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니트 톱은 브룩스 브라더스, 팬츠는 코스, 스니커즈는 본인 소장품.
“배우로서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밖에 없었다. 거품 다 빼고 나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 남는데, 배우는 그것만 하면 된다고 믿거든. 무언가를 곁들이려 하면 어설퍼지는 법이고 핵심, 딱 그것만 하면 된다는 게 내 연기론이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누군가 대뜸 묻는다. ‘여기 맞나요?’ 배우 박성근이었다. 근엄한 표정의 호랑이 같은 얼굴과 거리낌 없는 행동, 곧바로 기가 센 사람임을 직관했다. ‘아, 조심해야겠다’ 주의를 기울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난데없이 날카롭던 인상 대신 동네 삼촌 같은 푸근한 얼굴을 드러냈다. 촬영하는 내내 그랬다. 얼굴의 기운이 날카로움과 친숙함 사이를 자주 오갔다. 뭐지 싶었다. 인터뷰를 하는데 손을 가만두지 않고 계속 꼼지락거렸다. 상체를 좌우로 비틀기까지 하며. 의외였다. 어느 순간 어린아이가 보였다고나 할까? 그제야 그의 날카로움과 친숙함이 모두 이해됐다. ‘마음의 일부분이 때 묻지 않은 천연덕스러운 사람이구나.’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때론 진중한 중견으로, 때로는 신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 와중에 자꾸 그의 눈을 보게 됐다. 맑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빛나고 있었다. 아주 세게.
<비밀의 숲>의 부장검사에서 검사장으로 승진하는 ‘강원철’ 역을 맡아 짧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2화 중국집에서 황시목의 메뉴를 ‘자장면’이란 한마디로 결정해버린 것이나 종이 뭉치를 휴지통에 던져 넣는 장면, 이창준 검사장이 자리를 물러날 때 윽박지르는 장면 등. 은근히 신스틸러더라.
신스틸러까지는 아니다.(웃음) 깊은 인상을 준 건 사실 의도한 게 아니다. 그 상황에서 배우로서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밖에 없었다. 거품 다 빼고 나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 남는데, 배우는 그것만 하면 된다고 믿거든. 무언가를 곁들이려 하면 어설퍼지는 법이고 핵심, 딱 그것만 하면 된다는 게 내 연기론이다. 그걸 제대로 했을 때 관객 입장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거고. 다만, 나는 그 감탄사를 노리는 타입이 아니다. 아직 그런 건 못하겠더라.
굵직한 작품을 많이 했다. <남영동 1985> <변호인> <제보자> <내부자들> 등. 이번 <비밀의 숲> ‘강원철’은 의미가 유독 남달랐을 것 같다.
준비하면서 현실에 가까운 검사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시청자도 나도 모두 만족한 거 같아 기쁘다. 또 작가님, 감독님, 동료 배우, 스태프 모두 합이 잘 맞았다. 그간 여러 작품을 했고 모두 좋았지만, 이번은 월등히 전체 합이 잘 맞았다. 일적으로도 잘 풀렸고. 덕분에 이렇게 처음으로 화보 촬영도 하고. 주변에서 응원의 메시지도 많이 받았다.
배우로서 아직 넘고 싶은 산이 많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1980년부터 연극을 했다지?
서울예술대학교 졸업하고 오태석 선생님이 계신 ‘목화’ 극단에 가고 싶었는데, 은사이신 김효경 교수님의 부름을 받아 처음에는 뮤지컬을 주로 했다. 그러다 연기에 대한 욕구가 커서 대학로로 나가 정극을 했다. 당시 영화나 TV에는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사업하시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꽤 크게 사업하셨는데, ‘이제 내가 맡아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전혀 할 줄 모르는 일이지만 장남이니까 책임감이 들어 무모하게, 그간 해온 걸 전부 한편으로 미뤄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조업, 사출, 아주 생소하지? 경기도 이천 곤지암에서 사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쌓아둔 게 있어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채 1년도 되기 전에 그쪽 업체들이 다 빠져나가더라. 발버둥을 쳤지만 재주가 없었기에 결국 경영 위기가 닥쳤다. 사업체를 축소하고 옮기기를 반복했다. 결국은 김밥 말듯이 말아먹었다. 그리고 요즘 말로 ‘멘붕’이 왔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연극을 하려고 했는데 물론 안 되더라.
