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 | 1981
·<청년경찰> 2017
·<안내견> 2016
·<코알라> 2013
·<굿바이 마이 스마일> 2010
박서준과 강하늘은 영화 내내 뛴다. 진짜 토할 때까지 뛴다. 달리는 청년들에서 <청년경찰>을 구상하게 됐나?
장면보다는 경찰대라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소재 안의 재미있는 딜레마에서 출발했다. 경찰대학교 학생은 아직 경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대학생도 아니다. 일단 어딘가 소속은 되어 있는데 ‘이걸 계속 하는 게 맞을까?’라고 고민하는 모습은 공감대가 넓다고 생각했다. 회사원도 다들 이런 생각하잖아. 나처럼 쇼박스를 계속 다니는 게 맞을까 고민하다 감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아레나>를 계속 다녀야 할까 고민하다 때려치울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주인공들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니까 좋더라고.
그러고 보니 영화사 잘 다니다 관두고 감독이 됐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사로잡은 영화가 세 편 있다. <굿 윌 헌팅> <제리 맥과이어> 그리고 <여인의 향기>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윌리엄 프리드킨이 만든 <엑소시스트> <프렌치 커넥션> 같은 좀 하드한 영화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직접 저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생각했고, 결심했고, 행동했다.
첫 상업 영화가 <청년경찰>이다. 크랭크인할 때 꽤 떨렸을 거 같은데?
경찰대에 입학해 훈련받으면서 두 주인공이 친해지기까지가 딱 8회 차 분량이었는데, 우리는 일부러 순서대로 찍었다. 그래서 첫 촬영은 입학 신이다. 보조 촬영자들이 엄청 많은 데다, 단편 작업 이후 오랜만에 촬영 현장에 복귀한 터라 떨렸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 상황이라 금방 적응했다. 근데 떨리면 티가 나는 편이어서 다들 눈치 챘을 수도 있다.(웃음)
박서준과 강하늘의 첫인상에 대해 얘기해보자. 친해진 이후 생각이 달라졌나?
서준 씨는 키가 너무 크니까 내가 올려다봐야 했는데 영화 끝나고 나서는 키 말고 다른 이유 때문에 올려다보게 됐다. 워낙 연기를 잘하고 인간 자체도 참 훌륭하다. 하늘 씨는 처음부터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냥 똑똑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현명하고 마음을 넓게 쓰기까지 생각보다 굴곡이 있는 삶을 살았구나, 뭐 그런 걸 알게 됐다. 둘 다 정말 좋은 사람, 좋은 배우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극찬한 배우들은 감독의 첫인상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
물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냥 동네 바보 형처럼 본 것 같다. 그런데 영화 다 끝나고 나서 ‘오, 이 형 봐라? 바보는 아니네?’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늘 씨가 회사 사람들과 전화로 우리 영화 얘기 하면서 ‘역시 천재네’라고 하는 걸 내가 들었다. 천재까진 아닌데 워낙 바보로 봐서 좀 놀란 거 같다.(웃음)
영화는 경쾌하고 유쾌한데 소재가 너무 무겁다는 평이 많다. 왜 그랬나?
나는 이 영화가 코미디라고 생각 안 했다. 코미디라면 웃기려는 의도가 있어야 하는데, 주인공들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니까 관객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플롯은 성장이다. ‘내가 경찰이 되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청년들이 ‘나 경찰이 될래’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려면 어른이 해결하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 어두운 순간이 와야 했다. 젊은 청년이 사회적 약자를 구하는 이야기에서, 그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무거운 사건이 무엇일까 공부를 많이 해서 얻은 소재다. 그리고 영화 보면서 경각심을 가졌으면 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무고한 학생이 희생되는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사회가 실패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도 싶었고.
주인공들이 생전 처음 본,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여자를 이렇게까지 도와줄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인가? 알고 보니 경찰로서의 사명감과 소명 의식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몰고 간 건지?
