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로 기술력과 장인 정신을 꼽는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격차는 포스트모던 경쟁력이다. 〈조선일보〉 선우정 기자는 2009년 저서 〈일본, 일본인, 일본의 힘〉에서 ‘포스트모던 일본과 모던 한국’의 간격을 단순 명료하게 설명한다. “한국 정부가 수도 이전과 대운하 건설 등 토목국가적 약속을 할 때, 일본 정부는 ‘문화국가’ ‘환경국가’의 비전을 선보였다. 그 결과 일본은 지금 21세기 세계 산업을 끌어갈 환경 기술의 90% 이상을 쏟아내고 있으며, 패션, 건축, 팝아트 등 상위 문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등의 오락 문화, 그리고 초밥, 가이세키, 라멘 등의 식문화를 골고루 아울러 ‘쿨 재팬(Cool Japan)’이라는 세련된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라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 문학, 문화, 비판 이론 분야에서 모더니즘이 대표하는 이성, 정형성, 실증주의에 대한 회의를 표현하는 사상적 조류다. 사회과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도입한 대표적인 학자는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다. 1997년작 〈Modemization and Postmodernization(근대화와 탈근대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탈물질주의로 정의하고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개인의 자유, 개성, 자아실현, 삶의 질 등 탈물질적 가치에 주목한다. 탈물질주의에 기초한 포스트모던 경제는 가치 지향적 소비와 생산 활동을 중시한다. 소비를 통한 질 높은 삶, 문화적 체험, 정체성, 사회정의의 추구, 친환경 상품과 유기농 먹거리의 대중화, 공유경제의 일상화, 골목 상권의 부상 같은 움직임은 모두 탈물질주의 트렌드를 반영한다.
포스트모던 경제 선진국, 일본
1980년대부터 일본은 포스트모던 문화 현상으로 사회가 변할 것을 감지하고 대응에 나섰으며, 덕분에 상당히 경쟁력 있는 포스트모던 경제를 이뤄냈다. 한편 일본의 포스트모던 경쟁력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2000년대 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일본 경제 잡지 〈다이아몬드〉의 2001년 기사를 인용하며 “포스트모던적 변화로 인해 소비자 그리고 소비에 대한 개념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소비자는 언제나 행위자(Performer)로서 행동하며 항상 주체성과 의미를 찾고 구현하기 위해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 소비자와 구분된다. 그러므로 이에 맞춘 포스트모던 마케팅이 필요하다”라고 제안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제조업 중심이지만, 서비스업, 문화산업, 창조산업 등 탈물질주의적 산업도 강하다. 컨설팅 기업 PWC는 2010년 일본의 연예미디어 산업 시장 규모가 2천억 달러에 달하며 이는 3백63억 달러 규모인 한국 시장의 5.5배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소개한 바 있다. 또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측정하는 국가 브랜드 인덱스도 2014~2015년에 일본을 세계 1위로 꼽았다(한국은 20위다).
선우정 기자의 지적처럼 모던 경제의 중심이 제조업이라면 포스트모던 경제에서는 고령산업, 환경산업, 문화산업 등이다. 1980년대부터 이미 여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온 일본은 단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상태다. 그리고 2010년 이후에는 탈물질주의 소비문화를 겨냥한 라이프스타일 산업에 투자해 혁신을 선도한다. 특히, 유통 시장은 ‘모든 기업이 라이프스타일 기업이다’라고 주장할 만큼 라이프스타일 제안형 매장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츠타야, 무인양품, 빔즈 등 새로운 생활 문화를 제안하는 혁신적인 기업을 배출하는 라이프스타일 산업 선진국이 됐다. 특히, 츠타야는 출판업계 위기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신기한 서점이다. 1983년 오사카 히라카타에 처음 문을 연 츠타야는 현재 일본 전역에 1천5백여 개 매장을 내고 5천만 명에 가까운 회원을 모집하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이요. 저희는 책을 파는 게 아니고 라이프스타일을 팔거든요.”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을 운영하며,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의 대표이기도 한 마스다 무네아키는 자신들의 성공 비결로 라이프스타일을 꼽았다. 전통 서점은 잡지, 단행본, 문고본 등 유통업자 입장에서 편리한 진열 방식으로 기계적인 판매처 역할에 불과했다면, 츠타야는 고객 입장에서 테마별로 모든 상품을 재분류해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여행 테마의 코너에서는 모든 관련 서적과 CD, DVD를 비롯해 가전제품이나 기타 여행 관련 상품까지 한꺼번에 제공해 여행자가 원스톱으로 필요한 준비를 마칠 수 있다. 테마별로 고객이 즐기고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사업의 본질이다. 기존 서점과는 업에 대한 접근 자체가 다른 것이다.
