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건디 컬러 터틀넥 니트는 H&M, 벨벳 소재 셔츠는 H&M 스튜디오 컬렉션 제품.
“미국에서 보는 오디션은 내가 연기를 얼마나 잘하나 점수를 매기는 개념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이 캐릭터와 맞는지를 찾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평가받는다는 생각 대신 나를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임하기 때문에 훨씬 더 편안하다.”
왕년에 야간 자습하면서 이기찬이 부른 ‘Please’나 ‘또 한번 사랑은 가고’ 등 불후의 발라드를 들으며 감성을 적셔보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 싶다. 그의 노래는 누군가 한 소절을 시작하면 ‘떼창’으로 끝나고야 만다. 무려 1996년에 가수로 데뷔한 이기찬은 버즈나 임창정과는 또 다른 의미로 ‘한국의 전설적인 발라더’로 군림해왔다.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그를 우리는 엉뚱하게도 워쇼스키 감독이 연출한 ‘미드’ <센스8>에서 다시 보았다. 그는 극 중에서 이경영의 아들이자 재벌 2세로, 누나인 배두나를 곤경에 빠뜨리며 제멋대로 사는 ‘중기’ 역할을 맡았다. 처음엔 드라마에서 이기찬을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너무도 유창한 영어로 ‘오늘만 사는 망나니’를 충실하게 연기해낸 탓이다. 노래 잘하는 건 알았지만 연기를, 그것도 완벽한 영어 대사로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2015년 시즌 1에 이어 2016년 시즌 2에서 배두나에게 맞고 쫓기던 그는 할리우드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기찬은 지난 연말부터 올봄까지 LA에 머물렀다.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틈틈이 오디션을 봤다. 최종 단계까지 올라갔다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할리우드 신인 배우 이기찬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뜻밖에 찾아온 새로운 기회를 제대로 잡았고,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스카이프로 전 세계 감독들과 미팅하는 삶이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변화다.
베이지 컬러의 오픈 셔츠와 니트 톱은 모두 타임 옴므, 줄무늬의 컬러 블록 수트는 김서룡 옴므 제품.
“나이 들면서 좋은 점이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거다. 전에는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았다. 노래를 하고 싶어서 노래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잘됐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센스8>을 보고, <송은이& 김숙 비밀보장>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지낸다. 공교롭게 다 이기찬이 나온다. 이기찬과 함께 여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게 잘 살고 있네.
<센스8>은 시즌 3가 무산됐지만 2시간짜리 특별판을 준비 중이다. 특별판에도 출연하나?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 시즌 3가 무산될 위기였는데 팬들의 성원으로 스페셜 버전을 만든다. 아직 나에겐 연락이 없다. 하하. 해결해야 할 사건과 사고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나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 회에 내가 나오지 않더라도 이 드라마의 이야기가 깔끔하게 정리된다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2015년부터 <센스8> 시즌 1에 출연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이기찬이 미드에 나온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고 싶어서 연기자들이 많이 소속된 회사에 들어갔다. 근데 시간만 흐르고 별다른 작품을 해보질 못했다. 그러다 <센스8> 오디션 기회가 왔을 때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배우로서 영역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당연히 오디션에 참여했다.
오디션 공고는 어디서 봤나?
당시 소속사 연기자 선배님에게 섭외가 와서 자연스레 알게 됐다. 영어로 대사를 해야 하는 드라마고, 연출을 워쇼스키 감독이 맡는다고 하길래 꼭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지정 연기를 보여줬나? 보통 대사를 주고 한 번 해보라고 하던데.
기존 영화의 대사를 받아서 연기했다. 나를 만난 캐스팅 디렉터도 되게 의외였나 보더라고. 당연히 외국인일 줄 알았는데 한국인 캐스팅 디렉터였다. 그분은 일단 나를 가수로 알고 있었다.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예 기대치가 없어서 그랬는지 내 연기를 보고 잘한다고 하면서 다음 시나리오를 건네주더라. 첫 번째 오디션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두 번째 오디션을 봤고, 최종 합격했다.