두 부분 다 포함되는데, 퍼센티지를 다르게 봐야 한다. 만약 내가 길거리에서 중학생이 강아지를 발로 차고 있는 것을 봤다면 나는 분명 다가가서 제지를 할 거다. 왜냐면 내가 힘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조폭’이 여자를 괴롭히고 있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거다. 왜냐면 나는 그 정도의 힘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 두 사람은 2년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아왔다. 뛰는 데는 익숙하다. 경찰이 될 마음까지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몸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라고 봤다. 틀에 박힌 훈련에 불과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단련된 거다. 그 상황에서 뛰쳐나갈 수 있는 하드웨어는 만들어진 상태에서 소프트웨어가 완성돼가는 것이 영화의 흐름이었다.
이 영화가 코미디가 아니라면, 어떤 장르인가?
작법적으로 봤을 때 청춘물과 실종 수사극의 합체다. 그 두 장르의 하이브리드인데 되게 꼬아놓았다. 은근히 서스펜스와 스릴, 공포도 좀 넣었다. 연출자로서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좀 더 과감하게 충돌해도 될 것 같았다. 모든 성장극에는 성장통과 충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피해자를 발견했을 때 트라우마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학교에 돌아갔다 다시 나오기까지 개연성을 얻기 힘들다. 관객을 얼릴 만한 새로운 충격 있어야 한다고 고민했다.
“배우의 매력을 끌어내는 것 또한 연출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줬을 때 기성복같이 다 만들어진 옷을 주기보다 서로 맞춰가면서 테일러링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그래야 몸에 딱 붙는 옷이 나오고, 그래야 사람들이 ‘와, 쩐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시사회 반응이 좋아서 다들 ‘이 영화 잘된다’라는 분위기다.
블라인드 시사를 처음 했는데, 97분짜리 미완성 상태였다. 음악도 가짜였고, 사운드도 녹음 안 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많이들 웃더라고. 2차 블라인드 시사 때는 평점이 더 높았다. 최종적으로 롯데 임원들과 이야기 나눴는데 다들 고무적이었다. 막상 언론 시사는 무서워서 못 들어갔다. 안에서 영화사 직원들이 문자를 보내주더라고. 박수와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고.
좋은 감독이 되려면 이런 자질이 필요하구나 새삼 깨달은 점이 있나?
어쨌거나 좋은 스태프와 좋은 배우가 가장 중요하구나, 깨달았다. 조상윤 촬영감독님, 박준규 조명감독님, 최기호 미술감독님 그리고 배우 박서준과 강하늘. 이들과는 새로운 걸 함께 파고 싶은 욕망이 굉장히 커졌다. 서준 씨도 그의 얼굴을 많이 봐서 잘할 수 있는 것과 해보지 않은 것들이 무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서준 씨가 기회를 준다면 또 다른 장르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함께해보고 싶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 하려는 마음이 마구 생긴다. 이 영화를 통해 배운 건 결국 사람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
누군가는 ‘배우의 매력으로만 끌고 가는 영화’라고 이야기하던데?
배우의 매력을 끌어내는 것 또한 연출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줬을 때 기성복같이 다 만들어진 옷을 주기보다 서로 맞춰가면서 테일러링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그래야 몸에 딱 붙는 옷이 나오고, 그래야 사람들이 ‘와, 쩐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어쨌거나 벌써 약간 축제 분위기 아닌가?
요즘 어마어마한 인터뷰와 무대 인사를 소화하고 있다. 아직 기자와 관객이 좋아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스코어는 나와봐야 아는 거니까. 흥행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나는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너무 바빠서 쓰고 싶은 시나리오를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차분히 또 몰두해야겠지.
청년은 늘 푸르다. 지금 청춘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매우 그렇다. 청춘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열정의 문제다. 오히려 영화 한 편을 만들고 난 뒤 더 겁이 많아졌고, 두려움도 커졌다.
왜?
도전을 더 크게 해야 하니까. 이제 또 새로운 게임이 시작될 거다.
이상덕 | 1987
·<여자들> 2017
·<블루 먼데이의 여자> 2014
<여자들>이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어떻게 만들게 된 영화인가?
한 달에 한 편씩 챕터별로 찍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최시형 배우와 이야기를 하다가 남는 게 시간이니까 한 달에 한 편씩 찍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 한 편을 쓰고 나서 캐스팅하고, 촬영을 했다. 그렇게 매월 한 편씩 찍은 것을 묶어서 만든 영화다. 작년에 영화제에 나갔고, 운 좋게 배급까지 하게 됐다.