두 가지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한 가지만 해도 이룰까 말까니 당연히 안 되더라. 오랜 시간 ‘멘붕’ 상태로 지냈다. 완전한 패닉 상태. 누군가 어떤 얘기를 하면 생각 없이 ‘어’라고만 답했다. 고민이나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때 가구 사업하던 동생이 소주를 마시다가 함께 사업하자고 제안했다. 마찬가지로 ‘어’. 동생과 일을 하다 보니 조금씩 정신이 회복됐고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더라.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미 한 번 흐트러지니까 다시 잡는 게 힘들더라. 이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만 계속하며 지내던 중 친구에게 동업 제안을 받았고, 결국 함께 식당을 운영했다. 가게는 그런대로 잘됐다. 하지만 1년을 채우기도 전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또 들더라고. 내 안에 내재된 연기에 대한 갈망을 꾹꾹 눌러왔으니까. 아버지 사업을 다 접고 나서 나중에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그걸 네가 왜 했어? 네가 완강해서 차마 말리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은 거 하길 바랐는데.” 말리시지(웃음) 그랬으면 허송세월 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이게 양날의 검, 동전의 앞뒷면이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내 연기의 토양이 됐거든.
“더 많은 작품과 다양한 역할을 마음껏 최선을 다해 하고 싶다. 이렇게도 해보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는 성장하는 거니까. 배우는 생각만 해서는 성장할 수 없거든. 작품을 하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거지. 목표는 배우로 늙어 죽는 거다.”
사회적인 경험이 연기에 큰 도움이 된 거지?
지방에서 일하다 5년 만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 바로 대학로에 갔다. 어떻게들 지내나 궁금했는데, 발전이 없어 보였다. 5년 전과 똑같은 연기를 하고 있더라고. 건방진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연기라는 행위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 안주하고 있구나. 당연해지고, 그 당연함이 생활이 되어선 안 되는구나.’ 사회 경험 덕분에 얻은 교훈인 셈이다. 이런 시간을 겪는 동안 결혼도 하고 자식도 생겼다. 연기에 대한 열망, 그 응어리는 나날이 커지기만 해서 아내와 상의 후 결정했다. 연기를 시작하기 위해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아내에게 전부 줬다. 그리고 대학로에 갔다. 1년을 돌아다녔는데 한 편을 못했다. 대학로만 가면 당연히 할 수 있겠지 싶었는데, 뭐지 싶더라. 주사위는 이미 던진 상태였다. 때마침 드라마 작가인 친구 덕에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연기는 연극과 많이 달라서 낯설더라. 현장에 선생이 있는 것도, 책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조언받을 선후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현장에서 혼자 익혀야 했다. 스스로 객관과 주관의 시각을 오가며 말이다. 그리고 별것 아니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좋게 좋게’라는 개념이 있는데, 사회에서 만나는 일반인은 상대에 대한 배려나 화술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지방은 더욱 거칠다. 덕분에 많이 강해졌다.
한국의 사회 통념으로 보자면, 결혼하고 자식도 있는 가장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과감하게 예술계에 뛰어든다는 건 미친 짓이다. 주사위를 던지면서 어떤 확신이 있었나?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사나. 하고 싶은 걸 해야겠더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누구나 객관적인 사회 인식에 맞춰 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나는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사회 인식에 맞춰 산 것도 아니고. 늘 내 판단에 의해 살아왔다. 그러한 판단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연기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건데, 안 그랬다면 욕구 불만 때문에 집에 더 등한시했을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확실하게 하고 나니까 이제는 아내나 애한테 더욱 잘하게 되더라. 기다려준 가족에게 정말 고맙다.
어떤가? 그렇게 갈망하던 연기도 시작했고 기회도 많아졌다. 마음속 응어리를 해결하니 좀 나아졌나? 일종의 작은 목표를 이룬 거지?
욕심은 멈추지 않았다. 더 많은 작품과 다양한 역할을 마음껏 최선을 다해 하고 싶다. 이렇게도 해보고,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는 성장하는 거니까. 배우는 생각만 해서는 성장할 수 없거든. 작품을 하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거지. 목표는 배우로 늙어 죽는 거다. 현실적인 말을 덧붙이자면 죽을 때까지 배우만 해서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제조업이든 식당이든 안 하고 아내와 아이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다행히 요즘 많이 나아지고 있다.
