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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On December 20, 2017





남색 체크 수트·흰색 셔츠·하늘색 타이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1  배우 이병헌 + Charisma 

2017년, 스크린에서 마주한 수많은 얼굴들이 스친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이병헌의 얼굴이 오래도록 떠나질 않는 한 해였다. 〈싱글라이더〉와 〈남한산성〉을 통해 섬세한 연기의 정점을 찍은 그는 나지막한 말 한마디와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만으로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카리스마’가 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스크린에 이병헌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미 관객은 충분히 그에게 압도됐다. 조그마한 움직임과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에도 감정을 불어넣을 줄 아는 연기 백단의 카리스마란 이런 거다. 12번째 ‘A-Awards’, 올해의 배우로 이병헌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 번째 에이어워즈 수상이다. 너무 자주 보나, 우리?
하하. 두 번째로 수상했을 때 〈아레나〉 기자가 나한테 그랬다. ‘두 번째 수상은 처음’이라고. 그런데 이번에 세 번째로 받음으로써 기록을 또 갱신했다. 이렇게 〈아레나〉가 주는 상을 받을 때마다 내가 한 해 동안 열심히 연기하고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뿌듯하다.

나에게 ‘2017년 극장에서 보기 잘한 영화’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싱글라이더〉를 꼽겠다.
정말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거 같다. 물론 나 역시 되게 주관적인 판단으로 내 취향에 따라 출연한 작품이지만, 사실 상업적으로 엄청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라는 생각은 했다. 근데 생각보다 아주 많지 않아서 약간 의외이긴 했다.

어떤 기사를 보니까 이병헌이 꼽은 인생 영화로 〈싱글라이더〉를 언급했다던데, 정말인가?
아, 영화 홍보할 때 임팩트 있으려고 한 얘기다. 하하. 좀 과장되게 얘기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시나리오 처음 읽었을 때 ‘우와’ 했다. 내가 영화를 26년 이상 하면서 ‘이렇게 완벽한 시나리오가 또 있을까?’ 생각했던 작품이 몇 있었다. 예를 들면 〈공동경비구역 JSA〉도 그랬고 〈남한산성〉도 그중 하나였다. 시나리오가 재밌긴 하지만 빈틈이 조금씩 보여서 ‘찍어나가면서 보완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함께 만들어나가는 작품들이 있다. 반면 시나리오 단계에서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어미 하나 고치고 싶지 않은 영화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내게는 〈싱글라이더〉가 그랬다.

그렇게 선택한 〈싱글라이더〉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았다. 아마 연기를 26년 넘게 해오다 보면 이런 일이 있었을 거다. 요즘엔 이런 일들을 맞닥뜨릴 때 어떤 생각을 하나?
예를 들면 〈번지 점프를 하다〉 때가 그랬다. 영화를 완성하고 처음 기자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에서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이 많겠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긴장감이 컸다. 기자들의 평이 굉장히 좋았음에도 내 기대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작품이 됐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5년이 흐르고, 10년 흘렀는데도 다른 배우들의 인터뷰에서 〈번지 점프를 하다〉가 언급되더라고. 참여했던 배우로서는 또 다른 행복이다. 개봉 당시에 큰 사랑과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훗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영화의 진가를 알아준다는 것이 참 기쁘다. 그래서 〈싱글라이더〉의 기대 이하의 성적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또 언젠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달콤한 인생〉도 엄청 흥행한 영화가 아닌 거 알고 있나? 당시 1백20만 명 정도 들었나 그랬다.

정말? 그 영화는 대한민국에서 안 본 사람이 없을 만큼, 한국 누아르를 얘기할 때 기념비적인데?
그렇지. 특히나 남자 팬들은 10번도 넘게 보고 그러는 영화인데, 이것만 봐도 당시 평가가 절대적이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말, 2016년 초에는 〈내부자들〉로 강렬한 이병헌을 만나봤다. 2017년에는 힘을 빼고 연기하는 이병헌을 볼 수 있었다.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삼키는 연기가 배우 입장에서는 자칫 밋밋하거나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
그것은 정말 배우의 개인적인 취향인 거 같다. 아주 선이 굵고 움직임이 크고, 감정의 폭이 큰 연기를 즐기는 배우가 있다. 나는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연기가 더 긴장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훨씬 더 몰입해서 연기를 즐기게 된다.

〈싱글라이더〉를 극장에서 본 것만으로도 눈치 챘겠지만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2000년에 〈번지 점프를 하다〉 같은 영화에 선뜻 출연한 안목을 믿는 편이다. 이병헌 정도의 배우가 되면 개인의 취향이 작품 선택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나?
예전부터 기준은 늘 한 가지다. ‘이 작품이 내 마음을 움직이느냐’는 거다. 내가 동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다. 물론 여러 작품 중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주변의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된 경우도 아주 간혹 몇 작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내 마음이 움직이는 영화들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되게 단순하다. 딱히 이유가 없다. ‘어우, 이거 진짜 좋다.’ 그 마음 하나다. 단순 명료하고 명쾌하다. <싱글라이더>까지 찍고, 인터뷰할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그거다. “아니 대체 작품 고르는 기준이 뭐예요? 할리우드 가서 〈매그니피센트 7〉 찍고 〈내부자들〉 하다가 갑자기 왜 이런 저예산 영화를 찍어요?” 난 오히려 그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 ‘몇만 달러 이상의 예산이어야 한다’는 게 작품 선택의 기준이 될 순 없잖아. 이야기가 자기 감정을 건드렸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게 맞다. 예산이나 배급사를 따지는 건 약간 순서가 뒤바뀐 거 같다.

대한민국 신인 감독들에게 희망적인 발언 같다. 예산과 규모가 작아도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을 써오기만 하면 기꺼이 출연할 것 같은데, 어떤가?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입봉 감독님들과 작업을 많이 했다.(웃음) 이제는 나보다 나이 많은 감독님이랑 작업하면서 의지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하하. 농담이다.

1월 개봉 예정인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은 의상비가 별로 들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대부분 트레이닝복만 입고 나온다고?
정말 편했다. 머리 하는 시간도 짧았고, 그런 측면에선 편했지. 최근에 출연한 작품들과 너무나 톤이 달랐다. 대학로에서 전단지 돌리는 일을 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건너편 건물에 숨겨놓고 ‘큐’ 사인을 받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건네줬다. 대부분이 나를 못 알아보더라. 워낙 편안한 차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전단지만 쳐다보지 전단지 건네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더라고. 오히려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다가온 적은 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트레이닝복 차림에 전단지 돌리는 이병헌은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 감독은 대체 뭘 보고 그 역할에 이병헌을 캐스팅한 건가?
심지어 최성현 감독님도 “내가 시나리오를 직접 썼지만 이병헌이 캐스팅될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고 하더라. 감독은 〈역린〉 시나리오를 쓴 작가 출신이다. 그가 직접 “이병헌씨가 이 역할을 한다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썼다”고 하더라. 어떤 면에선 좀 섭섭하기도 하고. 하하.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 생각이 났다는 거다. 최근 내가 출연한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떠올릴 수 없었을 텐데, 그것도 좀 신기하더라. 프로듀서가 자꾸만 내 얘길 해서 감독이 ‘물론 이병헌이 수락해주면 너무 행복하겠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고 했다더라.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출연을 결정한 건가?
일단 시나리오가 나에게 왔고, 다 읽고 나서 먼저 감독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감독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더라고. 정작 처음 만난 자리에선 거의 말을 안 하더라.

