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다방의 록 스피릿 밴드 ‘더 모노톤즈’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록의 저항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일까. 록 스피릿과 함께 스웨그를 간직한 밴드, 더 모노톤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세 차례나 공연을 했다. 불을 뿜는 기타와 베이스, 심장을 울리는 드럼 그리고 폭발적인 보컬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가을 무렵 더 모노톤즈는 <여름의 끝>이라는 싱글 앨범을 발표했다. 무의미한 노랫말이 성행하는 요즘, 한 편의 시 같은 가사가 돋보이는 무려 6분짜리 곡이다. 노래가 시작하고 끝나기까지, 4곡의 다른 노래들을 이어 붙인 듯 독특한 구성은 늘 자유롭고 싶은 밴드의 결의에 가깝다.
“최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창작하고 싶었다. 록 밴드라고 해서 곧게 내달리는 사운드뿐 아니라, 가끔은 이렇게 정적이고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광장에서 록을 토해내던 이들을 다시 보고 싶다면 서울 상수동의 ‘제비다방’을 찾으면 된다.
이상이 당대 예술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와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제비다방처럼 ‘예술이 넘치는 살롱’이다. 이곳과 깊은 인연이 있는 뮤지션이 바로 ‘더 모노톤즈’다. 길고 좁은 무대에서 더 모노톤즈는 자주 공연을 했다. 밴드 멤버끼리 서로의 숨소리는 물론 살결까지 느낄 만큼 비좁고 희한한 공간이다. 무더운 날은 사우나 못지않은 열기 속에서 공연할 때도 있다. 20여 년간 홍대 낭인으로 살아온 ‘더 모노톤즈’의 차승우가 말한다.
“우리는 밴드라 제약이 많다. 악기를 짊어지고 와서 공연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홍대 클럽 신에 적을 두어야만 활동이 가능해진다. 밴드 공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제비다방 같은 대안 공간이 주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클럽 스테이지가 아닌 곳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다 보면 새롭게 오감이 깨어나기도 한다.”
‘더 모노톤즈’라는 이름으로 첫 정규 앨범을 발매한 것을 기념하는 공연도 ‘제비다방’에서 했다. 이곳에서 최근 다른 장르와 교류, 교감하며 생각을 환기하기도 한다. 드러머 최욱노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키보디스트인 친구 이종민을 따라 2주일에 한 번씩, 제비다방에서 열리는 모임에 나간다. “완전히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즉흥 연주를 하는 ‘오픈 스테이지’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끼리 연주하다 끝나고 차 한잔하면서 통성명하는 식이다. 가야금과 재즈, 힙합이 위화감 없이 어우러진다.” 차승우는 이런 장르 간의 결합을 이야기하며 “2집 앨범에서는 아이유를 섭외해 1960년대 프렌치 팝의 정서를 품은 곡을 하나 넣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제비다방뿐 아니라 서울 어디에서든, 그리고 제주도까지 대한민국 곳곳에서 쉼 없이 공연을 펼쳐온 이들은 올해 ‘해외 순방길’에 오른다. 음악 박람회 격인 ‘2017 K-POP 쇼케이스’에 참석해 영국 땅을 밟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과 이스라엘 등에서도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더 모노톤즈’는 밴드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지금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록 음악은 언제나 변방이었다. 20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변방도 그 의미와 역할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대와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 그거면 충분하다.”
고독한 예술가들의 살롱 ‘공상온도’ 대표 함현희
이상은 생전에 여러 다방을 차렸다. 다방에서 차와 음료 등을 파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의 다방은 문인, 화가, 배우, 가수 등이 예술 활동을 펼치는 공간이었다. 매일같이 문학의 밤, 시 낭송회, 그림 전시회를 열었고, 다방 한편에서는 작가들의 원고 청탁과 연극, 영화인의 출연 섭외가 오갔다.
요즘 서울에서 이러한 공간을 찾으라면 단연 ‘공상온도’를 들 수 있다. 홍대 서교동에 위치한 이곳은 독립 출판물을 진열해놓고 판매하기 때문에 ‘독립 서점’으로 아는 이들도 있고, 맛있는 커피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카페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을 위해 열린 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공상온도’의 대표 함현희는 직업이 여러 개다. 사진가이기도 하고, 소설가와 타투이스트 등 주변 친구들과 함께
얼마 전, ‘공상온도’는 무사히 1년을 버텨낸 것을 자축하는 ‘두 번째 일식’ 행사를 열었다. 춤을 추고 노래하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며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젊은이가 활발하게 이곳을 지켜준 덕분이다.
