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스 레터의 사진을 드디어 바꿨다. 이제 내 사진을 둘러싼 세간의 혹평을 과감히 불식시키련다(과연?). 변변찮은 사진 때문에 내게 꽂혔던 질타의 시선들을 향해 ‘창간 기념호’엔 무조건 교체하겠다는 공약을 남발해온 터다. 그런데, 올 것이 왔다! 그래서 선보인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심장이 달뜨고 마음이 들썩이고, 주책없이 콧속이 저릿저릿하기까지 한 감흥으로 만들어낸 ‘창간 기념호’의 변화를 알리는 서곡으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변화의 서곡은 에디터스 레터의 사진 위를 흐르지만 변화의 몸통은 지금부터 당신이 넘기게 될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똬리를 틀고 있다. 대개 창간 기념호를 만든다는 것이 그렇다. 그간 <아레나>를 편집하면서 생긴 새로운 욕망과 <아레나>의 허를 메울 처방전들이 연동해 창간이라는 기념비를 싱싱한 꽃다발로 경외하는 것이다.
알겠지만, <아레나>의 자랑은 탄탄한 몸매에 있다. 식스팩처럼 구획정리가 잘된 미끈한 블록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이는 지면의 상단을 가로지르는 검은색 가로선이 상징한다. 좁고 휜 골목길을 헤매는 독자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만든 이 블랙 터널은 파리 라데팡스의 지하 노선처럼 우회하지 않는 최단거리 직진 코스로 구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Agenda, Style, Design, Blackcollar Workers’라고 명명된 라인들이다. 이 라인들은 지하철 노선처럼 각각의 포인트 컬러로 분류된다. 아젠다 섹션은 라이트 그린, 스타일 섹션은 블루, 블랙칼라 워커스 섹션은 그레이, 이런 식이다. 지면의 가장 높은 곳에서 길잡이가 되는 이 노선표는 뼛속까지 독자를 배려하겠다는 <아레나>의 의지다. 솔직히 편집장으로선 이 명확한 구획정리가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다. 특히 3백 페이지 이상 되는 지면을 배열할 때 그 고충은 극에 달한다. 마감 막바지에 당월의 광고 비주얼에 맞춰 편집 페이지를 배열하는 건 하이 레벨의 퍼즐게임 같은 거다. <아레나>의 정교한 퍼즐은 각 섹션 내에 다른 이물질이 침투되는 것을 이 블랙의 방패로 견고히 방어한다. 나는 한 수를 물릴 수도 판을 엎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려 이 검은색 방패들을 모조리 뜯어 해체하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섹션 간에 호환이 되지 않으니 예상치 못한 배열을 맞닥뜨리면 새로운 칼럼을 급히 제작하거나 완성했던 대지의 레이아웃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가시면류관을 쓴 편집장이 된다. 하지만 라데팡스처럼 구획정리가 확실하고 외관과 내관이 모두 옹골찬 잡지가 되는 데 이 잘 닦인 블랙 터널만한 일등공신이 없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지난 일 년, 이 터널과 터널 사이엔 순환되지 않는 한 구간이 존재했다. 그간 <아레나>는 이 터널을 매끄럽게 잇지 못한 데 대한 공복감에 시달렸고, 창간 기념호를 맞아 터널과 터널 사이를 곧게 이어가기 위한 공사를 착수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Report’라는 문패를 단 피처 섹션이다. 리포트란 단어는 <아레나>가 추구하는 피처 기획물을 압축하는 키워드 같은 것이다. 에디터들의 경험과 정확한 통계 수치에 의한 근거,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땀내 나는 구성물들이 고밀도로 쌓여갈 것이 명약관화하다. 특별히 이 섹션의 노선표는 레드로 도색했다. 스타일을 간과하지 않는 남성들의 까다로운 구미에 맞는 특별한 새 옷을 입힌 것이다. 검은색 터널과 터널을 잇는 붉은색 가교라….
지난해 발행된 영국판 <아레나> 20주년 기념호에 실린 글에 의하면 블랙칼라 워커는 피부 마사지 숍에 들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길거리에 텐트를 치고 정치를 논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고 했다. 멋지지 않은가? 블랙칼라 워커를 설명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내 우심방의 중심을 차지한 문장이다. <아레나>는 이런 성향을 갖춘 독자들의 응원을 동력 삼아, 이런 독자들이 바라는 롤모델을 찾아 매달 길을 나선다. 이달은 좀 과하게 많은 롤모델을 찾아 대장정에 나섰다. 그 결과물이 바로 ‘블랙칼라 워커 100인’ 특집 기사다. 기획회의 당시 100이란 숫자가 나의 성대를 울리며 화통하게 솟구쳤을 때 기자들은 울었고, 나는 웃었다. 하지만 이 대장정이 66페이지에 달하는 화보와 인터뷰로 편집돼 나왔을 때 <아레나>의 모든 이들은 다 함께 웃었다. 이 책을 품에 안은 당신은 더 크게 웃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 모든 건 다 ‘창간 1주년’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념비를 윤택한 녹지 위에 세우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노력은 당신이 알고 내가 알고 <아레나>가 안다. 그거면 됐다.
P.S
하이, 댄! 하이, 크리스!
당신들의 축하 메시지 감사해요. 바로 다음 페이지에 당신들이 보내준 편지를 실었답니다. <아레나 코리아>의 성공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준 당신들의 동지의식에 가슴이 훈훈해졌어요. 당신들은 <아레나 코리아>의 성공이 모두 우리의 공이라 칭찬했지만, 사실 당신들의 진실한 조언과 조력이 없었다면 이만큼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벌써 일 년이라니, 나조차도 믿을 수가 없군요.
댄, 우리의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 선수는 잘 있나요? K리그를 보고 싶다던 당신과 당신의 어여쁜 딸 에이프릴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군요.
크리스, 당신이 곧 서울에 오면 음악과 안주 그리고 술잔까지도 아름다운 선술집으로 안내하죠. 우리, 샴페인 대신 소주로 <아레나 코리아>의 성공을 축하하도록 해요. 당신의 머릿속에 <올드보이>와 LG 플라즈마 TV와 <아레나 코리아> 그리고 소주로 기억될 한국을 위해, cheers!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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