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감독에 발탁되어 <감자별 2013QR3>에서 노수영을 연기할 때나, <야경꾼 일지> <사도> <화랑>에서의 서예지를 기억한다. 그때 그녀는 강한 자존심과 자존감으로 무장한 여자였다. 그럴 때마다 서예지는 이야기에서 튀어 나와 화면을 점령했다. 그런 인물이 가진 힘과 매력을 서예지는 아는 것 같았다. 드라마 <구해줘>에서도 서예지는 단단하고 우아하다. 매 회 눈물을 쏟지만, 결코 다 무너질 것처럼 울지 않는다. 온 마을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덮쳐도 절대 악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맞서 싸운다. 서예지는 말했다. “<구해줘> 시나리오에서 ‘임상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여자애가 좋았어요. 남자들이 구해줘야 하는 소녀가 아니라서요.”
오늘 어떤 질문을 받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 하는 드라마 <구해줘> 이야기를 하시겠지… 했어요.
<구해줘> 이야기야 안 할 수 없죠. ‘임상미’라는 배역을 맡아 매 회 우는 연기를 해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상미라는 캐릭터가 무척 좋던데요.
임상미가 1회에서만 눈물을 살짝 글썽였고, 2회부터 16회까지는 매 회 울어요. 이렇게 오래 우는 작품은 또 처음이에요. 밤을 새워 울어요. 4개월 동안 그러다 보니 우는 신이 아닐 때도 눈이 부어 있어 곤란할 때가 많아요. 눈에 작은 문제도 생겼어요. 눈이 약해져 물사마귀도 나고 각막에 염증도 생기고요. 그런데요. 사실 정말 좋아요. 상미를 연기하는 것이요.
서예지에게 임상미는 어떤 인물이에요?
드라마를 보면 상미가 누군가에게 “구해줘”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외치는 장면이 계속 나오죠. 그런데 상미는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도 구해달란 말을 안 하고 싶어 하는 캐릭터예요. 말해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부모님이 있지만 아픈 오빠를 챙겨야 하는 건 상미였죠. 장녀일 뿐 아니라 가장처럼 살아요. 오빠가 죽고 나서는 부모님이 옳지 않은 종교에 더욱 빠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미가 어떤 목소리를 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요. 일단 이런 것이 상미에게는 큰 슬픔이고 아픔이에요.
그 여자애의 어떤 면이 특히 좋고, 아픈가요?
상미는 여자이면서, 마음으로는 한순간도 지지 않고, 싸워야 할 것들에 힘껏 대응해요. 그렇게 점점 더 강인해지죠. 그 점이 정말 좋아요. 상미가 아프고 슬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야 너무 많은데요. 사실 화가 날 때도 굉장히 많아요. 완벽히 몰입되었는지, 극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요즘은 자꾸 화가 나요.
상미의 오빠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섰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데 상미가 무너질 것 같은 마음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그러지 마, 내가 도와줄게’라고 단단하게 오빠를 설득하려던 연기가 참 좋았어요. 그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슛 들어갈 때부터 오빠에게 부탁했어요. 그 장면 찍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쳐다봐달라고. 그랬는데, 순간 너무 몰입하다 보니 오빠한테 한 걸음 다가갈 수도 손을 뻗을 수도 없더라고요. 어떤 감정을 잡고, 뭘 생각하고. 그 순간은 그런 연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곳에 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무서웠어요.
<구해줘>를 시작할 때, 이 작품으로 어떤 걸 해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제게 그랬어요. “예지 씨, 혹시 ‘구해줘’라는 말을 살면서 해본 적이 있어요?” 저에게 그때 뭔가 탁 다가왔어요. 저도 구해달란 말 해봤어요. 사람에게 해본 적은 없고, 신에게요. 정말 힘들 때, 신에게 구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상미의 ‘구해줘’라는 외침이 그런 거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주인공인데 ‘소녀’가 아니어서 좋았어요. 시나리오에서 처음 임상미를 봤을 때부터 이 여자애를 좋아했어요. 남자들이 구해줘야 하는 약자가 아니라서요. ‘스스로 구하는’ 여자라서요. 상미는 당당해요. 그리고 담대해요. 그런 상미를 연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야무지고 영리한 사람 같아요. 확실한 걸 좋아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 역시 확실히 아는 사람이요. 남자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건넬 때, ‘헤헤’ 하며 넘어갈 사람은 아닐 것 같고요.
가깝고 친밀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요. 일터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헤헤’ 웃으며 넘어가고요.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좀 달라요. 특히 계획이 두루뭉술한 걸 싫어해요. 뭔가 계획을 할 거라면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계획한 대로 수행하려고 하고요.
자신이 너무 단단하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사람은 단단하고 너무 똑바르기보다 그런 점을 스스로 깨부수어 동글동글해져야 한다. 그런데 굳이 깨지 않아도 한 살씩 먹다 보니까 구석구석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져요. 요즘은 제가 이상하게 애교를 너무 많이 부려서 <구해줘> 현장의 조감독님들이 부담스러워할 정도예요.
왜 요즘 그렇게 애교가 많아진 거예요?