“유명한 예술가야 불러주는 데가 많겠지만 신진 아티스트는 시작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경력이나 명성이 없어도 작품 세계가 확고한 젊은 예술가를 위해 공간을 열어두고 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예술인의 발판이 되고 싶어서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가 ‘예술’이라는 단어 하나로도 친구가 되고 영감을 주고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얼마 전 ‘티 타임’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열기도 했다. 전시 작가와 관객이 말 그대로 차 한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어떤 재료로 그림을 그렸나’에서부터 ‘예술로 먹고살 수 있는지’까지 예술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얼마 전 뮤지션 이랑이 상금이 없는 상을 받으면서 그 상을 50만원에 파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현실을 풍자를 한 적이 있다. 전시와 공연을 하려면 ‘대관료’ 걱정부터 앞서는 젊은 예술가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을 뿐이다.”
지난해 젠트리피케이션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홍대 대표 복합 문화공간이던 살롱 바다비 등도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함 대표는 더욱 더 ‘지속 가능하게 버텨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가 영감을 나누고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하는 공간. 그가 이끄는 ‘공상온도’는 이상이 꿈꾸던 ‘다방’의 2017년 버전이다.
이상의 내면을 찾아서 뮤지컬 배우 고은성, 윤소호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 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뮤지컬 <스모크>는 이상의 ‘오감도 제15호’의 한 구절에서 시작된다. 평소 이상의 작품 세계를 흠모하고 동경해온 뮤지컬 배우이자 공연 연출가 추정화는 이미 이상을 소재로 발표한 연극이나 뮤지컬과는 결이 다른 극을 쓰고 싶었다. 그의 유년 시절이 얼마나 불우했는지, 당대에 예술 세계를 인정받지 못한 그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하는 사실의 나열과는 확연히 다른 어떤 것. 그녀가 택한 것은 이상의 불안하고도 심오한 내면이었다. 소년 ‘해’를 연기하는 윤소호는 지난해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일주일간 열린 트라이 아웃 공연에도 참여했다.
“본 공연은 트라이 아웃 공연보다 훨씬 더 간결하게 다듬었다. 러닝 타임도 20여 분 정도 줄어들었다. 그만큼 이것저것 다 표현하고 싶은 욕심을 버린 셈이다.”
고은성도 소년 ‘해’ 역에 캐스팅됐다. 두 청년 모두 3~4년 전부터 뮤지컬계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얻고 있는 루키들이다. <팬텀싱어> 프로그램을 즐겁게 본 이들이라면 더욱이 이들이 얼마나 무대 위에서 멋지게 노래하는지를 알 거다. 두 배우에게 이상은 ‘교과서에서 시를 배웠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는’ 예술가였다. <스모크>를 통해 그의 생애 속으로 들어간 이들은 시대를 앞서간 그의 천재성과 예술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윤소호는 “이상을 유명한 시를 남긴 작가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과는 소통하지 못한 안타까운 예술가였다. ‘날개’라는 시에서 그가 왜 그토록 날고 싶어 했는지,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한다. 고은성은 “딱 지금의 내 나이, 스물일곱 살에 이상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8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창작자들이 그의 삶을 영화로, 드라마로, 연극과 뮤지컬로 기억한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누군가 나를 이토록 오래 기억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천재성이 엄청난 예술가였던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그는 후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조명되고, 기억되고 있다. 두 배우는 단순히 그의 드라마 같은 삶을 감상하기보다 퍼즐을 맞춘다는 기분으로 극에 몰입하면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귀띔했다.
무대에는 피아노와 첼로 한 대가 놓인다. 화려한 오케스트라 음악보다 단순한 구성 속에서 ‘이상의 이상’을 표현할 거라고. 고은성이 자신 있게 말했다. “TV는 보기 싫으면 채널을 돌릴 수 있지만, 공연은 그럴 수 없다. 채널을 돌리고 싶은 공연을 보면 나조차 화가 난다. 그런 작품이 되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한다. 지금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상은 반세기를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예술가로 유명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만큼 간절하게 살고 싶어 했다. 두 번이나 이상의 내면을 연기한 윤소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작품은 그가 왜 그렇게 힘들었고 한편으로 삶을 열망했는지 알 수 있는 작은 단서가 될 거다. 기존에 알고 있던 이상, 그 이상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