보통 장편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여자들>은 매월 시나리오를 한 편씩 쓰면서 만든 작품이라 영화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영화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구조를 갖추고 나서부터는 스스로 성장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내 손을 떠나서 진행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는 듯했다. 그러한 점은 촬영 방법보다 제작 방식 때문에 생긴 특색이라고 본다.
<여자들>에서 주인공 시형은 글을 쓴다. 시형은 무슨 글을 쓴 건가?
에세이에 가깝다. 시형과 여자들의 만남이 마치 시형이 쓴 에세이로 느껴졌으면 했다. 시형이 앞으로 써야 하는 글은 자기 글이겠지. 몇몇 사람들은 시형의 태도가 답답하다고 하는데, 시형은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나름 노력을 한다. 그는 늘 책상에 앉아 있다. 시형이 계속 쓰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또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예술가 유형은 아니지만 대신 영화를 오랫동안 만들고 싶다. 많이 만들다 보면 하나 걸리는 게 있겠지.
영화를 많이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능력 아닌가?
방법은 계속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이를테면 개인 투자를 받는 방법, 텀블벅을 활용하는 법, 한 달에 한 편 찍는 것은 내 나름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해볼까를 고민한다.
제작 방식에 대한 고민이 클 것 같다. 영화는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 영화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다양한 영화가 나와야 하는데, 그러한 시장이 구축되어 있지도 않다. 다양한 방법으로 제작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양한 작품이 부족하다는 것은 투자자의 취향이 다양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런 문제도 있다. <여자들>보다 먼저 쓴 장편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응모했는데 모두 떨어졌다. 제작 지원을 못 받는 시나리오는 휴지 쪼가리가 된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답답해서 방법을 찾아봐서 만든 게 <여자들>이었다.
영화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성공적인 케이스가 될 수 있겠다.
영화제 끝나고 만난 분들에게 영화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이 정도면 나도 찍을 수 있겠다고 말하더라. 내 영화가 일종의 제작 가이드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이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의 제작 방법도 있으니, 고민하다 보면 다른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영화 제작의 어려운 점은 내가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단계부터는 영업 활동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엄청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작은 영화라도 영업은 다 해야 되더라. 그건 만든 사람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한다. 홍보든 영업이든 못하는 분들도 있고, 잘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영화감독을 꿈꾸게 한 영화가 있나?
중국 하얼빈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잘 안 가고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그때 영화를 많이 봤다. 함께 지내는 형들이 영화를 엄청 좋아했거든. 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 영화판 어디쯤에서 일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본 영화들이 내 자양분이 되었다.
하얼빈에서 어떤 영화들을 본 건가?
다양하다.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형이 있었고, B급 영화만 보는 형도 있었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샘 페킨파 영화나, <엘 토포> 같은 멕시칸 아트 무비, 주성치 마니아도 있었고, 고다르 마니아도 있었다. 다양한 영화 팬들과 지낼 수 있도록 영화의 신이 도와준 것 같다.
“사운드가 안 좋았거든. 보는데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중간에 상영관을 나왔다. 첫 상영이라 배우, 지인, 다른 감독들도 다 왔는데 너무 부끄럽더라. 밖에서 축구 좀 보다가 다시 들어가 관객과의 대화를 했다. 말하기 싫고 질문도 받고 싶지 않아서 계속 바닥만 보고 얘기했다.”
영화의 신이 존재하나?
존재한다. 영화의 신, 영상의 신 이렇게 있다. 촬영할 때 의도치 않았는데 잘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오키나와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는데, 밤에 조명이 별로 없어서 야간 촬영이 걱정이었다. 그때 숙소 앞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덕분에 예상 밖의 멋진 영상을 건졌다. 그럴 때마다 영화의 신에게 감사드린다.
처음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처음 해외여행을 간 곳은 어디였나?
아내와 함께한 일본 여행이다.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무척 좋아한다. 그때 <노르웨이의 숲>이 개봉했을 때였다. 한국은 늦게 개봉해서 일본으로 여행 갈 겸 함께 가서 영화를 봤다. 일본어를 못 알아들었지만, 그 책을 너무 많이 봐서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겠더라.
