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난 환자 중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
운수회사를 다니며 종일 운전하는 분이 왔다. 오래전부터 간염이 있었는데 치료를 받지 않고 있다가 배가 불러오고 기운이 없어 온 거다. 검사를 해보니 암이 머리까지 전이된 급성 악화로 살 날이 머지않은 상태였다. 부양해줄 가족은 별거 중인 아내와 사촌 누나뿐이라 했다. 검사비가 1백만원이 나왔는데 때마침 사촌 누나가 왔지만 그걸 못 내더라. 돈이 없어서. 별거하는 아내도 마찬가지였고. 환자도 돈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치료받을 형편이 아니라고만 하고. 결국 가장 싸고 의료보험이 잘된 병원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러 갔다. 돈이 뭐길래 평생 운전하며 살았는데, 남은 것도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생계를 유지할 돈이나 있는 걸까? 가족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1백만원조차 못 내고. 한번 당직 설 때마다 이렇게 뇌리에 남는 환자가 4, 5명은 된다.
두 권의 저서 곳곳에 응급실로 이송되기 전 환자의 사고 현장이나 고통받는 상황을 묘사했다. 이런 묘사가 가능하려면 작가가 환자와 동일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모든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며 얘기를 들으면 사회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경위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나는 예전부터 문청 기질이 있어서 나 자신의 불행이나 불운,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집중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이런 기질 덕에 환자를 볼 때도 그들의 불행에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다. 글 쓸 때는 그 사람의 상황, 말이나 행동 하나까지 보다 가까이서 상상하고 헤아리려고 한다.
쓸 때마다 끔찍하고 처참한 상상을 한다는 건데, 괜찮나? 굉장히 혼란스러울 것 같다.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지독한 하루>에 방충망에서 떨어진 남매의 사연이 있다.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다리가 부러지지만 산다. 글 쓸 때는 내가 그 환자의 입장이 돼서 묘사를 해야 한다. 그 입장이 되려고 1주일 이상 계속 생각한다. 어떤 느낌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몰입하다 보면 버스 타고 가다가 복받쳐 울곤 한다. 남매의 엄마 대사를 쓰면서는 단어 하나를 적을 때마다 울었다. ‘우리 집의 모든 창을 발라버리고 평생 살 거다. 내 자식이 방충망에서 떨어져서 죽었는데, 그딴 창 같은 거 나는 안 보고 살 거다.’ 대략 이런 문장이었다. 생각해내기까지 상당히 힘들지만,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만약은 없다>의 ‘죽음에 관하여’ 말미에선 생명과 죽음에 대한 담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까지 건드린다. 이런 지점이 남궁인 글의 색깔인 것 같다.
그 부분을 쓰고 나서 좀 놀랐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담도암 말기 환자가 자의로 집에 돌아갔는데 고통이 심해져 병원으로 오다 차량 충돌 사고를 냈다. 상대는 죽었고 담도암 말기 환자는 살았다. 처음에는 분했다. 내가 보낸 환자가 사람을 죽인 거니까. 근데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그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을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직접 집에 간다고 선택한 거다. 당신은 사람을 죽일 거니까 병원에 가둬야겠다고 할 수 없다. 죽음 앞에 있는 자를 탓하기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말미에 ‘생명과 우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도의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의 우연’ ‘생명이 얼기설기 위태롭게 얽힌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적었다. 때문에 ‘죽음에 관해 쉽게 왈가불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고. ‘그 처참한 시체만을 눈앞에서 볼 뿐 아무것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죽음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도’ 라고 적은 거다.
모든 의사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어쩔 수 없었네. 이런 일도 있네’ 하고 넘길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한 거다. ‘이 죽음은 무엇인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답은 없더라. 어쨌든 내 환자 한 명이 죽었고 또 한 명이 죽었다. 시공이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본래 그렇게까지 격하게 쓰지 않는 편이라 써놓고 좀 놀랐다.
