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월호를 시작으로 봄 트렌드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 마감의 끝엔 파리 출장을 준비해야 한다. 파리에서 진행될 2007년 F/W 컬렉션을 참관하기 위해서다. 이제 곧 내 머릿속엔 컬렉션을 통해 다가올 2007년 가을과 겨울의 패션 트렌드에 대한 정보가 저장될 것이고, 난 그 데이터들을 향후 10개월간 곳간에서 곶감 빼먹듯 하나씩 꺼내 <아레나> 콘텐츠에 응용할 것이다.
내게 파리는 여름이다. 이번 컬렉션을 제외하고는 유독 여름에만 그곳을 가게 되어서다. 파리의 여름은 그렇다. 공기는 설탕가루가 살짝 묻혀진 듯 들척지근하며, 무료한 듯 여유롭거나 가끔은 초침이 순간 멈췄다 흘러간다. 약간은 심장박동도 늦추고 바라본 파리는 늘 차분하다. 여름의 파리, 특히 패션위크 기간의 파리는 여간해선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밀란이나 런던도 마찬가지다. 패션위크 기간의 고도(古都)는 외지인과 트렌드로 들끓지만, 진중하다. 패션 컬렉션이라는 것은 세월의 주름이 완연한 이 도시에 놓인 하나의 문진과도 같아서 촐랑이며 넘실대지 않는다. 총천연 컬러의 사람들이 수만 마일을 날아와 ‘fashion’이라는 구호 아래로 모여들며 밤낮없이 술렁대는 패션위크 기간의 폭발할 것 같은 경박함을 잠재우는 건 고도(古都)의 포스다. 그 깊숙한 힘이 없었더라면 수만 명의 서로 다른 목소리와 수천 장의 의상들이 스타카토로 반복되는 그 몇 주간의 혼란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 깊이 있는 맛의 정찬으로 제공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대략 ‘내공 있는 옷 입기’라는 것이 그러하다. 컬렉션이 열리는 고도처럼 수만 가지 메뉴를 품고도 도시 본래의 색을 잃지 않는 것과 같다. 찬란한 정보에 술렁이지 않고 본연의 색을 내는 것이 내공 있는 옷 입기다. 고수의 말이 짧은 것처럼, 내공이 쌓인 베스트 드레서는 트렌드에 대한 정보를 깊이 있게 아우르며 자신만의 색으로 정돈한다.
순면의 티셔츠 한 장에도 백 가지 색깔이 있다. 누구의 것은 건강하고, 누구의 것은 신경질적이며, 누구의 것은 심심하고, 누구의 것은 세련되고, 또 누구의 것은 평범하거나 열정적이다. 패션지에서 이구동성으로 베이식하다고 말해온 화이트 티셔츠에 이렇듯 캐릭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맵시 때문이다. 그것은 키가 크고 작고, 살집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전혀 아니다. 각자의 가치관과 사고, 감성의 틀이 옷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은 설명하기 어렵다. 단순히 트렌드를 파악하고 적용하는 비율로 점수를 매길 수 없는 이면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베스트 드레서는 주위의 수많은 패션 피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옷차림은 매우 트렌디하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였던 옷차림을 꼽으라면 올해 고희를 넘긴 소박한 밥집-친환경 농산물을 가꾸고 따뜻한 밥을 차려 내는 곳이다-사장인 정민태 님의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캐주얼 룩이라 하겠다. 젊은 시절 패션 비즈니스에 종사했던 그는 지금도 옷과 트렌드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그는 벨기에 남성복 디자이너와 남미의 자연과 북유럽의 가구를 사랑하며, 그에 대한 지식 또한 상당하다. 그뿐만 아니라 건축과 환경 문제에 관심이 지대한 양반이다. 그의 옷차림엔 그를 귀결짓는 세 가지 코드가 있다. 그중 하나는 페도라 형태의 라펠이 좁은 모자이고, 또 하나는 스웨이드 로퍼이며, 다른 하나는 MP3 플레이어다. 20대 중반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모자는 갈고닦고 매만져 빈티지스러운 멋이 풍기는데, 지금은 밥집에 머리카락이 날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잠시도 벗지 않으며, 스웨이드 로퍼는 관리가 어렵지만 발끝까지 소중하게 보살피는 느낌이 좋아 찬찬히 보듬으며 신고 있다고 했다. 마라톤과 산악자전거로 단련된 군살 없는 몸매에 피팅감 좋은 티셔츠와 치노 팬츠를 입은 그의 옷차림은 소박하고도 강인하다. 끊임없이 MP3로 음악을 듣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지구의 미래 환경에 대해 스스로 걱정하고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그는 느림의 리듬을 타는 고수의 모습이다. 그는 요즘 슬로 푸드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누구라도 그 책을 읽으면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좋은 음식을 거둬 먹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는 내용이다. 웃을 때마다 옹달샘처럼 퍼지는 입가의 주름은 부드러운 면 팬츠의 주름과 어우러져 그가 추구해온,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감성을 내비친다. 그의 옷은 건강한 웃음을 띠고 타인에게 말을 건넨다. 마음을 움직이는 내공 있는 옷차림인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아레나>의 모든 콘텐츠는 옷 ‘잘’ 입기의 방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젠다의 새로운 정보와 스타일 섹션의 패션 트렌드 분석과 스타일링 코드, 그리고 피처 섹션의 시의성 있고 깊이 있는 기획물과 선배들의 족적을 담은 인터뷰까지. 당신의 옷차림에 켜켜이 쌓여 당신의 색을 찾아줄 정보들이 되었으면 한다.
이외수 선생이 그랬다. 원고지는 삼라만상이 비치는 종이거울이라고. 잡지가 바로 삼라만상이 비치는 종이거울이다.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하고 흐트러진 곳을 매만져 누구나 옷 ‘잘’ 입는 자가 되길 바란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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