처음 느낀 충격은 무엇이었나?
하얼빈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리고 영하 30℃까지 떨어질 정도로 춥다. 기숙사 앞 식당에 밥 먹으러 가는데 기찻길에 아저씨 한 분이 누워 있었다. 3일 동안 누워 있었다. 알고 보니 얼어 죽은 시체였다. 그때 시체를 처음 봤다. 그 이후로 하얼빈에서 얼어 죽은 사람을 자주 봤고, 놀랍지도 않았다. 타인의 죽음을 자주 본 것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하루키를 좋아하면 죽음과 연관된 이야기를 하게 마련인데, 내 영화나 시나리오에는 죽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이 별것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었다면 마음에 남아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10대를 보낸 경험은 특별한 것 같다. 처음 마신 술도 기억하나?
하피라고 하얼빈에서 파는 맥주인데, 2003년 당시 한국 돈으로 한 병에 2백원 정도 했다. 당시 기숙사 형들과 술을 짝으로 시켜서 마시곤 했다. 매일 술 마시고 토하기를 반복했을 정도다. 그때 마신 술이 평생 마신 술의 반 이상은 될 거다. 그래서 요즘에는 술을 잘 안 마신다. 당시에는 미성년자에 대한 규제가 없어서 술 담배를 자유롭게 했다. 정말이지 대륙은 달랐다.
처음 영화를 만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대학에서 찍은 습작이 첫 작업이다. 신기한 게 대다수 학생들의 초기 단편은 당시 영향을 받은 영화를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때는 박찬욱 감독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나도 그로테스크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지울까 말까 고민했다. 하하. 그래도 무척 즐거웠다. 처음 영화를 만들다 보니 모든 게 재미있었다. 영화는 한 번 시작하면 못 놓는다.
처음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는 어땠나?
엄청 떨렸다. 처음에는 누구나 힘들어한다. <여자들> 첫 상영 때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사운드가 안 좋았거든. 보는데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중간에 상영관을 나왔다. 첫 상영이라 배우, 지인, 다른 감독들도 다 왔는데 너무 부끄럽더라. 밖에서 축구 좀 보다가 다시 들어가 관객과의 대화를 했다. 말하기 싫고 질문도 받고 싶지 않아서 계속 바닥만 보고 얘기했다. 나중에는 관객에게 너무 죄송했다. 처음은 부끄럽고 힘들다.
영화감독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에는 돈을 못 벌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감독의 경제적인 문제는 다양한 것 같다. 개인 활동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버티는 분들이 있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다. 상업 영화팀에서 일하며 자신의 영화를 준비하는 분들도 있다. 또 흔히 말하는 금수저도 영화계에 있는 것 같다. 젊은 감독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허정 | 1981
·<장산범> 2017
·<숨바꼭질> 2013
·<경복> 2012
·<저주의 기간> 2010
극장에서 본 첫 영화는 무엇인가?
<구니스>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온 영화일 텐데, 또래 감독들은 그 당시에 본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를 원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더라.
영화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나?
친구들과 재미 삼아 찍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게 첫 작업일 것이다. 그때는 무척 즐거웠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 자체도 재미있었고, 글로만 표현된 것을 실제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전부 다 재미있었다.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처음 접했으니까.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과정 또한 재미있는 경험인 것 같다.
잘 모르니까 내 기준도 낮고,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모호하거나 유치하거나 그랬다. 그런데 점차 나만의 기준이 생겨나면서 기대치도 높아지더라. 예전의 그 느낌이 그립기도 하다.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는 없겠지. 영화는 다른 분야와 달리 혼자서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상업 영화를 제작할 때는 영화 외적인 것들에도 신경이 많이 쓰일 테고….
다행히 제작사가 있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괜찮았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들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많은 소통이 필요한 과정이 어렵다.
자신이 만든 영화를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많이 떨렸나?
영화 아카데미 다닐 때 내 작품을 처음 상영했는데, 여럿에게 보여주니 긴장되더라. 더군다나 그 영화가 코미디였는데, 아무도 안 웃는 거다. 코미디가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를 느끼며 안 좋은 기억만 남았다.
