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음악 공연이 더욱 중요해지는 모바일 시대
최근 검정치마의 단독 공연을 예매했다. 몇 달 전, 앨범 발매 직후 펼친 단독 공연 예매에 실패해서 이번에는 티켓 오픈 30분 전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각오를 다졌다. 결과는? 5번 시도 끝에 1장 성공. 끝내 2장은 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험에 대해 ‘아이돌 공연도 아닌데 예매 전쟁을 한다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대 앞 공연을 볼 때도 사전 예약은 거의 필수다. 검정치마나 언니네이발관 같은 ‘거물’들의 공연 티켓은 오픈 직후 몇 분 안에 매진된다. 한마디로,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울에서 음악 공연이 다양하게 분화된 계기는 홍대 앞 인디 신이 전개되면서다. 그 시점을 1996년 전후로 잡는다면, 이후 홍대 앞 생태계는 크게 4기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1기는 1996년부터 2004년 즈음으로 펑크, 모던 록, 익스페리멘털 등 다양한 형태의 밴드가 드럭이나 재머스 같은 홍대와 신촌 사이 소규모 클럽과 함께 성장한 시기다. 이때 홍대 앞 음악 생태계는 생산자(클럽/밴드)와 소비자(팬덤)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었고, 그 기반은 공동체에 가까운 끈끈한 애착이었다. 말하자면 산업화 전의 벨에포크, 순수의 시대 같은 것. 2기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인디 레이블이 대거 등장하며 생산과 유통이 어느 정도 산업화된 때였다. 인디 밴드 음반이 메인스트림 가요의 유통망에 올라타거나 온라인 숍을 통해 판매되며 접근성도 높아졌는데, 공간적으로도 특이점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상상마당의 등장이다. 홍대 앞에 거대 자본이 상징적인 건축물을 세우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 면에서 이슈가 되었다.
2010년부터 2015년 즈음인 3기에는 이런 구분이 세분화되었다. 인디와 메이저의 경계가 희석되며 음악 소비 행태가 태도보다는 취향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아티스트 인터뷰, 생태계의 역사, 관련 업종 소개, 홍대 앞 문화 공간 지도 등이 활발히 유통되었다. 동시에 카페 공연이 대거 늘었고 대자본이 개입한 공연장도 문을 열었다. 그 와중에 문 닫는 공연장도 눈에 띄며 지역사회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홍대 앞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시화된 것도 이 즈음이다. 그 이후인 4기는 2017년 현재다. 3기와 달라진 점은 음악 생태계가 공연 중심으로 재빨리 이동하고 있다는 것. 기존의 카페 공연, 클럽 공연 외에 미술관과 복합 문화 공간 등이 추가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공연은 애초에 특정 공간에서 특정 시간에 제공되는 ‘순간의 경험’이므로 대량 복제되거나 유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점이야말로 음악 공연이 미술, 영화 등의 체험과 질적으로 다른 지점일 것이다. 그래서 음악 공연이 세분화되고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은, 모든 산업의 기본 테제인 고객 개발과 연관된다.
