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배우 조우진을 설명하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여 썰고 또 여 썰고. 복사뼈 위까지 썰어야 안 되겠나” 하면서 톱으로 이병헌의 손목을 썰던 조 상무. 그것도 아니면 드라마 <38사 기동대>에서 선배 마동석보다 빨리 승진해 세금징수국을 쥐락펴락하던 안 국장. 하지만 요즘엔 설명이 한층 간결해졌다. ‘드라마 <도깨비>의 김 비서’. 이 말 한마디면 이제 단번에 조우진을 알아볼 수 있다. 요즘 그는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과 영화 촬영 때문에 오늘이 며칠인지 모른 채로 살고 있다. 잠시 2017년 한 해 동안 극장에서 만날 그의 출연작을 꼽아보겠다. <원라인> <보안관> <리얼> <강철비> <남한산성> <형제는 용감했다 <V.I.P> 그리고 지금 상영 중인 <더 킹>까지. 잘하면 한 달에 한 번은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만나볼 수 있다는 얘기다.
새롭게 떠오르는 충무로의 다작 요정, 조우진은 멋진 척을 하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그가 카메라 앞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뒀다. 너무 긴장돼서 영혼을 잠시 두고 왔다는 그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이내 영혼을 되찾고, 진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를테면 배우로서 또 인간으로서 최종 목표는 ‘나를 찾는 것’이라는 말처럼.
지방에서 오늘 서울에 올라왔다고 들었다. 어떤 영화를 촬영하고 있나?
<형제는 용감했다>라고, 창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마동석, 이동휘, 이하늬와 함께 출연한다. 안동과 의성이 주 배경이라 요즘 그쪽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또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등의 배우들과 함께 영화 <남한산성>도 촬영 중이다. 병자호란 당시의 이야기인데,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처럼 전국의 추운 지역만 돌아다니며 찍고 있다. 눈 쌓이고 입김이 몰아치는 장면이 주로 나올 거다. 3월부터는 정우성, 곽도원과 함께 <강철비>란 작품에 들어간다.
지금 언급한 영화들 외에 거의 8편 정도, 그러니까 2017년에 개봉하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조우진을 볼 수 있다. 배성우의 뒤를 잇는 ‘충무로 다작왕’이란 수식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미 찍어둔 영화들이 여러 사정상 개봉이 미뤄지다 보니 더 많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다작’에 대해 특별한 소감은 따로 없다. <내부자들> 끝나고 작년 이맘때처럼 거의 1년 만에 많은 인터뷰를 하고 뜻하지 않은 화보도 찍게 됐는데 사실 지금도 얼떨떨하다. 요즘 이런 칭찬이나 격려에 우쭐하지 않고 처음 각오를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 인터뷰를 하면 앞으로 어떤 작품, 어떤 인물을 만나고 싶은지 많이 물어보신다. 장르나 캐릭터, 매체를 떠나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뿐이다. 다행히 처음 연기를 시작하면서 다진 각오나 초심이 흔들리진 않은 것 같다.
어떤 각오를 말하는 건가?
스무 살 때, 진지하게 인생의 목표를 생각해봤다. 내가 97 학번인데, IMF 직격탄을 맞은 세대다. 그때 인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찾아내고 생을 마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동경해오던 배우를 해보고 싶었다. 배우는 다양한 삶을 연기하면서, 자기 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 같아서다. 연기자로서나 인간으로서의 목표가 같았다. ‘나를 찾자’는 것. 내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꺼내보자. 그 각오를 다지다 보니 신념이 됐다.
조우진을 만나서 영화 <내부자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 ‘대체 이 배우는 여태까지 어디서 뭐하고 있다 나타난 거지?’ 생각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무대 연기를 했다. 소극장 연극과 뮤지컬, 코미디 연극 혹은 국립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원작의 정극도 했다. 대구에서 혼자 상경해 생활하다 보니 사는 게 늘 빠듯했다. 그 와중에도 술은 챙겨 먹어야 했으니까. 하하. 그러다 늘 동경해오던 영화, 드라마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서 맨주먹으로 시작했다. 그 흔한 프로필 사진 한 장 없이 제작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조금씩 연락이 와서 단역을 맡으면서 작품 수는 제법 쌓였는데 늘 고만고만한 역할이었다.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극 안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일조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쯤 잠깐 연기를 쉬면서 다른 직업에 도전해볼까도 고민했다. 환기도 될 거 같고, 고정 수입도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3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니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 많더라고.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4~5년 전에 아직은 앳된 나의 프로필 사진을 갖고 있던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오디션을 보라고.
오, 그게 바로 <내부자들>이었나 보다. 불과 2년 전 일이네?
맞다. 첫 번째 오디션을 보고 3일 뒤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부하 역 말고 그 위에 상사 역할로 다시 오디션을 보자’고 하더라. 우민호 감독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도 기뻤는데, 또다시 3일 후 최종 합격해 ‘조 상무’를 연기하게 된 거다.
배우로서 많은 기회를 준 작품인 셈이다.
굉장히 고맙고 또 고마운 작품이다. ‘조 상무’ 역할을 나에게 맡긴 건 정말 파격적인 결정이었을 거다. 좀 더 알려진 배우를 쓰길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감독님이 밀어붙였다.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조 상무’를 연기한다면 더 극적인 효과를 가져올 거라고 말이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나를 빛에 가까운, 대중 앞에 데려다준 작품이다.
‘조 상무’가 대놓고 우락부락하게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었기에 더 인상적이었다. 안경을 낀 호리호리한 회사원 같은 사람이 살벌한 말을 사무적으로 하니까 ‘이건 뭐지?’ 싶은 거다.