왜 코미디를 만든 건가?
지금은 스릴러를 선보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다양한 장르를 좋아했다. 당시 내가 생각한 이야기가 코미디였다. 그냥 썼는데 코미디가 나왔고, 또 내가 코미디도 좋아한다. 좋아하지만 잘 못 만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아카데미에서도 코미디 만들고 많이 혼났었다. 하하.
영화를 만들다 보면 처음 구상한 것과 많이 달라진다고들 하더라.
그렇게 된다. 내가 생각한 느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명확하게 다가가지 않을 때가 있다.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다른 정서가 더 필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고, 처음의 생각과 바뀌는 부분들도 생긴다. 바뀐 부분이 좋을 때도 있지만, 처음 의도한 것을 밀고 나갔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다.
그래도 영화를 만드는 다양한 과정에서 즐거운 지점이 있을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점이 의미 있다. 또 생각지 못한 느낌이나 배우를 발견했을 때도 재미있다.
<장산범> 시나리오를 썼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재미있다 혹은 신선하다고 하는 평이 있었다. 아쉬운 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더라, 평가는 호불호가 갈렸던 것 같다. 그런 의견 중에서 작품에 도움이 되는 점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영화 <장산범>은 소리를 소재로 한 스릴러다. 소리에 홀린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자신에게 익숙한 소리가 다른 존재에게서 들리면 서스펜스가 생기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았다. 또 그 소리가 자신이 아는 소리가 맞는지 갈등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전작인 <숨바꼭질>을 봤을 때, 아파트라는 익숙한 공간이 무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장산범> 역시 일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했다.
그래야 더 불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고 편안하다고 여기는 곳에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으면 불안감과 공포심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은 자신이 겪을 일이라고 생각해야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설정하면 감정이 덜 이입되는 것 같다.
상업 영화 두 편을 제작했다. 영화를 제작하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 스트레스를 받나?
상업 영화를 제작할 때는 인력이 많아서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 직접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보다는 영화 내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시나리오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고, 객관적으로 봐야 하는 게 어렵다.
그 객관성은 어떻게 유지하나?
나도 그 방법을 찾고 싶다. 하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편이다. 예전 단편 영화 찍을 때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새로운 눈으로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 게 쉽지 않다.
“내가 생각한 느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명확하게 다가가지 않을 때가 있다.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다른 정서가 더 필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고, 처음의 생각과 바뀌는 부분들도 생긴다. 바뀐 부분이 좋을 때도 있지만, 처음 의도한 것을 밀고 나갔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다. 습작까지 하면 꽤 많은 양의 시나리오를 썼을 텐데,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방법이 있나?
안 써질 때는 답이 없다. 나는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여행 간 곳에서 힌트를 많이 얻는다. 시나리오에 폐교가 나온다고 하면 폐교를 찾아가고, 그런 공간을 많이 찾아간다. 그런데 일단 앉아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앉아서 써야지 뭐라도 나온다.
영화를 시작한 이후로 좌절을 경험한 적이 있나?
학교 다닐 때였다. 3학년 때 영화를 찍었는데, 스스로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간 욕심을 부리다 보니 난해한 지점들이 생겼다. 그렇게 영화를 만들고 보니 내 영화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된다는 느낌이 들더라. 내가 생각한 이야기는 이러저러한 정서인데, 막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한 정서, 느낌이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있는 것 같더라. 졸업 작품도 조금 더 시도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모니터링을 받아보니 반응이 좋지 않아 그때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좌절은 항상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좌절이나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 같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또 아카데미도 다녔다. 공부를 오래 해야 하는 분야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문제도 있을 법하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고민은 어떻게 해결했나?
제작 지원을 많이 받았다. 시나리오 기획개발지원 같은 것을 받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아카데미에서 다른 활동을 이어갔다. 다행히 <숨바꼭질>이 빨리 진행됐다. 사실 언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니 많은 감독 지망생이 힘들어한다. 나 역시 준비 기간이 길었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감독이라는 직업이 어디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내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영화화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생활비든 뭐든 벌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안 써지고 하는 날들을 견뎌내야 하는 게 어렵다.