나 같아도 말이 안 나왔을 것 같다. 긴장되니까.
그렇더라고. 나중에 들어보니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긴장했던 순간이라고 하더라. 하하.

흔히 배우에게 ‘파격적이다’라고 표현하지 않나. 〈내부자들〉에서 ‘안상구’ 역할도 파격이었고, 〈싱글라이더〉 같은 작은 영화에 출연한 것도 파격이었다고들 한다. 정작 본인에게 파격이란 어떤 의미인가?
〈내부자들〉 초반에 캐릭터를 설정할 때 감독과 상의를 많이 했다. 원래는 팔도 없고 발도 없는 설정이었다. 극 중에서 조상무가 창고에서 부하한테 “여부터 여까지 자르고, 저도 자르고” 하잖아. 진짜로 여기도 자르고 저기도 자르는 거였다. 근데 ‘과연 내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팔다리 없이, 액션 신 등을 소화할 수 있을까?’ 싶더라. 그래서 한참 논의 끝에 ‘팔 하나만 없는 걸로 가자’고 했지. 극 중에서 헤어스타일도 변화무쌍하잖아. 이런 것들이 나로서는 파격이긴 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 깊이 느껴지는 ‘파격’이란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 감정 상태가 정말 새로운 것이다. ‘이 감정은 대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이런 감정이 어디서 기인하고 왜 주인공은 이 감정을 가지고 영화를 끌고 갈까?’를 이해하기 힘들 때, 난 그걸 ‘파격’이라고 느낀다. ‘나도 이렇게 가까스로 어렵게 이해했는데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을까?’ 싶은 거지. 예를 들면 영화 〈중독〉의 캐릭터가 나에게는 파격이었다.

상반기에 김은숙 작가 드라마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근데 사실 나는 그보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병헌리’를 더 보고 싶다. 〈매그니피센트 7〉에서 정말 멋있었는데.
나에게도 엄청 의미 있는 작품이다. 드라마가 올 중반까지 잡혀 있으니까 스케줄 정하기가 너무 힘들다. 내 입맛에 맞고 내 스케줄에 맞춰서 기다려주는 할리우드 작품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다. 에이전트하고는 미국에 갈 일 있을 때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청춘 스타 이병헌부터 지금의 이병헌을 보기까지 관객도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아마 할아버지가 된 이병헌도 극장에서 볼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배우 다음 작품 왜 안 찍지?’ 이렇게 기다려지고 궁금한 배우가 있지 않나. 관객이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배우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왕이면 그냥 할아버지 말고, 멜로나 액션도 할 줄 아는 할아버지 배우가 되면 더 좋겠다.

그래야 관객이 나를 계속해서 기대하고 기다려주겠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 ARENA Says
    지난 26년 동안 한 번도 이병헌의 작품 취향과 안목에 실망한 적이 없다. 한국 영화계의 크고 작은 족적 속에 늘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중 소위 말하는 ‘인생 영화’를 꼽아보면 아마 이병헌의 출연작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 JSA〉 〈번지 점프를 하다〉 〈달콤한 인생〉 〈내부자들〉 이 중에 한 편은 ‘인생 영화’라 꼽아도 무리가 없을 거다. 드라마는 또 어떻고. 〈아스팔트 사나이〉 〈올인〉 〈아이리스〉 등. 그의 필모그래피를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그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건 일단은 무조건 믿고 보게 된다는 것. 워낙 연기를 잘하는 이유도 있지만 작품을 고르는 취향과 안목이 꽤 괜찮기 때문이다. 2017년 우리는 ‘힘 빠진 연기’를 하는 이병헌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 〈싱글라이더〉에서는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 한 가장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연기해냈고, 〈남한산성〉에서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묵직한 감정을 섬세한 목소리 톤의 변화로 표현해냈다. 이제는 안다. 이병헌이 카메라 앞에서 천천히 걷고, 차분히 화면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음을.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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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셔츠·체크 패턴 회색 수트 모두 엠포리오 아르마니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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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수 오혁 + Style 

혁오는 지난 4월 첫 번째 정규 앨범 〈23〉을 발표했다. 〈23〉은 그동안의 작업에 마침표를 찍는 앨범이었다. 타이틀 곡 ‘톰보이’가 음악 차트를 석권했고, 해외 팬들이 따라 불렀다. 혁오는 세계로 떠났다. 아시아와 북미, 유럽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했고 매진을 기록했다. 겨울이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온 혁오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는 방법’을 고민했다. 혁오의 오혁을 만났다.

지난 2017년은 어떻게 보냈나?
상반기는 앨범을 만드는 데 다 썼고, 하반기에는 그 앨범으로 투어하며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한 해가 갔다.

지난 4월 첫 번째 정규 앨범 〈23〉을 발표했다. 정규 앨범이 나오는 데 2년이 걸렸다. 2년 동안 바라본 세계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내가 바라본 세계는 그대로였고, 처음 우리가 입지를 다지면서 변한 것들에 적응하며 지냈다. 그 시기를 되돌아보면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처음 접하는 것들이라 설렘과 동시에 낯섦에서 두려움도 느꼈다. 설렘과 불안은 함께하는 것 같다.

설레면서도 불안한 것. 그건 행복한 자극일까?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다. 앨범을 만드는 2년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불안이 닥쳐왔다. 부담이 컸고, 그 당시에는 즐기지 못했다. 두 번은 못 할 것 같다.

‘톰보이’가 공중파 음악 방송과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석권했다. 특히 공중파 음악 방송은 아이돌 음악이 주로 1위를 하는 곳이라 의미가 깊다. 세대가 그리고 시대가 변화한다고 느꼈다.
우리나라 음악 시장은 기형적이다. K-팝은 한국 대중음악인데…. 대중음악은 대중이 좋아하는 모든 음악을 지칭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 1위 하고, 상을 받는 게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스템에 아쉬움도 느낀다.

오혁을 인터뷰한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오혁은 청춘의 아이콘이라고 하더라.
운이 좋았다. 타이밍이 적절했다. 우리나라에 유스 아이콘은 항상 있었지만 유스라는 키워드가 부각된 것은 근 몇 년이라고 생각한다. 유스 키워드가 부각되는 시점에 우리 음악이 유스의 양면성을 이야기했고, 자연스럽게 맞물린 것 같다.

유스 그러니까 청춘은 반짝거림과 불안함이 공존한다. 그렇다면 오혁을 찬란하게 해주는 것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둘 다 음악인 것 같다. 내가 부른 음악을 통해 찬란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 음악을 만드는 동안 불안함이 뒤따른다. 찬란함보다 불안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찬란했다고 인식한다.

2017년도 마찬가지였나?
2017년은 달랐다. 첫 앨범에 대한 부담이 유독 컸다. 밴드에게 첫 앨범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정규 앨범이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 부담은 떨쳐냈나? 아니면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것인가?
고민이다. 주변의 음악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더라. 부담을 놓으면 어느 정도 편해지지만, 편해지면 여유가 생기고, 내가 얻고자 하는 것 중 포기해야 하는 부분을 고민하는 시간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 음악 수준이 낮아질 것 같다. 그래서 부담을 놓지 못한다. 어떻게든 고민하고 싸워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무시할 수 없기에 아직 고민 중이다.