상미가 너무 우울해서 그래요. 조감독님이나 카메라 스태프들 모두 제 신에서는 굉장히 조용하게 도와주시거든요. 근데 나 때문에 자꾸 촬영장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울고 난 뒤에 스태프들에게 달려가 막 웃어요. 치아가 활짝 보이게 웃어요. 손도 잡고 그래요. 조감독님은 얘가 왜 이러나 싶을 거예요. 저는 직설적이에요. 풀어도 대놓고 푸는 성격이죠. 안 좋은 마음을 오래 품고 있질 못해요.
그래서 이상형을 ‘그릇이 크고 배포가 두둑한 사람’이라 말했나 봐요.
맞아요. 그리고 전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좋아요. 사랑이든 호감이든, 표현해야 나도 그에게 반응할 수 있으니까요. 서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거나, 한쪽만 일방적으로 표현을 받는다면 서로 이성으로 느끼기 힘들 것 같아요.
배우가 된 건 우연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길거리 캐스팅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처음 연기를 할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요? 떨리고 두렵던가요?
네.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집에 들어서는 신을 찍는데 신발 신고 들어간 적도 있어요. 너무 떨려서요. 저는 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어요. 선생님도 없었고요. 첫 작품이 <감자별 2013QR3>(이하 <감자별>)이잖아요. 그때 정말 많이 떨었죠. 김병욱 감독님만 믿었어요. 저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데, 감독님은 절 강하게 신뢰하시더라고요.
김병욱 감독은 서예지의 무엇을 그렇게 믿은 걸까요?
저도 사실 항상 그게 의문이에요. 스페인 유학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어요. 감독님께서 제 프로필 사진을 보셨대요. 마음에 들어서 미팅 제안을 하셨어요. 그때 8시간쯤 대화를 했나 봐요. 배가 고플 정도로 이야기했어요.
무슨 이야기했는지 기억나요?
이런저런 이야기. 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해달라고 하셨어요. 기억나는 것부터 하다 보니까 그렇게 오래 대화하게 됐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저와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다는 거예요. 저는 절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다음 날 혹시 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느냐며 연락하셨어요. 저는 절대 못한다고 말씀드렸고요.
용기가 안 났어요? 아니면 유보한 건가요?
연기라는 걸 아예 모르고, 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시트콤계의 거장이시잖아요. 김병욱 감독님의 작품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요. 그래서 거절했는데, 감독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잘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처음 <감자별> 기자간담회에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여기 서예지 씨를 주목해주세요. 제가 사람을 잘 보지 않습니까? 특히 여배우들을. 서예지 씨가 3년 안에 대스타가 될 겁니다.” 3년 지났는데 대스타가 안 돼서 감독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하하.
검은색 랩 스타일 톱은 알렉산더 왕, 피치 컬러의 새틴 팬츠는 에밀리오 푸치 제품.
“도자기 만들어보고 싶어요. 만들어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주고 싶어요. 손재주도 저의 ‘달란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써먹어야죠. 안 쓰고 녹스는 게 싫어요. 닳고 닳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눌 건 나누고 도움도 주고 하면서요. 나를 다 쓰지도 못하는 인생은 싫어요.”
배우가 되기 전에는 무엇을 꿈꿨나요? 하고 싶은 것은 하고야 마는 성격이잖아요.
사실 저는 꿈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게 없다기보다, 꿈을 하나로 모으거나 정리하질 못했어요. 대신 제가 굉장히 ‘달란트’가 많다는 생각은 확고했어요. 고등학생 때는 스페인어가 좋아서 그저 스페인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유학길에 올랐으니까요.
그러고는 혼자서 독하게 공부해 6개월 만에 기본적인 스페인어를 마스터했죠.
독하게 하기는 했는데, 6개월 동안 거의 벙어리였죠.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6개월 동안 입 다물고 있었던 것이, 그 시간을 참아낸 것이 정말 독했구나 싶어요. 말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는 채로 6개월을 살았잖아요. 많이 참았죠. 깡으로 한 것 같아요.
지금도 뭔가를 견디거나 참고 있어요?
전부요. 사람은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약하니까요. 참아야 할 순간은 언제나 있더라고요.
수많은, 직접적인 관계 없는 타인에게서 평가받고 판단되는 직업이잖아요. 그런 게 싫을 땐 없어요?
저는 그런 것에 흔들리고 상처받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직업이니까요. 저는 좋은 댓글 보면 혼잣말 해요. “고마워요.” 안 좋은 댓글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요. “나빠.” “나빴어, 나 예쁜데.” 왜냐고 묻지 않고요.
지금 서예지는 어느 정도를 이룬 것 같아요?
꿈속에 들어왔고 여기에서 제 남은 생을 펼치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살고 잘 연기하면 내 인생이 되겠지. 연기를 시작하면서 늘 생각했어요. 연기할 때 내가 편안했으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게 가능한 것 같아요. <구해줘>의 상미는 저에게 고통인데, 편해요. 너무 행복해요. 요즘은 취미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일하면서 취미를 많이 잃었거든요. 도자기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도자기 만들어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주고 싶어요. 손재주도 저의 ‘달란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써먹어야죠.
가진 걸 다 쓰면서 살고 싶어요?
안 쓰고 녹스는 게 싫어요. 나를 다 써버리고 싶어요. 닳고 닳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눌 건 나누고 도움도 주고 하면서요. 그렇게 닳아가며 살고 싶어요. 나를 다 쓰지도 못하는 인생은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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