소위 밀레니엄 세대라고 불리는 1990년대생들은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접하며 자랐고, 제작 툴도 더 간소해진 시대에 영화를 시작했다. 유튜브와 같이 유통 방법 또한 확장되어 기회가 많아졌다. 1980년대생 젊은 감독이 더 젊은 밀레니엄 세대 영화감독 지망생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자기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왜냐하면 워낙 이야기가 많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사람만의 무언가를 보여줄 때다. 그래야만 영화가 더 다양해질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것을 너무 많이 접하다 보면 나만의 것을 찾는 게 어려울 수 있다. 영화 형식도 상업 영화, 독립 영화 등 다양하다.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장르에 맞는지 찾아가야 한다.
신준 | 1986
·<용순> 2017
·<용순, 열여덟 번째 여름> 2014
·<선지해장국> 2012
첫 장편 영화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용순>에 대한 평이 참 좋다.
마지막 GV 때 김혜수 선배님이 오셔서 좋은 얘기를 한참 해주셨다. 개인 스케줄을 따로 빼서 시사회 때도 와주시고, 그게 일단 굉장히 감사하다. 영화를 통해 만난 많은 분들이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용순>팀 자체가 기사 댓글을 전부 뒤져보는 편인데(웃음) 악플부터 선플까지 다 본다. 악플러 중에는 ‘이 댓글을 감독이 보겠지?’라고 하면서 쓰는 분도 있던데, 정말 감독인 내가 다 봤다. 속으로 욱하는 글도 있고, 만나서 직접 해명하고 싶을 때도 있다. 어떤 제작자는 자신의 영화에 달린 악플을 보고 직접 댓글을 단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이 영화 제작한 누군데’ 하면서. 그리고 한 달 뒤부터 본격적으로 후회를 했는데 그 후회를 거의 20년 가까이 하고 있다고. 우리 영화를 단순히 밝고 단조로운 영화로 쉽게 흘려보낼 수도 있는데 혜수 선배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좋게 해석해주셔서 그래도 이 영화를 좋아해주는 분이 한 분은 계시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났다.
한 명이라니, 김혜수 씨랑 나까지 두 명의 팬은 확보한 셈이다. 영화에 대한 여러 평 중 속으로 뜨끔한 부분은 없나? 놓치고 있었던 점을 지적했다든지.
솔직히 얘기하면 이 시나리오는 너무 오랫동안, 굉장히 많이 썼다. 그러다 보니 더 세심하고 꼼꼼하게 완성했는데, 오히려 직접 만나서 설명해주고 싶은 평들이 있었다. 지적한 그 부분이 이 영화의 어디쯤에 있는지 알려주고 싶더라고.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이 장면에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기회가 언젠가 또 있지 않을까 싶다. 어제 <용순>팀과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거기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 고등학생 용순과 체육 선생님의 관계가 영화의 주요한 소재인데, 이 부분을 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접근했다. 근데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말라’는 옛말이 있지 않나. 그런 점을 간과해서 관객이 궁극적으로 불편해하는 지점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보고 색다르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영화 <용순>의 포스터는 참 청량하다. 그래서 여고생의 첫사랑을 다룬 ‘순정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러 갔다 배신당했다는 반응이 많다. 어떻게 생각하나?
여고생은 풋풋하고 사랑스럽기만 해야 한다는 선입견에 대해 다른 시도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용순이는 예쁘지만 이상한 소녀다. 그 남다른 캐릭터를 어떻게 포스터에 담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또 너무 세게 나타내는 것 또한 여고생에 대한 편견이 될 것 같았다. 영화를 다 보고 포스터를 다시 보면 달리 와 닿는 지점이 있을 거다.
아마 수없이 많이 받은 질문일 거다. 25분짜리 단편을 장편으로 다시 만들었다.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썼나?
단편 영화를 만들고 나서 제작사 아토(ATO)에서 장편 영화 제의를 해왔다. <용순>이 극장에 걸리기까지 3년 정도 걸렸다. 그동안 굉장히 다양한 버전의 ‘용순’이를 썼다. 최종 버전에선 육상부 용순이를 그렸지만, 관현악부 용순이도 있었고, 성격이 더 센 용순이와 온화한 용순이 등 여러 가지였다. 단편 영화를 만들 때 이미 트리트먼트에 장편 버전의 내용이 있어 그중 취사 선택하고, 주변 인물들을 그리는 데 좀 더 신경 써서 탄생한 거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봐도 굉장히 상냥한 사람 같다. 현장에서는 막 돌변하는 거 아닌가?