공식 데뷔가 31세에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증권사 직장 상사 역할이었다. 공백이 길어서 현장에서 힘들지는 않았나? 선후배 관계나.
딱히 어려운 건 없었다. 현장에 선배가 있으면 인사하고 후배는 정중하게 대하면 되니까. 다만, 공백 기간이 길다 보니 인간적으로 친한 관계는 많지 않다. 최근에 작품 하면서 알게 된 손병호, 김종수 선배 정도?
만약 30대 초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결정을 할 건가?
일단 돌아가지 않을 거다.(웃음) 너무 힘들었다. 어디에 얘기는 못했지만 솔직히 자살 생각도 했었다. 막막하고 답이 없었으니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시간을 겪지 않나? 30대라, 현재의 나를 다 아는 상태로 돌아간다면 모르겠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 안 돌아갈 거다. 정말로.(웃음)
성격이 강인할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유쾌한 면도 많다. 털털한 동네 삼촌 같은?
괴팍할 때도 있고 수다스러울 때도 있고, 이랬다 저랬다 한다. 감정에 대해 누르고 제어하지 않고 일부러 내버려둔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놀고 싶으면 또 신나는 대로. 아들한테도 그렇다. 절대 사회적인 통념을 들이밀지 않는다. 아버지로서의 권위만 지키다 보면 아이와 같이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수다스럽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반면 혼자만의 대화를 할 수 있는 낚시나 등산도 좋아한다. 배우에게는 이 시간이 꼭 필요하다. 일종의 ‘리프레시’. 새로운 것에 대한 고민 또는 다 비우는 시간. 지금이 딱 비우는 시간이다. 비워야 새로운 역할을 채울 수 있거든.
정신적인 에너지 운용이 자유로운 편이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콘크리트처럼 경직되는 것, 고착화되는 건 배우로서 경계해야 한다.
40대 후반에 접어든 박성근의 화두는?
방금 얘기한, 연기를 할 때 정신이나 몸이 하나로 고착화되지 않는 것이 현재 나의 가장 큰 관심사다. 정말 평생 연기하다 죽고 싶거든.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보다 더 연기를 잘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공부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떤 방식이 됐든 말이다. 낚시나, 등산을 하며 내 속으로 들어가보는 동굴의 시간, 애랑 노는 시간, 친구랑 술 마시는 시간 등. 어떤 시간이든 소중히 보내며 그 속에서 내 나름의 인생 탐구를 할 거다. 그 시간들이 축적되고 또 내게 좋은 기회가 자주 찾아온다면 자연스레 연기 스펙트럼도 더 넓어지리라 믿는다. 이게 내 목표다. 아, 물론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연기 말고 예능이나 다른 분야에는 욕심이 없나?
내가 말을 잘 못한다. 이런 자리에서 답변하는 건 내 의견을 얘기하는 거라 괜찮지만, 예능은 순발력이니까. 치고 들어가서 옆 사람을 눌러야 하는데, 내 정서와는 안 맞는다. 연기라면 어떤 역할이라도 다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뭘 물어도 결국에는 연기 얘기네? 그 욕심으로 해외 진출까지 생각하는 건가?
영어를 못한다. 한국말로 한다면야 언제든 오케이.
차기작이 현빈과 손예진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 <협상>이다. 간략하게 소개해줄 수 있나?
시나리오가 간결하다. 딱 봤을 때 군더더기가 없는 작품. 중령급 작전관 역을 맡았다. 섭외가 들어왔길래 머리부터 군인처럼 단정하게 하고 미팅장에 갔더니 작가님이 “제가 상상한 모습대로 와주셨네요. 해주시면 되겠어요”라고 바로 오케이를 하더라.(웃음) <비밀의 숲>도 그랬다. 내면이 만들어지는 건 오래 걸리니까, 늘 외형적인 이미지부터 구상하는 편이거든. 머리나 몸무게 그리고 안경 유무까지. 작전관이란 역할은 인상이 센 캐릭터라 안경을 벗고 촬영했다. 촬영은 끝났다. 올해 11월이나 내년 봄쯤 개봉할 예정이다. 재미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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