빈티지한 색감의 체크 패턴 수트 엠포리오 아르마니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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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보이’의 노랫말이 참 예쁘다. 영감을 받은 것이 있나?
여러 가지다. 주변에서 일어난 일, 내가 겪었던 것들에서 얻는다. 가사나 멜로디는 소리보다 비주얼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영화를 많이 본다. 예전에는 책을 읽었는데, 책은 오래 읽어야 하지만 영화는 바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음악을 만들 때 대상이 확실해야 한다.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면 작업을 못 한다.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들었을 때의 기분, 계절감, 상황 등 세세한 것들을 정하다 보면 하나의 신(scene)이 만들어진다. 그런 신을 머릿속에 구현하기에는 영화가 도움이 된다.

〈23〉에는 젊은 작가들이 여럿 참여했다. 그들과 꾸준히 작업하고, 다른 뮤지션과의 협업도 지속하고 있다. 오혁은 신진 예술가들과 무리를 이뤄 전에 없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내는 듯 보인다. 일각에서는 그것을 새로운 물결로 받아들인다.
그 점을 염두에 두었다. 어렸을 때 좋아한 뮤지션들은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대화를 하고 영감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밴드를 처음 시작했을 때 다다이즘 친구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혁오의 아트 디렉팅을 해주는 노상호 작가와 참여 작가들을 어떻게 선정할지 고민했다. 현대 미술 작가들 중에서 거장을 제외하고 10년 뒤 잘될 것 같은 사람들, 정확히는 나보다는 한 세대 위인 분들과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3〉은 10년 뒤 잘될 것 같은 작가들과 협업해 만들었다.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나는 먼저 다가가는 성향은 아니다. 그런 성격인데도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진짜 행운이었다.

그들이 오혁에게 매력을 느낄 만큼, 오혁이 노력했을 것이라고 본다. 작가들 또한 오혁에게서 영감을 받았을 테고.
계속 그렇게 영감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함께 작업하는 작가들과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지금처럼 서로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의 작업에 대한 호감으로 시작됐다. 여러 부담 요인 중 하나이지만, 내 음악이 별로면 함께 작업하는 작가들이 실망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더 노력하게 된다. 지금은 시너지를 발휘하는 단계다. 우리가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다. 앞으로도 그 상태를 지속하면 좋겠다. 그게 이 관계의 목표다.

지난 5월부터 월드 투어를 했다. 아시아의 주요 도시들과 미주 지역, 유럽도 다녀왔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을 것 같다.
많이 있다. 미국 투어를 할 때는 감기에 걸렸다. 투어 중반이었는데 진짜 힘들었다. 이마가 끓는데도 공연을 했다. 그곳이 아마 보스턴이었을 거다. 혁오 탄생 3주년이라는 축하도 받았다. 북미 투어 때는 아시아인 비율이 절반은 됐는데, 유럽 투어는 동양인이 없어서 신기했다. 아시아도 처음 가본 도시들이라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니 외국 관객들이 ‘떼창’을 하더라. 공연마다 ‘떼창’을 찍는 이유는 뭔가?
처음에는 장난으로 찍어서 올렸다. 다음 공연 관객들이 우리는 왜 안 찍냐고 하더라. 그때부터 꾸준히 찍어서 아카이브를 했더니 50개 클립이 모였다. 이 영상들로 무언가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만 잘라도 노래 한 곡이 나온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해외 혁오 팬들을 보면 소위 말하는 유튜브 세대, 1990년 이후 태어난 세대로 보인다. 그들은 국적이나 언어가 달라도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
맞다. 그래도 다른 나라여서 차이점이 있다. 유럽은 얌전하게 놀 것 같아서 공연 전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오히려 가장 에너지가 넘치더라. 북미는 기대만큼이나 열정적이었고, 동남아시아는 어떤 피드백이 나올지 몰랐는데, 매우 잘 놀더라. 태국은 맥주를 버킷에 담아 마시는 게 유행이다. 그래서인지 진짜 잘 놀아서 굉장히 재미있었다. 일본은 특유의 정서가 있다. 곡과 곡 사이 잠깐 침묵하는 중에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린다. 관객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그런 차이가 있었다.

2017년 자극받은 것은 무엇인가?
투어다. 월드 투어를 하면서 가능성을 보았다. 투어를 하면서 이런 관객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넘어 다른 곳에도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온라인에서 해외 팬들의 반응을 보는 것과 해외 팬들을 직접 대면하고 에너지를 느끼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자극받은 것 같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처음 가본 나라의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노랫말을 따라 부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확실히 자극은 되겠지.
SNS를 하다 보면 해외 팬들이 댓글을 남긴다. ‘너희 음악 좋다’ ‘나는 런던에 사는데, 너희가 공연하러 왔으면 좋겠다’ 이런 글들이 종종 있다. 글을 읽는 것과 실제로 해외 관객들을 대면하고 함께 노래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신기하고 자극이 된다.

연말 콘서트의 제목이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 방법이 뭔가?
모르겠어서 제목으로 썼다.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23〉 앨범을 준비하면서 고민했다. 〈20〉과 〈22〉 앨범에서 고민한 정서를 이미 사람들이 소비해 새로운 내용으로 앨범을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정규 앨범이 없으니까 지금까지 해온 것의 마침표를 찍는 앨범을 내야 할지 고민했는데, 후자를 택했다. 마침표를 찍고 더 새로운 것을 해보자. 그때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고, 나도 가끔 행복할 때가 있는데 그럼 절대적인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했다. 행복의 기준치란 어느 정도이고, 어디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지. 그래서 다음 앨범에는 행복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는데, 사람이 쉽게 안 바뀌더라.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는 과정을 찾아가보자는 취지에서 공연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어떤 뮤지션,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
재미있는 것을 멋지게 오래 하자가 궁극적인 목표다. 계속 재미있을 수는 없고, 오래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내가 이 세계를 지켜내면 성공했다고 본다. 2018년에 새 앨범이 나올 것 같은데 마음에 드는 앨범이 됐으면 좋겠다. 투어도 할 것 같은데 여러 도시에서 재미있는 공연을 했으면 하고. 그런 목표가 있다.

  • ARENA Says
    오혁은 새로운 물결이다. 잔잔한 시대에 오혁이 일으킨 물결은 청춘을 동하게 만들었다. 몇 해 전 유스가 떠올랐고, 유스에 사람들은 주목했다. 찬란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간직한 유스 문화가 유행처럼 번졌고,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곡이 등장했다. 혁오다. 혁오의 오혁은 청춘의 양면성을 노래했다. 시대는 오혁을 주목했다. 그가 청춘의 아이콘처럼 반짝였고, 패션 브랜드는 오혁과 협업을 시도했다. 오혁은 품이 큰 옷을 입었고, 다른 청춘들은 오혁처럼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진작가들은 오혁과 함께 작업했고, 해외 유명 패션지에서는 오혁을 표지로 삼았다. 작가들은 오혁을 탐냈고, 오혁은 자신의 크루를 이루었다. 데뷔부터 함께한 다다이즘을 비롯해 〈23〉 앨범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영감을 주고받았다. 오혁을 중심으로 패션, 사진, 예술가들이 파문처럼 모였다. 오혁은 10년 뒤 잘될 것 같은 작가들이라며 그들과 성장을 도모한다. 이것이 오혁의 스타일이다. 오혁이라는 새로운 물결은 한국을 넘어 세계를 출렁이게 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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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입은 셔츠·남색 캐시미어 재킷·울 소재 아우터·회색 울 팬츠·데저트 부츠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안에 입은 셔츠·남색 캐시미어 재킷·울 소재 아우터·회색 울 팬츠·데저트 부츠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3  영화감독 장훈 + Passion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단편적인 소감을 나누는 일은 무척 쉽다. 하지만 영화 속 실제 역사를 바로 알고 싶다고 마음을 먹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는 천만 명의 관객 중 하나가 됐다. 관련 자료를 읽어보고,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조각을 맞춰갔다. 그리고 이 뜨거운 현상 뒤에 장훈 감독이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서 12명 정도의 감독만 입성했다는 ‘천만클럽’ 멤버가 됐다. ‘천만 감독’이라는 애칭, 부담스러운가?
영화 끝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질 않아서, 실제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익숙해지기 힘든 애칭이다.(웃음)