“글 쓸 때는 내가 그 환자의 입장이 돼서 묘사를 해야 한다. 그 입장이 되려고 1주일 이상 계속 생각한다. 어떤 느낌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그렇게 몰입하다 보면 버스 타고 가다 울거나 길 가다 복받쳐 울곤 한다.”
인간다움에 대한 강인하고 묵직한 온기를 가지는 이유는 뭘까? 보통 의사가 다 그런가?
보통 의사들은 감각이 무뎌지고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당연할 수도 있다. 환자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의사는 훌륭한 의사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사망 선언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족이 보기에 의사가 이성이 아닌 감정에 휘둘려 판단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어떨 것 같나? 가족 입장에서 의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닌 거다. 환자는 상황에 맞는 의학적 지식만을 적용하며 이성적으로 대하는 게 옳다. 모두를 위한 일이다. 다만, 나는 퇴근 후 인상 깊었던 환자에 대해 잊지 않고 상기하는 습관이 있다. 그 환자가 나에게 남긴 말로 형용하기 힘든 사유나 감정, 감각 등을 작가적 자아로서 면밀히 되짚어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작가로서 욕심도 많네?
당연하다. 내가 쓴 글에 애정이 있다. 글 쓰는 사람이 자기 글에 애정이 있으면 남들한테 보이고 싶은 욕심도 있는 거다. 등단 과정을 거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 글을 알릴 수단은 SNS와 미디어 뿐이다. 어쨌든 글을 더 알릴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해서 내 성향과 맞지 않지만 열심히 했다. 촬영 있으면 촬영도 하고 독자 만남 있으면 준비해서 나가고. 요청이 있으면 보여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스스로 튀는 성격은 아니지만, 글에 대한 욕심으로 그런 일을 계속해온 거다.
얼마 전 신작 <지독한 하루>를 출간했다. 전작 <만약은 없다>와는 어떻게 다른가?
<만약은 없다>는 우울함 때문에 죽고자 한 적 있는 의사가 환자를 보면서 그들의 아픔에 깊이 동조하고 동시에 개인적인 사유나 감정 등을 함께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의사가 쓴 책이야 많지만 이런 방식은 확실히 드물다.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작가도 있네?’ 싶었을 거다. 그리고 첫 책 출간 이후 다른 방향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생기더라. <만약은 없다>를 통해 남궁인의 자아와 글, 캐릭터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알렸으니, 이번엔 외부적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지독한 하루>에서는 소방공무원, 의료진 폭력이나 아동학대 내지는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담았다.
<만약은 없다>에서는 응급실 이야기와 나를 함께 담았다면, <지독한 하루>에서는 현실 그 자체에 초점을 둔 거네?
현실의 얘기를 더 적확하게 하고 싶었다. 제목이 <지독한 하루>다. 읽다 보면 이런 힘겨운 사람이 있구나, 싶을 거다. 궁극적으로 이런 지독한 사회, 힘겨운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다른 장르도 도전할 생각이 있나?
2~3개월 내로 독서 에세이를 낼 예정이다. 말랑말랑한 글도 곧잘 쓰는 편이라 비교적 가벼운 책도 따로 내볼 예정이다. 또 장편 소설로 아예 픽션의 세계로 가볼까도 생각 중이다. 내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주인공이 처절한 사유를 한다든지, 처절한 일을 계속 겪는다든지. 나를 닮은 소설일 거다.
밴드 활동도 하지 않나?
직장인 아마추어 밴드 ‘줄라이’에서 신시사이저를 맡고 있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 클래식은 웬만한 건 다 친다. 라흐마니노프나 쇼팽을 좋아한다. 혼자 치다 보니까 밴드도 해보고 싶어서 8년 전 밴드에 들어갔다. 그때 재즈 피아노도 배웠고. 이것도 일종의 취미 생활이다. 글도 처음에는 취미였다. 내가 의욕만 있으면 열심히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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