고객 개발. 이것은 홍대 앞 음악 생산자들에게는 오래되고 중요한 이슈다. 홍대 앞이라는 공간은 음악 덕분에 특유의 상징성을 띠게 되었지만 정작 현재 음악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고객과 쉽게 접촉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여러 실험이 있었지만, 결국은 2015년 이후 홍대 앞 공연 인프라가 확장되며 활로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롤링홀이나 상상마당 라이브홀 같은 기존 대형 공연장 외에 무브홀, 하나투어 브이홀 등 1백 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공연장들이 문을 열었고, 클럽FF나 프리즘홀, 벨로주 같은 중형 공연장은 차별화된 기획 공연으로 퀄리티를 높였다. 빵이나 재머스, 스트레인지 프룻, 제비다방 같은 작은 공간은 일상적으로 음악의 접점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인터파크, 예스24, 티켓링크 등 예매 플랫폼이 소규모 공연의 유통까지 포괄하고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와 토스 같은 결제 편의성을 극대화한 서비스가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인디 밴드 및 기획 공연의 접근성은 보다 높아진다. 그래서 내가 검정치마의 공연 티켓을 예매하려고 티켓 오픈 30분 전부터 성능 좋은 컴퓨터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소리를 지르며 광클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정을 고려할 때, 현재 음악 공연은 크게 두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공연의 전문화다. 그동안 홍대 앞 음악 생산자들은 여러 과정을 거치며 질적 성장을 해왔다. 달라진 환경과 새롭게 등장한 감수성에 적합한 음악 전문가들이 생기면서 음악 공연은 규모에 상관없이 보다 타게팅되고 공간의 경험에 집중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공연의 세분화다. 밴드 공연, 싱어송라이터 공연 외에 힙합이나 전자음악과 같은 장르가 성장하면서 그들이 공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삼는 공연들도 늘고 있다. 미술관이나 복합 문화 공간 등에서 벌어지는 공연이 주로 이런 특징이 있는데, 이 두 가지 경향은 대체로 동시적으로 벌어진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오직 서울에 국한된 흐름이란 점은 시사점을 준다. 서울 외 지역의 음악 공연이 주로 페스티벌이나 지역 행사 중심으로 진행되거나 지역에서 기반을 닦은 공동체가 힘겹게 개척하는 사례를 접하다 보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단 서울의 사례가 다른 지역에도 적용할 만한 내용으로 정리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최근 몇 년간 서울에서 벌어진 음악 공연의 변화는 음악 공동체의 질적 성장 외에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같은 관련 생태계의 성장과도 깊게 연관된다는 건 분명하다. 모바일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는 중에 오프라인 공연이 성과를 낸다는 것 자체도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지금 여러모로 흥미롭고 인상적인 음악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WORDS 차우진(음악 평론가)
FOOD
조금 더 맛있어진 도시
음식으로 구획을 나눠보자면 서울도 참 흥미로운 도시다. 우선 청담동과 도산공원, 한남동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그리고 값비싼 음식이 서울 사람들의 식문화를 위에서 이끌고, 경리단, 해방촌과 홍대 앞, 망원동, 연남동, 우사단길 등 힙스터의 게토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한국화된 음식이 트렌드를 아래에서 끌어올린다. 을지로, 중구 등 4대문 안 도심에선 적어도 30년 이상 업력을 이어온 전통 음식 ‘노포’가 하나의 투어 코스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광화문 일대와 여의도 같은 오피스 지역은 서울의 가장 평범한 직장인이 매일 끼니를 해결하는 데 최적화되어 직원 식당이나 다름없는 ‘밥집’들이 건물 지하마다 들어차 있다. 신촌 등 대표적인 대학가에서는 미래 직장인의 허름한 지갑 사정에 맞춘, 본질적으로 그 의도는 다르지 않은 밥집에 식생활을 의탁한다. 기본적으로 골라 먹을 것이 많고, 푸짐하고, 죽을 정도로 매운, 또는 달콤하게 간을 맞춘 음식으로 말초적인 쾌감을 안겨주는 식당 앞에는 점심시간마다 줄이 이어진다. 명동이나 동대문 인근에 가면 여행자를 겨냥한 한식 단체 식당이 어김없이 상혼을 불태운다.
여기까지가 서울 사람들이 파악하는 서울의 ‘음식 행정구역’이다. 그리고 9와 3/4 플랫폼에 머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행정구역이 또 있다. 외국인이 형성한 그들만의 리그다. 불과 몇 년 사이 빠르게 형성됐다.
태초에 이태원이 있었다. 이곳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식문화의 멜팅포트였다. 이슬람 성원 주변의 아랍권 음식부터 미국, 프랑스, 태국, 어느 국가의 음식이든 이태원에 있는 식당은 카테고리부터 달랐다. 이태원이 외국인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던 시절, 그곳은 그들에게 ‘고향의 맛’을 느끼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었고, 그래서 음식도 서투른 한국화를 배제한 불친절한 것이었다. 이제 이태원이 한국인에게 함락되고, 서울의 외곽 지역에 생겨나고 있는 호그와트들은 이태원과는 또 다른 형태로 자생했다.
“서울에 가면 왕십리에 있는 쌀국숫집 팜티진은 꼭 가봐” 하는 이야기를 누군가 한다고 해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최근 서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 중인 베트남식 쌀국수, 즉 퍼보(pho bo)는 굳이 하노이, 호치민에 가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발달했다.