나는 현장에서도 편안하게 있다. 늘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말도 경청한다.
그렇지만 늘 변수와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나. 그때도 이렇게 상냥하다고?
판단이 굉장히 빠른 편이다. 멘탈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나도 다른 영화 현장에서 일해봤는데, 대다수 연출자가 예민하고 곤두서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허허, 웃고 있으면 오히려 스태프들이 걱정한다. 하하. ‘아니 저 감독은 왜 웃고 있지?’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현장에 놀러 온 어떤 분이 “이렇게 웃고 있는 감독은 처음 봤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다. 물론 나중에는 모두 내가 워낙에 이런 성격인 걸 알고 받아들여줬다.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굉장히 기상천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어떤 사건이 중심이 되고, 그 속의 인물은 그냥 로봇 같은 느낌이 날 때가 있다.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펼쳐지고 그걸 겪어내는 인물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이 적성에 딱 맞나 보다. 자신의 적성은 언제 찾았나?
고등학교를 다니던 2003년쯤에 참 좋은 한국 영화가 많이 나왔다. <살인의 추억>부터 <올드보이>까지. 집 근처 롯데 시네마에서 영화를 한 편씩 보고 집까지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불현듯 ‘아, 나도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감독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박찬욱 감독님도 그렇고 봉준호 감독님도 영화 전공자가 아니더라고. 그래서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일단 들어간 뒤 동아리나 뭐 이런 활동을 통해 영화를 해봐야지 했다. 근데 내가 착각한 것이 그 감독님들은 이미 20년 전에 대학을 다니셨던 세대라는 점이었다. 하하. 그럼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군대를 다녀와서 영화 전공으로 대학을 다시 들어갔다.
영화 현장 경험도 꽤 되겠네?
영화과 들어가기 전에는 영화 현장을 많이 다녔다. 촬영장에서 차바퀴에 발이 깔린 적이 있었는데, 아무도 내 걱정을 해주지 않더라고.(웃음) 열심히 일하면서 느낀 점이, 나도 자신에게 핑계를 대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영화 공부를 하진 않지만 현장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어’라는 자기 위안의 의미가 컸다. 그냥 일만 했던 거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 영화과를 다니면서 영화를 연출하기 위한 나만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용순> 현장 스태프 중 가장 어렸다고?
주요 스태프 중에서 내가 가장 어리다. 조감독도 형이고, 연출부의 가장 어린 분도 나보다 누나다. 게다가 내가 현장에서 늘 웃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다 보니 뭔가 불안한 점도 많았을 것 같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 타협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결정해야 했는데, 내가 타협하겠다고 했을 때 못미더운 상황도 발생하고. 그런데 다 끝나고 보니 내가 그 선을 잘 구분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렇게 대안을 많이 생각해놓은 감독을 본 적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웃으면서 칭찬을 하는데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거다.(웃음)
처음으로 완성한 시나리오는 어떤 내용인가?
내가 원래 무당 이야기를 되게 좋아한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 것 같아서 일단 아끼고 있는데 무당 할머니와 아이에 관한 거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용순이였고. 아이 이야기를 개발해서 <용순>이 탄생한 셈이다. 지금도 할머니 무당 이야기를 장편으로 쓰고 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세밀하게 연출하고 싶나?
보다 보면 꽂히는 순간이 있는 영화들이 있더라고. 나도 저렇게 ‘어느 한 장면 잊히지 않는 확실한 무언가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자주 이야기하더라. 어떤 의미인가? 모든 영화는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굉장히 기상천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어떤 사건이 중심이 되고, 그 속의 인물은 그냥 로봇 같은 느낌이 날 때가 있다.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펼쳐지고 그걸 겪어내는 인물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재난 영화를 만들더라도 누군가는 울고만 있고 누군가는 사람들을 구하러 뛰어다니고 이런 거 말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다양한 인간상을 담고 싶다.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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