어쨌거나 〈택시운전사〉의 빛나는 성과 덕분에 에이어워즈를 수상하게 됐다. 그동안 크고 작은 상을 많이 받아봤겠지만, 이번 수상은 남다르지 않나? 상 이름도 ‘패션 Passion)’이고.
확실히 여느 시상식과는 다른 게, 영화감독이 수트를 빼입고 메이크업까지 해가며 상 받을 일이 별로 없다. 하하. 내가 배우였다면 사진도 멋지게 잘 찍어서 서로 고생할 일이 없었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옷을 차려입는 행위 자체가 주는 기분은 특별하다. 2017년의 나에게도 기념이 될 것 같다.

최근에 또 하나의 상을 받지 않았나? ‘2017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이란 시상식에서 ‘진실’이라는 상을 탔다고?
환경재단에서 문화, 사회, 진실 등 여러 분야의 다양한 인물을 선정해 주는 상이다. 〈택시운전사〉로 상을 준다기에 처음엔 ‘문화’ 부문인 줄 알았는데 ‘진실’ 부문이었다. 트로피도 초록색 초였다. 이 영화가 세상을 밝혔다고 생각해줘서, 여러 가지로 인상적이었다.

〈택시운전사〉의 흥행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영화를 통해 젊은 세대가 1980년대 우리 근현대사를 새삼 알게 됐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많은 관객이 봐준다는 건 말할 것도 없이 기쁜 일이다. 그걸 떠나 〈택시운전사〉는 과거에 일어났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를 다룬 영화라 어린 관객, 젊은 세대가 많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영화는 제목 그대로, 택시를 운전하는 ‘만섭’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 점이 〈택시운전사〉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로 느끼게 해준다. 관객이 ‘만섭’의 시선에 몰입되니까.
1980년에 나는 여섯 살 꼬마였다. 그러니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어렵다. 만약 이 영화가 가해자나 피해자의 입장, 그러니까 광주에 있었던 누군가의 시선으로 쓰였다면 내가 연출하긴 어려웠을 거다. 직접 그 사건을 겪은 사람만이 더 잘 그려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독일 기자와 서울에서 온 택시운전사, 두 외부인의 시각으로 광주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그때의 광주를 겪어보지 못해 잘 모르는 사람도 자연스레 그 안으로 들어가 목격하는 구조다. 나 역시 그래서 영화에 참여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관객이 만섭이란 인물에 동화돼 그와 함께 감정의 변화를 겪길 바랐다.

드레스 셔츠·수트 재킷·팬츠·실크 넥타이·검은색 벨트·오버사이즈 아웃솔이 특징인 구두 모두 엠포리오 아르마니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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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목격자〉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사진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가장 마음에 남았다. 영화에서도 후반부에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봤는데, 오히려 많은 부분을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의도한 바였나?
당시 상황은 훨씬 더 처참했다. 우리 영화는 그 상황을 모르는 관객이 볼 수 있는 수위를 선택했다. 그래서 개봉 후 두 가지 반응을 접했다. 1980년대 광주를 겪은 분들은 표현 수위가 너무 약하다고 했다. 반면 그때의 광주를 전혀 모르는 젊은 관객은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것을 보고 수위가 세다고 하더라. 나는 연출자로서 그 양 극단의 중간 정도를 택했다. 관객이 ‘만섭’을 통해 당시 상황을 감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 적어도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대해 기억하게 되는 역할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화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을 전부 다룰 순 없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관심이 생긴 관객이 더 찾아보고 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엄태구가 연기한 군인이 실화였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렇지.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두 사람을 보내주니까 오히려 더 영화 같고 설정 같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더라. 그 군인뿐 아니라 공항에서도 만약 마음먹고 힌츠페터 기자를 잡으려고 했다면 출국이 어려웠을 텐데 알게 모르게 도와준 이들이 많았던 거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거다.

이 기사가 나올 때쯤에 좋은 소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 부문에 후보작으로 출품했다고? 결과는 언제쯤 나오나?
12월 중순쯤 발표된다고 들었는데, 잘 모르겠다. 잘되면 좋겠지만, 내가 아직 거기까지 생각은 못 해봤다. 하하.

이미 해외 영화제를 통해 많이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 관객 역시 한국 관객과 비슷한 감정으로 몰입해서 보던가?
한 달 정도 해외에 나가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해서 여러 영화제를 다녔는데, 어느 나라건 관객의 반응은 비슷했다. 한국 관객에게는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의 역사인 거고, 외국 관객에게는 ‘남의’ 역사인 것. 그 정도의 차이지.

광주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 다시 말하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아직 생존해 있다. 이 영화를 만들던 1년 전의 시국을 생각하면 제작진에게도 어떤 의미로든 ‘용기’가 필요했나?
글쎄, 그냥 한 번 스쳐 지나가듯 이런 생각은 한 적 있다. 영화를 준비하던 당시 문화계 블랙 리스트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것이 영화 작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너도나도 듣던 시기였으니까. 혹시나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당분간 다음 영화를 찍지 못할 수도 있으려나? 이런 생각은 잠깐 하고 지나갔던 것 같다. 길게 생각하진 않았다.(웃음)

〈고지전〉을 끝내고 무려 6년 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한 작품 끝나고 다음 작품 들어가기까지 얼마의 공백이 가장 적당한 것 같나?
무조건 곧바로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하하. 〈고지전〉 촬영 끝날 때까지 3년 반이나 걸렸다. 그땐 되게 정신없이 했는데, 그 작품 끝내고 6년 만에 〈택시운전사〉를 개봉하고 나니 역시 쉼 없이 계속 이어나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더라.

그래서 지금 쉬지 않고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렇다. 〈택시운전사〉 후반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차기작을 결정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장영실과 세종대왕의 숨은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혹시 이러다 역사 전문 감독이 되는 건 아닌가? 잊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발굴해내는.
기회가 된다면야, 뭐. 이번 영화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바가 많다. 사실 영화 한 편으로 역사 교육을 할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다시 살펴봐야 하는 역사를 진짜 교육을 통해 제대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또 역사를 해석하는 입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진실이 하나의 의견이 될 순 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를테면 실제 벌어진 사건을 두고 “내가 보기엔 이것이 진실이야” “아니, 저것이 진실이야”라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치자. 그 사건에 대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점이 많다는 의미다. 〈택시운전사〉를 통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이 규명돼 모두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밖에 해결되지 않은 다른 역사도 재조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17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물론 내가 만든 네 번째 영화가 개봉을 했고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는 거지. 그런데 그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내 영화 사상 역대급으로 많은 관객이 영화를 봐주신 것도 새로웠지만, 그래서인지 영화를 둘러싸고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영화를 개봉하고 나면 이런저런 피드백에 무심하게 되는데, 이번처럼 여러 의견을 듣고 감상을 전달받은 건 처음이었다. 나 스스로도 특이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젊은이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어떤 위대한 감독의 작품을 보고 스스로 꿈을 키웠듯, 자신이 만든 영화로 누군가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거나 혹은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 좀 낯간지러운 얘기지만 내가 만든 영화 한 편으로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영화에 그런 힘이 있을까?
그게 참 어렵다. 한 편의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어떻게 보면 주제넘은 생각이지. 영화는 현실의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매체다. 그것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할 수도 있고, 은유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내 영화가 나쁜 영향은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하. 세상이 지금보다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 영화가 크건 작건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 그렇지만 과연 영화 한 편에 얼마만큼이나 그런 바람을 담아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가 현상과 유행을 만들어내는 건 맞다.
굉장히 대중적인 파급력이 있는 매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공동의 관심을 만들어내거나 끌어낼 수는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현실을 바꾸는 건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몫이다. 이거야말로 낯간지러운 얘기일 수 있는데, 그래서 관객이 진정한 주인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웃음)

