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끝났다. 여유가 좀 있는 시기이긴 하겠지만, 이젠 지나간 드라마에 대해 곱씹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박경수 작가의 작품들은 워낙 전개가 빠르고 한 회에도 여러 번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하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같다.
예상보다 엄청 빨랐다. 첫 회부터 상황이 펼쳐졌는데, 그걸 받아들이기 전에 연이어 다른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나름 잘 받아넘겼다고 생각했는데, 회차가 거듭되면서 답답함만 쌓여갔다. 그래서 드라마 초반, 내 연기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여전하다.
그래도 시청률 잘 나오고, 재밌었다. 배우란 직업을 택했다. 내 사촌 동생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연구원의 삶은 배우처럼 활동적이진 않을 듯싶다.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모르고 살았을 거다. 전공을 살려 직업을 택했다면, 또 다른 의미의 성취감을 얻었을 거다. 그리고 나름 행복하게 살았을 거다. 근데 지금 내 선택에 만족한다. 자유롭고 좋다.
보이는 직업이다. 다낭에 도착한 첫날, 마트에 갔을 때 누군가가 당신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렸더라. 어딜 가도 조심해야 하는 삶이 불편할 것만 같다.
난 괜찮다.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 아니다. 평소에도 편하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닌다. 그리고 원래 내 스타일과 패턴이 극 중 모습과는 참 많이 다르다. 날 못 알아보는 경우도 많다. 키가 큰 편이라, 누군지 모르고 보다가 나임을 알아채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걸로 영향을 받고 신경 쓰면 내 삶은 분명 황폐해질 거다. 난 재밌게 살고 싶다. 그래서 더더욱 신경 안 쓰려 한다.
성격이 긍정적인 것 같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드라마 <귓속말>이 연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엔 여성 시청자가 좋아할 만한 역을 맡았다면, 이번엔 틀을 깨고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받은 느낌이다. <귓속말>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드라마 시작 전엔 큰 기대가 있었고,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정도로 성취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근데 촬영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작가님이 제시한 방향을 내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몇 번의 경험 때문에 쉽게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가 많이 남은 작품이다. 대외적으로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은 잘 모르겠지만, 작품 자체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배우가 잘했다고 평가받는 건 아니다. 더구나 이번 작품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의 배우들이 관여한 내용이다 보니, 개인적인 만족감이 높진 않았다.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졌던 부분도 있고, 그래도 공부는 참 많이 된 작품이다. 매도 많이 맞았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다음에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해석과 표현에 있어서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기준이 높으면 만족감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을 떠나 내 배우 인생에 큰 도움이 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대학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상윤은 똑똑한 배우라는 생각이 강하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머리가 잘 돌아갔다.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지만. 술 때문인가?
술을 많이 마시나?
좋아하는데, 잘 마시진 못한다. 최근엔 뇌를 활용하는 일보단 상하게 하는 일만 하고 있다.
그럼 대본은 잘 외우는 편인가?
비교적 잘 외우는 것 같다.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에겐 편견이라는게 있다. 너무 굴곡 없이 자라면, 연기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는 편견 말이다. 일례로 마이클 피트나 숀 펜과 같은 인물이 연기를 잘하는 배경엔 그들의 굴곡진 삶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항 가는 길>에 출연하면서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부족하니 더 채워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인생의 굴곡이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내재된 게 많아, 표현의 영역이 더 넓은 것 같다. 난 비교적 넓게 생각하고 준비를 많이 하는데,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게 두렵진 않은데, 범위를 원체 내가 좁게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선배나 후배 또는 동료의 연기를 보면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들도 있고, 나처럼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게 이젠 보이기 시작한다. 스스로 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이제 알았으니 발전할 일만 남은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보단 작은 역량을 요하는 역할을 했을 땐,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느 시점부터 작품에서 더 큰 역할을 맡게 되니, 감정의 깊이가 현장에서 잘 표현이 안 될 때 답답함을 느꼈다. 내가 이 대본보다 역량이 작다는 걸 느끼게 되더라.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 대본의 크기만큼 커지거나, 대본의 크기보다 더 큰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갈등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듯싶다.
땀을 흘리거나 운동을 하며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며 스트레스를 발산한다. 그래도 해소가 안 될 땐 나 스스로를 괴롭히며 파고든다. 궁지에 몰릴 때까지 압박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이 참 힘들다. 오기일 수도 있고, 버텨낼 수 있는 힘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결국엔 깨고 나오게 된다. 나의 껍질을 깨는 그 순간을 즐기려고 한다. 작품을 하는 기간 또는 하지 않는 기간에도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그런 기분을 느끼려 한다.