이 캐릭터는 철저하게 감독의 디렉션에 따른 결과물이다. 연기하면서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이 톱은 펜이다. 병헌이 형의 팔은 서류다’라고. 감독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적으로 악한 일을 처리했으면 한다고 하셨다. 극 중에서 내가 하는 모든 업무는 야근 같은 거다. 피곤하니까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여기에 나는 ‘조 상무’에게 가정이 있을 거라는 부분을 보탰다. 톱으로 사람을 썰고는 집에 들어가서 잠든 아이들 이마 한 번 쓸어주고 부인 옆에서 잠드는 직장인의 모습. 그래서 촬영 당일에 반지를 들고 갔는데, 그 설정이 어울렸는지 감독님이 별 말씀 안 하셔서 그대로 갔다.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 <38사 기동대>에서 안 국장도 비슷한 맥락의 악역인 듯하다. 시청자가 보기엔 나쁜 놈이지만 그 인물 자체는 목표 의식과 야망이 강한 사람 같다.
나 역시 연기하면서 그들을 악당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았다. 각자 삶에 목표가 있고 모든 행동과 말투에는 명분이 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그래서 현실성 있는 인물로 보여야 관객이 몰입할 수 있다고 늘 생각한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은 가정과 회사 모두 지킬 게 많은 사람이다. 어찌 보면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폐해이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 부도덕하더라도 책임감은 있는 인물로 연기했다. 나는 ‘조 상무’나 ‘안 국장’ 모두 자기 확신이 있는 남자라는 점이 멋있게 느껴지더라고. 내가 연기한 모습이 멋있다는 건 아니다. 하하.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 비서’ 역할을 맡으면서 드디어 악역이 아닌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원래는 좀 더 귀여운 버전이었다면서?
처음에 이응복 감독님께 ‘김 비서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쓰고, 이마를 다 가린 머리 모양, 자세도 좀 꾸부정하고 옷을 잘 차려입은 이방 같은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봐온 감초 배우의 모습과 많이 닮은 이미지다. 조금 잔망스럽고도 귀여운 모습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를 했다가 촬영 직전에 바꿨다. 계속 고민해봤는데 재벌 총수와 후계자, 그리고 도깨비를 모시는 사람이라면 작은 일을 할 것 같진 않았다. 빈틈없이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고, 또 도깨비가 점지할 만큼 선하고 따뜻한 인물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클래식하고 몸에 착 감기는 수트를 입은 세련된 전문직 남자의 모습으로 바꿔봤다. 감독님과 작가님이 종방연 때 잘했다고 말씀해주셔서 다행이었다.
사실 ‘김 비서’가 나오는 장면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등장하는 장면마다 확실히 존재감이 있었다.
나는 김은숙 작가의 팬이다. 그분 작품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하나도 없다. 인물의 비중이 크건 작건, 각자 이야기를 가지고 생동한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 이번 작품에서 ‘김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응복 감독님의 부름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고, 또 작가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김 비서가 배신할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만큼 기존의 다른 작품에서 강렬한 이미지가 남았기 때문일 거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 따뜻하고 위트 있는 인물도 잘 어울린다는 걸 보여줘서 뿌듯할 거 같은데?
굳이 이전 작품과 비교해보진 않았다. ‘조 상무’ ‘안 국장’ ‘김 비서’ 전부 같은 방식으로 고민하고 연기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악역을 했으니까 이번엔 선한 역 해보자’는 고민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지금 나에게 찾아온 작품과 인물을 어떻게 더 현실성 있게 구현해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싶다.
<더 킹>에서는 생각과 전혀 다른 역할로 출연했다. ‘팔 토시’와 안경을 낀 어리숙한 사무관으로 등장했다.
의상팀이 <내부자들>과 같아서 의견을 말하기가 더 편했다. 내가 특별히 ‘팔 토시’를 주문했다. 머리는 2:8 가르마에 옛날 장발 스타일로, 아주 큰 뿔테 안경까지 착용하고 첫 촬영에 나섰는데 감독님께서 ‘이대로 갑시다’ 하시더라.
비주얼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나?
비주얼에 대한 고민은 맨 마지막이다. 먼저 대본에 적힌 인물의 말투, 단어, 행동을 분석한다. 내 주변에 이와 비슷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고 나열해본다. 그리고 세세하게 파고들어 하나둘씩 가지치기를 해가며 마지막으로 남는 인물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이 입을 법한 옷, 할 법한 머리, 습관 등 외형을 완성하는 거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출연하는 작품들마다 잘됐다. 안목이 있는 걸까?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도 많이 있어서, 그렇게 단정 짓긴 어렵다. 또 내가 여러 작품에 출연해도 힘들지 않을 만큼 역할의 비중이 적은 것도 있고. 2017년이 다 지나고 나면 평가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 1년 전에도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앞서 이야기한 내 각오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 있다고 해서 전부 다 참여할 순 없지 않을까?
음, 그건 우리 회사에서 하는 일 같다. 나는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할 뿐이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더 올해 목표가 남다를 것 같은데?
목표는 따로 없다. 2016년에 했던 만큼 올해도 ‘수고로워 보자’는 것 정도다.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있다. 내가 <도깨비>란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한 것도 아닌데, 생각지도 못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 너무 놀라웠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레나>와 인터뷰를 하고 화보를 찍는 것도 놀랍다. 내가 이래도 되나?
단지 ‘김비서’ 때문에 만난 게 아니다. 2017년 내내 볼 배우니까 미리 만나본 것 뿐이다.
그렇게 얘기해준다면 너무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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