츠타야 서점이 주도하는 라이프스타일 혁명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최근 오픈한 하이엔드 쇼핑몰 긴자식스다. 긴자의 명성대로 명품 숍들이 쇼핑몰 내에 대거 입점했지만 라이프스타일 쇼퍼의 눈길을 끄는 매장은 단연 6층 전체를 사용하는 츠타야 서점이다. 한편 가전 기업 파나소닉도 츠타야 서점과 비슷한 변신을 보여준다. 파나소닉 센터 오사카점은 ‘숲속처럼’ ‘친환경’ ‘1인 가정’ ‘신혼을 위해’ 등 테마별로 공간을 새로 구획했고, 각 분위기에 맞는 가전제품들을 진열했다. TV는 TV끼리, 냉장고는 냉장고끼리, 세탁기는 세탁기끼리 모아두고 제품을 팔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소비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따라 공간을 꾸밀 수 있도록 라이프스타일 판매로 업의 본질을 바꾼 것이다.
모던 경제의 중심이 제조업이라면 포스트모던 경제에서는 고령산업, 환경산업, 문화산업 등이다. 1980년대부터 이미 여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온 일본은 단연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상태다.
정체성도 포스트모던 자산이다
일본은 또한 지역 문화 정체성이 강한 나라다. 세계화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지역 문화 정체성이 포스트모던 경쟁력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교토,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의 지역 도시는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적 글로벌 기업을 육성한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 도시다. 그중 교토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이자, 일본 10대 전자부품 기업 중 6개를 보유한 과학기술 도시다. 교토가 지방 도시로서 도쿄에 버금가는 첨단 산업을 개척한 배경에는 지역 문화에 대한 교토의 남다른 자부심이 깔려 있다. 교 료리(요리), 교 야사이(야채), 교 스시, 교 야키(도자기) 등 교토 시민은 의도적으로 교토 상품 이름 앞에 ‘교’ 단어를 붙이고 프리미엄 브랜드로 만든다. 천황에 진상한 제품을 만들어왔다는 장인 정신과 자부심, 다른 지역 기업과 활발히 협력하는 오픈 마인드, 거기에 신생 기업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후원 정신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첨단 산업을 육성해왔다.
교토의 대표적 전자부품 생산 기업 교세라도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했다. 1959년 교세라를 세운 이나모리 회장은 창업 초기 도쿄 지점을 통해 중앙 시장 진출을 모색했으나, 신생 기업이었던 탓에 판로를 개척하기 힘들었다. 그는 1960년대 초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려 미국으로 무작정 떠나 당시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이던 페어차일드와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도쿄의 기업도 뒤를 이어 교세라와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성공하면 일본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건축, 디자인, 미술에서 현대적 미니멀리즘으로 표현되는 ‘일본다움’ 즉 일본적 가치를 강조하고 일본적 디자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벌써 글로벌 스탠더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혹자는 일본을 두고 오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수주의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딱한 나라라고 말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세계가 인정하는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첨단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한편 최고 수준의 서비스업과 문화산업을 보유한 포스트모던 경제의 모델이기도 하다. 한국이 일본과 선진국 수준의 문화산업과 창조산업을 원한다면, 자기표현, 삶의 질, 정체성 등 그에 필요한 탈물질주의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법제도 등 물질주의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포스트모던 경제로 진입한 일본을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최대 난제인 ‘포스트모던 재팬, 모던 코리아’의 격차를 좁히고 라이프스타일 강국으로 도약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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