창작의 열정이 떨어졌다 싶을 때, 열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꼭 다시 보는 영화가 있나?
질문을 받자마자 떠오른 영화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살다〉. 관공서 시민과에서 30년간 근무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와타나베의 이야기다. 유한한 시간 위의 삶 대신, 의미와 목적 위의 삶을 택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와, 정말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 ARENA Says
    묵직한 신뢰감을 주는 연출가. 2008년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한 이래 〈의형제〉(2010), 〈고지전〉(2011) 그리고 〈택시운전사〉(2017)까지. 단 네 편의 영화로 너무도 든든한 수식어를 얻게 된 장훈 감독은 2017년 그 어느 때보다 꽉 찬 한 해를 보냈다. 2017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유일하게 ‘천만 관객’이란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보다 극장 밖에서 더 많은 화제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장훈 감독은 특유의 통찰력과 무게감으로 우리를 1980년 5월의 광주에 데려다놓는다. 그는 〈아레나〉 ‘A-Awards’를 수상하기 며칠 전, ‘2017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시상식에서 ‘진실’ 부문 상을 받았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진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역사적 무게에 짓눌릴 법도 한데, 장훈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침착하게 극을 완성해냈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진실 한 조각을 뜨거운 열정으로 찾아낸 그에게 〈아레나〉는 ‘Passion’ 부문 상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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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소재 타이·포켓 스퀘어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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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방송인 서장훈 + Confidence 

방송이라는 새 코트에 선 이 남자는 치열하게 달리고 격렬히 욕심 부리던 선수 시절과 사뭇 다른 플레이를 펼친다. 방송 욕심은 없지만 책임감은 강해 시키는 건 다 하고, 웃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섬세하고 절제된 본성을 숨기지 않는다. 그 독특한 캐릭터로 TV에서 자주 보는 방송인 중 한 사람이 됐다. 2017년 한 해 동안 서장훈이 활약한 방송 프로그램은 무려 12개. 지금은 서장훈의 또 다른 전성기다.

살짝 과장해, TV 채널만 돌리면 서장훈이 보인 2017년이었다.
〈미운 우리 새끼〉 〈아는 형님〉 〈동상이몽 2〉 같은 방송이 재방송을 워낙 많이 해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2017년에 바쁘긴 했다. 농구 선수 은퇴 후 가장 바쁜 해였다.

방송에서 서장훈을 보는 재미는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에 있다. 그러면서도 감이 좋다. 맥을 끊은 적이 거의 없고, 토크를 할 때도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적당한 때에 빠져나온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해 안달 난 것처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래 해온 방송인들에게는 적절한 타이밍에 꼭 할 말,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나름 분주하다. 그런데 나는 조급한 적이 없다. 나는 목표를 세우고 방송 활동을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조심스러웠고, 욕심 부리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모이고 쌓여서 요즘 같은 스타일이 나오는 것 같다.

예능계에는 잘하고 싶어 죽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나. 웃음을 위한 과장된 에너지가 홍수를 이룬다. 그런데 서장훈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더라. 아쉬울 것 없는 태도로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게 독특한 웃음 포인트가 됐다.

방송 초창기에 입버릇처럼 “계속 방송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1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진심인 한편, 조금은 경솔한 발언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사람이 다 그렇지 않나.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잖아. 나는 사실 농구 선수 은퇴 후에 조용하게 지내려고 했다. 농구계에 돌아가서 코치를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냥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다.

뭘 애써서 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오랜 기간 갖지 못한 ‘내 시간’을 만끽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부탁해오고, 친한 사람이 조르는 걸 매몰차게 거절하는 거, 보통 일이 아니더라. 그렇게 조금씩 출연하다 보니 나도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어떤 쪽으로?
나는 참 유명한 선수였다. 그런데 사랑을 많이 받은 건 아니다.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오랫동안 뛰었지만, 그에 비례하는 만큼 사랑과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서장훈은 그런 선수였다. 외로웠다. 선수 생활 내내 외로웠는데, 그걸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 시절엔 동기 부여가 됐으니까. 은퇴를 하고, 우연한 기회에 몇몇 방송에 출연했는데 그 후에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굉장히 따뜻한 게 느껴지더라. 20년 넘게 운동하는 동안에는 받아보지 못한 긍정적인 시선이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많다는 걸 그때 절감했다. 오랫동안 유명했지만 외롭게 살았는데, 그런 외로움이 다 메워지고도 남을 정도의 따뜻한 관심을 받았다. 기분이 좋더라.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방송 초창기에는 ‘연예인’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당시엔 그 말이 왜 그렇게 어려웠나?
일단 쑥스러웠다. 또 그때의 나를 ‘연예인’이나 ‘방송인’이라 말하긴 무리였다. 오랜 기간 연예계, 예능계에서 힘들게 활동하며 고생하고 노력해서 그 이름을 얻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방송 몇 개 한다고 ‘연예인’이라 불리는 건 쑥스럽고 죄송스러웠다.

뭘 넘겨짚거나 과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인가 보다.
전혀. 나는 아주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절대로 오버하지 않는다.

싱글브레스트 코트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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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방송인 서장훈의 초창기는 주변에서 팔 걷어붙이고 만들어준 시절이었던 거네.
방송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 참 많다. 나는 농구 선수를 은퇴하면서 내 인생의 운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농구 선수 은퇴를 선언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젠 그 운을 다 쓴 것 같다”고. 그런데 다시 이렇게 뭔가를 하게 되지 않았나. 가진 것에 비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운동하던 사람이 강호동, 신동엽, 김구라, 유재석 같은 쟁쟁한 방송인과 한 프로그램에서 함께 일하다니, 운이 좋은 거지.

그래도 당신이 어떤 몫을 해냈기 때문에 출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좀 다른 게 있었다면, 방송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 이야기했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방송인들은 스스로 내부자로 인지하며 말하고 행동하고 질문하는데, 나는 시청자 입장에서 이야길 했다. 40년을 시청자로 살아온 사람이니까. 다른 방송인들은 잘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게 된 거지. 또 한 가지는 고정관념 덕분이다. 나는 신체적으로도 크고, 전직은 농구 선수다. 이런 조건에서 연상되는 고정관념과 다른 모습을 예능에서 보여주니까, 의외로 재미있는 것 같다.