일찍부터 다문화 지역이 형성된 안산, 그리고 수원에 이어 ‘그들’이 서울로 진격했다. 왕십리 지역에는 동남아시아 이주자의 ‘타운’이 형성돼 있다. 사람이 살면, 그 사람들이 먹는 음식도 따라온다. 이 지역은 특히 베트남이다. 왕십리역과 상왕십리역 사이, 이면도로 주택가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 상가에는 베트남 식재료 전문점과 두 군데의 베트남 식당이 입주해 있다. 그중 하나가 ‘팜티진’이다. 팜티진의 퍼보는 아닌 게 아니라 참 맛있다. 좋은 재료로 정확히 조리한, 잘 만든 음식이다. 중부 냐짱(Nha Trang) 출신으로 한국에서 거주 중인 팜티진 씨와 그 한국인 남편이 운영한다. 주방 일은 모두 손맛 좋은 팜티진 씨가 도맡는다. 얼마 전 <수요미식회>에 소개되기도 했다. 냐짱에 살던 어린 팜티진 씨는 이런 삶을 상상이나 했을까.
‘차이나타운’은 이제 인천이 아니라 서울에 있다. 두 곳이나. 2호선을 따라 북동쪽, 남서쪽으로 대칭을 이뤄 위치한 건대입구역과 대림역 주변은 좀 더 노골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국인 거주 지역이다. 중국 북동쪽의 조선족 등이 그들의 말을 하며 그들의 식재료를 파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오래된 재래시장 중 하나였던 대림시장은 이제 중국 전문 식재료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중국식 반찬집부터 없는 것 없이 다 파는 식료품점, 중국식 두부를 하루 종일 만들어내도 줄이 끊이지 않는 두붓집, 이국적인 채소를 잔뜩 쌓아놓고 파는 상점까지 펼쳐지고 길거리 음식조차 모두 중국의 것이다.
‘줘마양다리구이’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어린 양의 다리를 통째로 올려 돌리면서 굽고, 길쭉한 포크와 나이프로 베어내며 먹는 호방한 음식이다. 두툼하게 지방 많은 살을 뼈째 굽는 양갈비 역시 호방하기는 마찬가지다. “양꼬치는 칭다오!”가 식상해질 무렵 양다리 구이가 등장했고, 훠궈와 마라탕, 마라샹궈 같은 쓰촨의 맛이 지금 전 서울에서 유행하는 데는 이곳들 차이나타운의 공헌이 컸다.
대림역 12번 출구 골목은 일요일이 가장 중국 같다.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울 근처 어디든 사는 그들이 가족, 친구들과 모이기 위해 대림을 찾는 요일이다. 아직까지 어디서나 중국처럼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이 시장통을 메우고 지나가는 것 역시 일요일이다.
다문화 도시가 되어가는 서울의 이면에는 농업의 변화도 뒤따른다. 어떤 나라의 음식을 이야기할 때 항상 기본을 받춰주는 것은 재료다. 한국인이 어딜 가나 깻잎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식재료 산업은 정확히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따른다. 소비자에 비례해 팽창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제 그들의 산업 단위 안에서 다양한 식재료도 생산되고 있다. 베트남 음식에 사용되는 민트, 바질과 쿨란트로, 그리고 물론 고수도 한국산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짤막한 중국 오이, 영채 같은 재료도 어렵지 않게 철마다 등장한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합심해 양고기를 하도 먹어치워서 호주산 양고기 수입도 몇 년 사이에 급등 곡선을 그렸다. 이주자의 식문화 산업 규모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쑥쑥 자라나고 있다.
1988년, 30년 전의 서울을 기억해본다. 이태원이 아니고서는 모든 것이, 모든 이가 오직 ‘한국’이었던 그때.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에 서울은 다양한 식문화를 품은, 좀 더 맛있는 도시가 됐다. 지하철에서 옷깃을 스치는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 그들을 따라가면 그들의 호그와트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법의 세계처럼 낯설고, 신나는 새로운 밥상이 펼쳐진다.
WORDS 이해림(푸드 라이터)
SPACE
이야기와 치유가 있는 카페 공간
우리는 ‘치유의 공간’을 찾는다. 그곳이 휴식이든, 사치이든. 그곳에서 커피를 팔든, 술을 팔든, 옷을 팔든, 물건을 팔든. 아무튼 ‘치유’가 된다면 우리는 그곳을 찾아간다.