그러면 너무 쉬지 못하는 거 아닐까.
좀 그래야 할 것 같다. 나는 쉴 때 지나치게 쉰다. 일할 땐 너무 몰입해서 사생활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작품이 끝나면 아예 다른 삶을 산다. 그런 순간이 최근 몇 작품 계속 이어지다 보니 내가 고갈된 것 같다. 분명 쉼이란 것도 필요하지만, 채워 나가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견문도 넓히고, 연기 공부도 좀 하고,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공연도 보고, 책도 읽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 이번엔 여유를 가지며 그런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한다.
그럼 몇 달 쉬어가는 건가?
잡힌 일정은 아직 없다. 시간을 좀 가지려 한다. <공항 가는 길> <귓속말>을 숨 가쁘게 마무리하고, <버저비터> 같은 즐기려 했던 프로그램에서도 상처를 받았다.
아니 <버저비터>는 농구 프로그램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농구 말이다.
꾹꾹 눌러서 연기를 해야 하는 두 작품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농구를 통해서 풀고 싶었다. 근데 전패를 하는 바람에 상처를 받았다. 진짜 아쉬웠다.
<버저비터>도 그랬지만, 예능 쪽에서 러브콜을 많이 받을 거 같다.
작품 홍보를 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나 스스로도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내가 능숙하게 잘 못하니까 프로그램 관계자도 뭔가 만들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내 팬들은 좋게 봤겠지만,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시청자는 이번 주는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두에게 민폐인 것 같아서 예능은 예능감이 좋은 분들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가급적 고사하는 편이다.
글을 좀 쓰는 편인가?
전혀 못 쓴다.
나중에라도 배우 말고 감독 역할을 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
배우가 연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배우로서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고, 연출을 생각하는 건 월권이란 생각이 짙었다. 작가나 감독 그리고 배우 간에 각자 영역이 있고 서로 침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기를 하다 보니 이 상황에선 이렇게 연출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안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난 전혀 괘념치 않는다. 난 당연히 그들의 디렉션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도 운동을 하더라.
매일매일 하려고 한다. 연기자라는 직업을 가졌으면 그렇게 충실히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정 배역을 놓쳐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나?
있긴 하다. 시기적인 문제로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고 그 당시엔 도저히 할 수 없을 거 같은 역할이어서도 그랬다.
떠난 것에 대한 미련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후회하다 다음을 놓치게 된다.
최근 패션 브랜드에서 당신의 이미지를 선호하는 분위기다. 본인은 패션에 대해서 신경을 쓰나? 외모 좋고 키 큰 사람들은 되레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 편한 운동복 차림을 좋아해서 편하게 입는 편이다. 근데 나이가 좀 드니 운동복 스타일로만 입을 수 없는 상황도 있고, 또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 달라지고 있다. 더구나 패션 브랜드들과도 함께 일을 하다 보니 그 변화가 좀 더 빠르게 오는 것 같다.
어디 가면 이상윤을 만날 수 있을까?
여의도 쪽에서 많이 활동하는 편이다. 이사를 가지만, 여의도에 친구가 많아서 변함없이 여의도에 있을 듯싶다. 그리고 농구장에 자주 가는 편이다.
스테판 커리와 르브론 제임스?
당연히 르브론이다.
왜 르브론인가?
케빈 듀런트를 제일 좋아한다. 농구화도 듀런트의 모델을 신는다. 근데 그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가면서 그 팀을 응원하고 싶진 않았다. 오클라호마 시티와 골든스테이트의 에이스들이 한데 뭉쳐 르브론과 싸우는 격이다. 르브론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10년 뒤 이상윤은 어떤 모습일까?
주인공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영화나 드라마를 넘나들며 연기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 한 번에 두 작품을 해본 적이 없다가 영화 <날, 보러와요>,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을 촬영할 때, 약 2~3주 정도 겹쳐 촬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연기하는 게 재밌다는 걸 처음 느꼈다. 한 작품을 하면 늘 비슷한 모습과 장소 그리고 패턴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데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다 보니 역할에 따라 다른 인물이 되고, 날 다르게 꾸며준다는 게 참 재미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10년 뒤, 내 힘만으로 한 작품을 끌고 가는 멋진 사람이 돼 있으면, 그것도 굉장히 필요한 부분이지만, 난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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