지금은 어떤가? 2017년 방송 활동에서 서장훈은 어떤 포지션을 취했나?
기본적으로는 같다. 내 취향이 그런 거라서.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건 싫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재미있다며 할 때, 나는 재미있지 않더라고. 과장된 것도 마찬가지. 재미있지 않다. 아무리 예능이라고 해도 말이다. 동떨어진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방송 활동을 해보니 그 판은 어떤 곳인 것 같나? 그곳에서 터득한 생존법이 있나?
나는 생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선수 시절의 서장훈은 아마 대한민국 농구 선수 중 가장 욕심이 많은 선수였을 거다. 그때는 그게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농구에서 은퇴한 서장훈에게는 그런 욕심이 없다.

승부욕이란 건 어쩌면 본성인데, 판이 달라진다고 사라질 수 있나?
글쎄. 농구처럼 방송을 대하진 않는다. 농구 할 때처럼 욕심 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나에게 방송은 즐거운 작업이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욕심 낼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제 방송 4년 차다. 방송인으로서 나는 돈 벌며 활동하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이 길을 걸어온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난 아마추어다. 욕심 내는 게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웃기려는 욕심을 더 내면 아마 시청자가 지금처럼 반응하지 않을 거다.

독특하다. 다른 영역에 있다가 예능으로 유입된 방송인을 만나면 대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없던 개그 욕심이 자꾸 난다거나, 그런 말들.
원래 그랬다. 나라는 사람이 원래 살면서 농구를 제외한 일에는 별 욕심이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방송 일은 내 인생에서 큰 보너스다. 덤이다. 농구는 그렇지 않았다. 매일매일 전쟁에 나가는 기분으로 했고,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지금의 서장훈에게 방송 활동은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일인 거네.
20년 넘게 뛴 필드에서 은퇴했다. 방송이 아니라면 집에서 쉬어야 하는 상태다. 은퇴할 때, 나는 이제 뭘 해서 돈 벌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벌어놓은 게 있지만, 40세에 경제 활동이 중단된 건 굉장히 힘들 수 있는 일이다. 계속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참 감사하다. 방송계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배타적인 분야가 아닌가. 오래전부터 어떤 코스를 밟지 않고, 불쑥 들어오기는 쉽지 않은 세계다.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생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생존하려 하지 않아서 된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서장훈에 대해 좀 알게 된 걸까?

글쎄. 이건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체격이 큰 운동선수였으며 40대인 남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분명 있을 텐데. 그 관념과 나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그것이 나에겐 방송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해왔지만, 24시간 농구 생각만 했던 사람은 아니다. 농구 이외의 것에 호기심도 많았고, 알고자 하는 욕구도 컸다. 운동선수라는 캐릭터와 실제의 나는 좀 달랐다.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 나에게는 많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보이는 기본적인 애티튜드는 일반적이게끔 노력한다. 나처럼 큰 사람이 일반적이지 않으면 이상해 보이거든.

선수 은퇴 후 가장 바빴던 한 해가 갔다. 새해 계획은 좀 세웠나?
요즘 말로, 1도 없다. 하하. 방송 시작하고는 내가 뭐가 되겠다고 생각하거나, 이 일에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앞으로도 지금의 이런 정신과 애티튜드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누가 물어본다. “제2의 강호동이 목표냐”고. 전혀, 절대 그렇지 않다. 될 수 없는 일이고,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다. (강)호동 형 같은 분은 다시 나오기 힘들지. 운동 선수 출신이라고 호동 형과 나를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 분과 나는 절대 같지 않다.

예능에서 당신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접하면 기분이 어떤가?
고맙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무척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거다. 열심히 하되 억지로 욕심 내지 말자. 오버하지 말고. 늘 겸손하게. 돈이나 명예를 좇지 않고. 이건 선수 은퇴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앞으로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 뭔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농구 선수 서장훈이 은퇴한다는 것에 아무도 관심 없을 때였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했던 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농구 하면서 충분히 많은 걸 손에 쥐어봤다. 과분한 관심도 받아봤고, 명예도 얻어봤다. 더 유명해지겠다는 마음이 지금 나에게는 없다.

즐기고 있는 거지?

즐겁게 하려는 거지. 언젠가 재미없다고 나를 안 찾는 날이 올 텐데, 두렵지 않다. 그만큼 욕심 없이 즐기고 있다.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는 일은 뭔가?
그냥 뭐. 다음 날 녹화 없을 때, 집에서 재미있는 영화 하나 틀어놓고 아이스크림 한 통 먹는 게 제일 즐겁다. 마음도 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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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이다. 서장훈이 농구 선수로 뛴 세월 말이다. 그는 인생 최대의 목표를 일찍 달성한 사람이다. 농구 코트에서 서장훈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뚫을 수 없던 센터였다. 그는 게임의 흐름을 읽고 게임을 장악하는 선수였다. ‘예능물’ 오래 먹은 방송인들 사이에 선 서장훈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체 판세를 읽고 움직인다. 노련하게 자신의 타이밍을 잡고 유용하게 쓴다. 선수 시절처럼 말이다. 태도는 조금 다르다. 필요하다면 서로 물고 뜯기도 하는 방송에서 그는 늘 한발 뒤에 서 있다. 느긋하고 욕심이 없다. 이런 캐릭터의 방송인은 전에 없었다. 평균을 훨씬 웃도는 큰 체격, 최고의 농구 선수였던 경력, 언뜻 시니컬해 보이는 얼굴은 예능에서 그가 보여준 의외의 모습과 맞물려 남다른 즐거움을 준다. 몇몇 방송에 고정 출연자가 되어서도 ‘방송인이냐’는 물음엔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던 서장훈은 이제 엄연히 훌륭한 기량으로 수비와 공격을 넘나드는 방송계의 센터다.


 

 

벨벳 소재의 블루종·흰색 셔츠·가는 줄무늬 팬츠 모두 엠포리오 아르마니 제품.

 5  PD 안준영 + Creativity 

올해 안준영이 연출한 〈프로듀스 101〉 시즌 2는 아이돌 세계의 안과 밖을 단단히 엮어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꿈의 무대였고, 매료될 수밖에 없는 쇼였으며, 미처 알지 못한 세계였다.

지난 2011년에는 김용범 PD가 〈슈퍼스타K〉로 에이어워즈를 받았다.
기억한다. 그때 내가 조연출이었다.

6년이 흘러, 2017년을 대표하는 방송으로 당신의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빼놓을 수 없게 됐다.
〈프로듀스 101〉이라기보다 워너원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친구들이 참 잘했다.

〈슈퍼스타K〉 역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지만, 〈프로듀스 101〉과는 결이 확연히 다르다. 그만큼 시장이 변화한 것이겠지.
2016년이 기점인 것 같다. 이때부터 거의 모든 콘텐츠를 모바일과 온라인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새로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미션을 받았을 때, 그 부분이 가장 고민이었다. ‘어떻게 해야 시청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을까?’ 〈프로듀스 101〉은 그렇게 만들었다. 100% 국민 투표로 파이널 멤버를 결정하는 프로그램.

특히 시즌 2는 Mnet이 온라인과 모바일로 2차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한 것이 열렬한 피드백에 한몫한 것 같다.
〈프로듀스 101〉은 아이돌 문화에 기반한 프로그램이니까.

이전엔 아이돌 문화에 대해 잘 몰랐던 것으로 안다.
거의 몰랐다. 열심히 공부했다. 아이돌 문화를 잘 아는 작가들, 신입 PD들을 만나면 언제나 물어봤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다들 다른 이유를 댔다. 그게 놀라웠다. 소위 말하는 ‘입덕’(어떤 분야 혹은 대상의 ‘오타쿠’가 되는 것) 포인트가 다 다르더라. 그 수많은 ‘입덕’ 포인트를, 2차 콘텐츠에 최대한 녹이고 싶었다.