지난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LA에 머물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고? 좋은 결과가 좀 있나?
좋은 결과는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다니엘 에스피노사 감독님을 만난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오디션 3차까지 붙어서 영국에 있는 감독님과 스카이프로 미팅을 했다. 결국 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짜릿했다. 감독님이 이렇게 해봐라, 하면 그대로 연기해보고 그랬다. 오디션 본 캐릭터가 일본인이었는데 내가 연기하게 된다면 한국인으로 배경을 바꿀 거라고도 말씀하셨다. 나 같은 신인 배우에게는 어마어마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국경을 초월해서 스카이프로 오디션을 보는 게 익숙해졌겠다.
한국에서는 사실 오디션을 볼 기회가 많이 없었다. 내가 감독이나 캐스팅 디렉터 입장이어도 이기찬을 굳이 오디션 봐서 캐스팅할 것 같진 않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겠지만 그게 오히려 역할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럴 거면 그냥 키 크고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신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훨씬 낫지. 하하. 미국에서 보는 오디션은 내가 연기를 얼마나 잘하나 점수를 매기는 개념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이 캐릭터와 맞는지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평가받는다는 생각 대신 나를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임하기 때문에 훨씬 더 편안하다.
유행은 돌고 돈다. 몇 년 전에도 예전 가요들이 다시 조명받았다. 이기찬의 발라드를 아직도 좋아하고 듣는 사람들이 많다.
곡은 꾸준히 쓰고 있는데 아직 내 성에 안 찬다. 어렸을 때는 제작자가 스케줄을 짜고 이런 노래를 하라면 그 매뉴얼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때는 그렇게 해도 장사가 되는 시기였다. 지금은 나 스스로 ‘이 노래가 좋다’고 느낄 때 신곡을 발표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같이 활동한 동료들이 다른 길 찾아 떠나는 일을 많이 경험했을 거다. 한동안 활동 뜸했던 시기에 그런 고민을 했나?
노래보다는 연기를 해야지, 라고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 같다. 지금 20대 중반의 친구가 30대 초반쯤 되면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낄지 모르겠으나,
난 그때 15년 가까이 너무 소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무대에서 노래하고 방송에 나가는 것이 재미없어졌다.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니 나는 정작 ‘연예인’을 할 사람이 아니더라. 방송을 즐기고 잘하고 싶어 하는 끼가 없는 사람이다. 주어진 것만 열심히 하는 정도다. 천성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에너지를 얻는 부류가 아니더라고. 근데 또 한편으로 연기는 예전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뮤지컬을 한두 작품 하다 보니 드라마도 하게 되고, 또 미국에도 가게 되고, 그렇게 흘러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시작해 벌써 20년 정도 됐다. 그러다 보니 너무 일찍 많은 것을 경험한 것 같다. 이미 성공도 해봤으니까, 지금 집중하는 연기에 대한 조급함은 별로 없지 않을까?
아, 나도 그렇다고 생각은 하는데 가끔씩 조급증이 올라온다. 그럴 때는 명상을 한다. 요즘에 꽂힌 것이 유튜브 명상이다. 그리고 자기 암시하는 게 있는데 ‘자신감을 가져라’ 이런 말을 따라 하면서 명상을 하면 진짜 도움이 된다.
평온함을 찾기 위해서인가,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인가?
나이 들면서 좋은 점이 나 자신을 알게 된다는 거다. 전에는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았다. 노래를 하고 싶어서 노래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잘됐다. 알고 보니 나는 자신감이 없고 내성적인 애였다. 근데 또 <센스8> 출연 기회가 찾아왔을 땐 어떻게든 해낸다. 지금도 그런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한 번씩 자기계발서 읽는 이유가 자기를 점검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의미로 명상을 한다. ‘자신을 사랑하세요’ ‘자신감을 찾으세요’ 이런 뻔한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더라고.
근데 내가 볼 때 지금 흐름이 괜찮은 것 같다. 조만간 오디션에도 합격할 것 같다.
정말? 뭐가 보이고 막 그러는 건 아니지?
일단 믿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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