‘식물’이 유행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물이 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어떤 이들은 젊은이가 여유롭지 못한 상태로 카페를 준비하며 보증금 내고, 권리금 내고, 남은 자본으로 비싼 대리석을 공간에 배치하지 못하니 임시방편 혹은 임기응변으로 저렴한 식물을 택했고, 인스타그램 등 SNS가 선택을 대변한다는 요즘 세상에 너도나도 식물을 들여다놓으면서 생긴 해프닝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굳이 그것이 틀린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기획자 시점에서는 꼭 그렇게까지 치부하지 않는다. 이미 5년 전부터 서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식물’이라는 매개체는 중요한 단어로 회자됐다, 조금 더 유식하게 말하면, 이 유행은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과 아르누보의 미학에 사회학으로까지 번지는 미니멀리즘이 더해진 창의적 결과물이다. 그러니 ‘보태니컬 디스커버리’라는 단어로 정리된 이 유행은 당연한 흐름이다. 아직도 #초록초록이 유효한 것은 그것이 원초적이면서도 소소한 생명을 가진 개체, 도시에서 위안받을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치유를 위한 시각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형성된 불황의 그늘이 존재한다. 화려함보다는 단아하지만 세련미를 잃지 않은 옷차림이 ‘멋’으로 치부된다. 그럼 이렇게 차려입고 어디를 가야 할까? 넓은 대로변보다는 좁은 골목 어귀로 들어선다. 그 골목길 사이사이에는 ‘네오 마이너리즘’이 팽배한다. 여기에 1990년대 소비와 생산의 중심이었던 윗세대에게서 영감을 받아 과거의 풍요로움을 미화시키며 만들어낸 분기점이 생겨났다.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이야기’가 존재한다. 어느 작은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그런데 서점이다. 궁금증이 일어나 질문했다. 이곳은 카페입니까, 서점입니까? 왜 여기서 커피를 팝니까? 스타벅스와 교보문고가 답할 수 없는 이 질문에 이곳은 친절히 대답해준다. 그래서 젊은이는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게 된다. 기업들이 저마다의 논리로 만들어내는 멋들어진 소비 공간도 계속 생산될 것이다. 복합 공간도 더 알차게 진화할 것이고, 일본의 츠타야 서점과도 같은 근사한 변이도 생겨날 것이고, 미국의 에이스호텔처럼 합목적성을 가진 공간도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들은 결코 ‘젊은이의 양지’가 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치유’가 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양지를 찾기 때문이다.
WORDS 김한규(에이치콤마 디렉터)
ART
아트 신의 불완전한 변화
한국의 동시대 미술 현장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몇 년간 미술계의 동력이 된 인물, 공간, 사건, 전시, 행사 등을 두루 짚어볼 필요가 있다. 2013년 겨울, ‘커먼센터’와 ‘시청각’이 문을 열었다. 큐레이터 함영준,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재와 김영나, 작가 이은우가 공동 운영한 커먼센터는 을지로의 4층짜리 폐건물을 날것 그대로 사용했고, 2016년 1월 김희천의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현시원과 안인용이 운영하는 시청각은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디귿 자 형태의 한옥을 전시장으로 개조한 곳으로, 공간의 특성을 살린 매력적인 전시로 사랑받고 있다. 뜻이 맞는 젊은 미술인이 모여, 서울의 월세가 싼 지역에 새 공간을 열기 시작했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작품을 선보이던 작가들이 미술을 대하는 태도, 그들이 처한 작품 제작 및 판매 환경, 그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탄생한 작업 등을 확인하는 두 행사가 큰 성공을 거뒀다.