PD 자신이 아이돌 문화의 바깥에 있었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접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프로듀스 101〉를 연출하기 전에는 아이돌이라면 일단 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래를 잘하고 춤도 잘 춰야 한다고. 〈프로듀스 101〉을 만들면서 시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아이돌 각각이 지닌 매력을 더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 〈프로듀스 101〉을 만들 때, 이 프로그램이 지닌 특유의 재미를 무엇이라고 봤나?
나는 〈프로듀스 101〉을 단지 서바이벌 오디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성장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에 중점을 뒀다. 누구에게나 연습생 시절은 있으니까. 직업에 따라 연습생이라는 말이 다르게 쓰일 뿐, 모두 그러한 때를 지나오지 않나. 이런 포인트를 담고 싶었다.

감성적인 포인트다. 그 부분을 건드렸기에 〈프로듀스 101〉의 시청자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반응한 것 아닐까?
시즌 1 때, 한 연습생에게 본인에게 연습생이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순간 한숨을 길게 쉬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많이 울었다. 연습생 시절은 어쩌면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때다. 아이돌 연습생은 대개 어리다. 그때부터 이미 수없이 자신을 의심해야 하는 시간을 보낸다. 아이돌 연습생의 그런 시간을 사람들이 알아봐주었으면 했다.

〈슈퍼스타K〉와 〈댄싱9〉을 연이어 연출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잔뼈 굵은 PD가 됐다. 좋아하는 일을 해온 편에 가까운가?

나도 월급쟁이니까. 회사의 요구에 맞게 노동력을 공급해온 것에 가깝다.

연출자로서는 어떤가?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포맷에 어떤 재미를 느끼지는 않나?
사실 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속에서 나름 의미를 찾아낸다. 장르의 기본적인 틀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여러 장치를 적극적으로 쓰려고 노력해왔다. 〈프로듀스 101〉도 마찬가지다. 어떤 회차에선 쇼에 중점을 두고, 또 어떤 회차에선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매 회 다른 재미의 지점을 만들려고 했다.

맞다. 〈프로듀스 101〉 시즌 1은 다음 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방송이었다.
시청자도 〈프로듀스 101〉이라는 프로그램이 처음이고, 출연하는 연습생도 처음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니까. 1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 연출자로서는 좋았다. 시즌 2에선 이 점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흘러갈지, 시청자와 출연자가 알고 있으니까. 제작진이 머릴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부분이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연출자는 결국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탈락하는 가운데에 출연자들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판을 잘 깔아주는 것. 실제적인 연출을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그런데 사실 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
지독한 감정노동이라서. 출연자와 아무리 심리적 거리를 두려고 해도, 안타깝게 파이널 라인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남는다. 어떻게 해도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지 않나. 그래서 출연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십분 이용해서, 가능한 한 많은 걸 얻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리얼리티’를 살린 프로그램에 특히 관심이 많다는 말을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
내가 하는 프로그램 안에 진짜 삶이 있었으면 좋겠다. 희로애락이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시 한번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맡게 된다면?
배우판 〈프로듀스 101〉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친분 있는 드라마 제작 PD들에게서 ‘배우가 없다’는 이야길 자주 듣는데, 수적으로 부족한 게 아니라 주목할 만한 배우가 안 보인다는 말이다. 분명,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매력적인 배우가 많을 텐데.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또 한 번 연출해보고 싶다.

어떤 빈틈을 잘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어느 기획사에서 배우로 아이돌 그룹을 구성하기도 하지 않았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큰 편이다. 누구나 캐릭터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누군가의 매력을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다.

PD라는 직업과 천성이 잘 맞는 것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초등학생 때부터 장래 희망을 물으면 PD라고 했다. 사촌 형이 신문방송학과를 다녔는데 멋있어 보였거든. 형에게 그걸 전공하면 뭘 하는 거냐고 물으니 PD나 기자라고 말했는데 PD가 영어니까 그냥 멋진 것 같아서 끌렸다. 막상 해보니까 적성에 안 맞았다. 나는 낯가림이 심하다. 지금도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 첫 촬영 나갔을 때 연예인 앞에서 엄청 떨었다. 그때 그만둬야겠다 싶었는데 여기까지 온 거다.

무엇을 붙잡고 여기까지 온 것 같나?
콘텐츠에 대한 애정이다. 쉴 때도 드라마와 영화, 방송 프로그램 보는 걸 좋아한다. 아무리 바빠도 잠들기 전엔 이런저런 영상을 보면서 잠든다. 누군가는 자기 전까지 일하는 거 아니냐고, 스트레스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걸 보면서 오히려 쌓였던 스트레스를 푼다.

PD 하길 잘했다 싶을 때가 있었나?
있었다. 최근 일이다. 내 형님 또래의 어른이 프로그램 참 잘 봤다고, 〈프로듀스 101〉을 재미있게 보면서 사춘기인 자녀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맙다는 말을 하시더라. 그때 참 PD 하길 잘했다 싶었다.

  • ARENA Says
    2016년, 101명의 여자 아이돌 연습생이 한 무대에 올라 ‘Pick me up’을 노래하던 〈프로듀스 101〉 시즌 1의 장면은 방송 즉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01명의 연습생을 11명의 파이널 멤버로 좁혀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스케일과 콘셉트만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올 상반기, 〈프로듀스 101〉 시즌 2가 방송됐다. 이번에는 소년들의 이야기였다.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향한 반응과 관심은 더욱 거대했다. 팬덤은 회를 거듭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실시간으로 열성적인 지지와 피드백을 쏟아냈다. 시즌 2에서는 그간 아이돌 문화의 바깥에 있던 이들도 그 거대한 팬덤의 일부가 됐다. 마지막 회에서 파이널 멤버 11인 중 센터 자리를 꿰찬 강다니엘은 시사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시즌 1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다. 이 뜨거운 쇼의 선봉에 PD 안준영이 있었다.


 

 

회색 재킷·흰색 셔츠·사선 줄무늬 넥타이·통이 넓은 면 팬츠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

 6  건축가 곽희수 + Intelligent 

‘장인의 지식은 얼마나 깊은가’라는 물음을 갖고 건축가 곽희수를 만났다. 그는 지난 14년 동안 콘크리트라는 한 가지 재료를 사용해 자신의 건축 세계를 확장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콘크리트를 미학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의 노고에 건축계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낸다. 곽희수의 연구는 지속되고 있다. 다음 세대에게 지식을 전하기 위한 그의 탐구와 노력에 ‘A-Awards’의 영광이 돌아갔다.

바다 풍광을 머금은 ‘기장 웨이브온’, 산속에 자리한 거대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 ‘유 리트리트’ 등 발표한 작품마다 화제가 됐다.
그 덕분에 일이 굉장히 많아졌다. 일을 따내기 위해 사회적 관계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을 과감히 이겨낸 게 가장 큰 성과다. 자신의 재능으로 성실하게 작품을 만들어내면 그 결과물을 통해 클라이언트가 생긴다. 건축가는 좋은 풍경을 만나는 것이 일의 절반을 한 셈이다. 그래서 많은 건축가가 좋은 대지에서 건축을 하고자 한다. 올해 진행한 대부분의 건축은 바닷가 리조트나 굉장히 경관이 수려한 배산임수 지역의 프로젝트였다.

