적이더라.
선공개할지 말지 고민했던 트랙이다. 〈쇼미더머니6〉 이미지가 크다 보니 대중은 내가 랩 하는 모습을 기대할 테니까. 그런 점에 대해서는 충족을 못 시켜줄 수도 있다. 대신에 페노메코라는 사람의 음악성은 알 수 있는 곡이다. 지코가 처음으로 준 비트라서 개인적으로 욕심을 많이 낸 곡이거든. 그리고 안정적이고 싶었다. 기를 쓰고 덤비는 트랙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장 나다울 때 만든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늦어진 측면이 있다. 인생이 바뀌다 보니 정신도 못 차리겠고, 계속 들떠 있는 상태였거든. 안정을 취할 수가 없더라. 어찌 보면 안정을 취하고 싶어 만든 곡일 수도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보컬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내 스타일을 비트에 가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음악이든 그것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내 목소리를 넣어야 한다고, 그래야 더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있다고 믿거든. 내가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치를 깨본 셈이다.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최근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음악이 하드웨어 때문에 막히면 안 되니까.
사실 보컬까지 겸비하는 게 요즘 힙합의 트렌드다.
맞다. 트렌드를 항상 신경 써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예전부터 나는 그런 그림을 그려왔다. 내 음악 대부분이 랩과 멜로디가 혼용돼 있다.
랩에도 멜로디가 묻어 있다. 난 그게 페노메코의 희소성이라고 본다.
알아줘서 감사하다. 내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소리일 수도 있어 은근히 신경 쓰인다. 요즘에는 호의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아져서 하고 싶은 걸 편히 하고 있다.
‘L.I.E’ 가사를 보면 애인에게 바쁘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계속 한다. ‘눈감아줘 이번 달까지만’이라고. 경험담인가?
물론이다. 만약 전 여자친구가 듣는다면 분명 알 거다. 가사만 보면 내가 쓰레기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미화하거나 거짓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싶었다. 가사는 3단계로 나뉘어 있다. 처음에는 권태로운 마음을 부정하면서 노력하고 두 번째는 서서히 지쳐간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솔직해진다. 정말 딱 그랬다. 지코가 항상 나한테 “너는 나이스 가이 콤플렉스가 너무 심하다”고 한다. 늘 부정했는데,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져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인정하게 되더라. 그래서 곡에 더욱 솔직한 모습을 담고 싶었다. 나이스 가이 말고 페노메코 그 자체 말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이성과 몰래 연애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던데? 그럼 나쁜 게 아니지 않나? 관계의 권태는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다.
맞다. 그리고 일반인의 연애가 아니라 음악을 하는, 랩 하는 남자와 여자친구 얘기다. 래퍼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L.I.E〉 이외에도 올해 다양한 활동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2월 말쯤에 싱글 곡을 하나 더 낼 예정이다. ‘L.I.E’와는 달리 타이트한 랩과 자전적인 이야기로 채운 곡이다. 또 일본에서 공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아나 정체성이 상당 부분 일본에서 형성됐거든. 일본어로 랩 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실제로 개인적인 데모 작업에는 일본어로 랩 한 게 많다. 일본에서도 싱글을 내보고 싶고. 지금 당장 준비하는 것들이 마무리된다면 차근차근 준비해나갈 예정이다.
이달의 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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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엑스엑스텐타시온 〈A GHETTO CHRISTMAS CAROL〉
절도 및 폭행죄로 수차례 교도소를 들락날락한 텐타시온이지만, 그의 음악은 추천해야겠다. 근래 우울함, 불안함, 광기를 이만큼 잘 표현한 래퍼가 또 있을까? 로파이 비트에 랩과 보컬이 혼재되어 있다. 비트만큼 플로와 가사가 거칠다. ‘날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윤리’와 ‘제도’를 뛰어넘는 자유분방함. 교도소 출소와 친구의 죽음을 직면한 뒤 만든 첫 정규 〈17〉은 개인적으로 꼽는 ‘2017년 올해의 앨범’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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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EP2〉
현재 한국에서 가장 힙한 뮤지션이다. 지난 2017년 11월 27일 BBC가 발표한 ‘2018년 기대되는 아티스트’로 선정, 피치포크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얼마 전 홍대 핸즈와 이태원 콘트라 클럽에서 공연했다. 누구는 예지의 음악을 ‘힙’하다고, ‘멜랑콜리’하다고 한다. 나는 변덕스럽지만 사랑스러운 페르시안 고양이랑 노는 기분이라 말하고 싶다. 애교도 ‘밀당’도 분노도, 특유의 감각과 재치, 그루브로 담아내거든.
재키와이 〈Anarchy〉
청춘의 허무와 몽환, 그 나른함을 이야기하던 재키와이가 이번엔 여성 주체로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난 인간 창녀도 성녀도 아니네’를 시작으로 현시대의 남성 중심적 윤리와 제도로부터 탈피하고 나아가 아나키스트로 거듭나는 과정을 앨범에 담았다. 흥미로운 건 앨범 전체가 기독교 성경의 테마와 섞여, 의미가 은유적 차원으로 상승한다는 사실. 이로써 재키와이는 확실한 ‘컨셔스’ 래퍼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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