2015년 10월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서 작가들이 주도해 만든 작품 판매 이벤트 <굿-즈>가 열렸고, 11월 일민미술관에서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 7>이 개최됐다. 단 한 차례로 끝난 <굿-즈>는 기존 미술계를 향한 젊은 작가들의 아우성 같았고, 꾸준히 성장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미술관 입성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2016년 1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울 바벨>전은 이런저런 흐름을 갈무리하며 2010년대 한국 동시대 미술 현장에 새로운 판이 벌어졌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그해 3월, 일민미술관에서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전을 선보였다. 디자이너 김형진과 최성민이 기획한 이 전시는, 미술의 오랜 협력자로서 활약한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지난 10년을 탐색했다. 5월, 삼성미술관 리움의 신진 작가 지원 프로젝트 <아트스펙트럼>전이 개막했다(안타깝게도 삼성문화재단에서 운영하던 플라토는 8월에 17년 만에 폐관했다). 이렇게 새로운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 디자이너, 전시 공간이 반짝이며 등장해 활약을 펼쳤고, 흥미로운 전시와 행사가 트위터의 타임라인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스마트폰 세대에 맞게 젊은 미술인은 트위터를 정보 전달과 소통의 창구로 삼았고, 그곳에서 ‘공동체’ 의식을 공유했다. 그리고 2016년 10월, 트위터를 통해 함영준 큐레이터의 성추행 폭로가 이어졌다. 미술계의 모두가 혼란과 분노를 경험했다. 그저 각자 생존을 모색하며 활동하던, 그래서 깊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인물, 공간, 전시, 행사가 사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을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재확인하는 사건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2017년을 맞았고, 여전히 질문은 진행 중이다. 한국의 동시대 미술 현장은 달라진 세상을 향해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젊은 미술인은 변화한 미술계의 풍경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을까?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
WORDS 김재석(<아트인컬처> 매거진 편집위원)
FASHION
경계는 사라졌다
멋진 인스타그램 계정을 발견했다. 얼핏 막 찍은 것 같지만 의도가 명확했고, 피사체로 삼는 물건과 옷의 취향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사진 속 그 자신의 스타일링이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그야말로 요즘 말하는 ‘#멋’. 알고 보니 옷을 만들어 파는 자의 인스타그램이었다. 흔한 말로 ‘블로그 마켓’을 하는 사람. 정작 파는 옷은 동대문 언저리에서 제작한 아주 저렴한 것들이지만, 그걸 포장하고 연출하는 능력은 굉장히 출중했다. ‘032c’나 ‘캘빈 클라인’ 로고 티셔츠를 적당한 순간에 얼핏 내보이는 것은 물론, 라프 시몬스의 운동화와 톰 포드 호스빗 로퍼를 적절히 섞을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싼 옷’이었다. 대놓고 카피하거나 가벼이 트렌드에 편승하지 않았다. 짧고 깊은 고민 끝에 나왔을 그 옷은 꽤나 독보적이었다. 모든 면에서, 어느 로컬 브랜드나 서울 디자이너 브랜드와 비교하더라도 월등히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옷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A부터 Z까지 있다면, 그는 과연 어디쯤에 있을까? 서울 패션위크에 런웨이를 올리는 브랜드가 A이고 동대문에서 옷을 가져다 파는 쇼핑몰이 Z라면, 우리는 그를 알파벳 무엇쯤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과연 그 경계는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
수년 전만 해도 그 구분은 쉬운 듯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요즘은 말하자면, ‘근본 없는 쿨함’이 난무하는 시대다. 많은 브랜드들이 다음에 올 트렌드가 뭐고 다음 시즌에 잘 팔릴 아이템이 뭔지 고민하는 사이, 지금 재미있는 걸 그냥 ‘해버리는’ 자들이 늘어났다. 생각해보면 그런 게 정말 ‘쿨’한 거 아닌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이, 패션은 꽤 다양해졌다. 자기 취향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들이 숨 가쁘게 늘어났다. 덩달아, 그걸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브랜드도 늘어났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거대 자본으로 하이 패션의 중심지에서 쇼를 벌이지 않더라도, 보광동 옥탑방에서 혼자 깨작거리던 누군가가 단박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둔갑할 수도 있는 시대다.
소셜 미디어는 이 모든 속도와 변수의 기폭제가 됐다. ‘근본 없는 쿨함’을 내보이는 크리에이터들이 서울에도 늘어나는 중이다. 그걸 또 지구 반대편에선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지지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근본 없는 쿨함’의 ‘근본 없음’을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견고하다 믿었던 근본의 근간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과거의 레이 가와쿠보가, 요즘의 뎀나 바잘리아가 만든 어떤 ‘무브먼트’는 고루한 근본만 따져서는 만들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근본과 본능이 만나 만든 반짝이는 화학 작용이야말로 진짜 ‘패션’임을 아는 자들만이, 서서히 밀려오는 지각변동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WORDS 박태일(<벨보이>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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