건축가에게도 사회적 관계가 중요한가?
선배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만일 내가 건축을 아주 잘해서, 좋은 건물을 짓는다고 치자. 그럼 그 건물을 보고 감동받은 사람들이 내게 작업을 요청할까? 대부분의 선배들은 그런 일은 없다더라. 한국 사회는 관계를 통해 일이 발생한다. 작품 잘한다고 일이 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젊은 건축가는 어떻게 하냐? 일가친척을 포함해 주위에 집 지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런 환경에서도 나는 영업하기 싫었다. 내 작품을 보고 흥미를 가진 사람이 클라이언트가 되길 바랐다. 그렇다면 그 클라이언트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할 테고, 나는 그에게 유일한 건축가가 될 테니까. 일종의 연애 감정 같지.

작품이 주목받으면서 자연스레 일이 늘어났고, 정신없이 바쁜 한 해를 보냈다고 들었다.
창작자에게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창작의 고통은 작가의 숙명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창작을 해야 한다는 공포감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를 얻었으니 굉장한 흥분이 뒤따른다. 지금까지 건물을 총 11개 만들었다. 그런데 2017년에는 새로운 프로젝트 10개를 진행했다.

15년 동안 해낸 작업량과 비슷한 양을 2017년 한 해 동안 했다. 시상하는 보람이 있다.
건축가가 건축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으니 더 신기하다. 내가 잘 살고 있나? 이런 생각도 든다. 칭찬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칭찬받길 원하는 욕구가 있고, 또 칭찬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나 역시 상을 받고 대외적으로 알려지면서 내 안의 부족한 재능까지 끌어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수상이나 칭찬이 동기 부여가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나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꿈이 있다면 2017년의 영광이 2018년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2018년에도 이런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과거 인터뷰에서 단일 콘크리트로 구조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한가?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작업하고 있다. 국내에서 한 재료를 20년 가까이 꾸준히 사용한 건축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을 선보여왔다. 그래서인지 많은 건축가들이 콘크리트를 사용할 때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문의한다. 그럼 그들에게 공사 일지를 보낸다. 후배들에게는 일일이 답해줄 수 없어서, 콘크리트 작업에 관해 가이드북 같은 걸 만들어서 뿌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납득이 안 된다. 콘크리트 작업을 하며 쌓은 노하우이고, 그게 곧 기술이자 경쟁력 아닌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노하우를 공유한다니.

생각해보자. 만약 한 건축가가 특정 재료를 꾸준히 연구해 획기적인 방법을 만들어낸 뒤 죽었다. 그럼 다음 세대는 그 연구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겠나? 콘크리트는 시간의 힘이 만들어낸 재료다. 담벽에 사용되던 친근한 재료이고, 거기에 낙서를 해도 야단치지 않던 유일한 재료다. 이전 세대에는 쉽게 다룰 수 있기에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면, 내 세대는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미학적 측면까지 끌어올리고, 구조적인 조형을 만드는 게 임무인 것 같다. 다음 세대는 콘크리트에 대한 해법이나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길 바란다.

2017년의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무엇일까?
나이를 조금 많이 먹었다는 것. 하하. 바쁘게 달려올 때는 몰랐는데,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이 달라지더라.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이 어떻게 달라지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주변을 보고 달려왔다면, 지금은 내 움직임이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가 화두를 던지면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의도를 알게 됐다. 그 행위가 결국은 건축이다. 클라이언트는 건축가인 내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한다. 그러면 나는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표현하려 한다. 대화 속에는 서로의 의식이 만나는 부분이 생기는데, 지금 그 부분이 깊어지고 있다. 다른 욕망은 줄고 오로지 흥미에 대한 욕망만이 살아 있는 것 같다. 확장되는 내 인식의 폭이 과연 어디까지 넓어질지 궁금하다. 인류를 이해하고 싶고, 여성도 이해하고 싶다. 유명한 음악가나 예술가들이 말년에는 자연을 노래하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했는데,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된다.

하지만 건축가 곽희수의 전성기는 지금 이 시대 아닌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많지는 않다. 내가 가진 재능이 경험으로 누적되고, 지혜가 생길수록 좋은 건물을 만들 수 있겠지. 좋은 건물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바닷가에 있고, 숲에도 있다. 그 프로젝트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바다나 산 같은 환경에 관심이 많이 생긴다. 우리에게도 쉰다는 개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노는 장소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만드는 시기다. 바닷가에 어떤 공간을 만들어야 바다와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좋은 장소에 지은 건축이 곧 놀이의 유형이 됐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노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자.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노는 정서가 있다. 그리고 건축이 어떻게 놀 것인지를 제안해야 한다. 기장 웨이브온을 만들고 자신감을 얻었다. 기장 웨이브온은 약 495.8㎡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지만 하루 2천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기장 웨이브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그 건물이 지역을 바꿨다고 하더라. 건축가는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실제 즐기는 소비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고민과 소비자가 아는 범위 사이에 건축이 개입하면서 놀이 문화를 증폭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7년에 10개의 프로젝트를 했고, 재료에 대한 연구도 지속했다. 올해는 그 결과가 공개되는 해다. 기대가 클 것 같다.
지금만큼 하는 게 목표다. 마음의 동요 없이 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자 한다. 문제만 안 생기면 좋은 거지. 그리고 더 좋은 정보를 얻고 싶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생각을 많이 나누고 싶다. 그런 것들이 2018년에 국한될 게 아니라 앞으로 내 인생에 계속 반영됐으면 한다.

  • ARENA Says
    부산 기장군의 한적한 해안가. 가파르게 솟은 언덕에는 노출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있다. 이름은 기장 웨이브온. 약 495.8㎡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지만 하루 천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지역 명소다. 강원도 홍천의 고요한 숲에도 노출 콘크리트로 만든 숙박 시설이 있다. 이름은 유 리트리트. 자연 속에 우뚝 선 한 덩어리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사람들을 매혹한다. 모두 이뎀도시건축 곽희수 대표의 작품이다. 곽희수는 데뷔 이후 콘크리트 소재를 꾸준히 연구해오고 있다. 국내 건축사를 뒤져봐도 그와 같은 경우는 찾기 힘들 것이다. 2016년 공개된 그의 작품들은 콘크리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구조를 갖추었다. 연구의 결실이자 재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 놀라운 성과에 건축계는 2016년 아메리칸 건축상 금상, 제22회 세계건축상, 2016년 한국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등으로 화답했다. 재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자신의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것. 곽희수 소장의 행보는 ‘인텔리전트’의 표본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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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FEATURE EDITOR 서동현(이병헌, 장훈), 조진혁(오혁, 곽희수), 이경진(서장훈, 안준영)
FASHION EDITOR 안주현(이병헌, 오혁, 서장훈), 김장군(장훈), 최태경(안준영, 곽희수)
PHOTOGRAPHY 김영준(이병헌), 박정민(오혁, 장훈, 서장훈, 안준영, 곽희수)
STYLIST 이혜영(이병헌), 김예영(오혁), 오영주(서장훈)
HAIR 태현(미장원 by 태현)(이병헌)
MAKE-UP 김정남(이병헌)
HAIR&MAKE-UP 강윤진(아우라)(오혁), 이현정(장훈), 정선희(서장훈), 이재황(에이바이봄)(안준영, 곽희수)
ASSISTANT 최종근(서장훈), 김윤희, 민형식(안준영)
COOPERATION 르노삼성자동차(이병헌)

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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