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출판사 ‘눈빛사진가선’ 시리즈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 본질은 파헤칠수록 더 많은 의문부호를 달고 다가온다. 1989년 <북녘 사람들>을 시작으로 사진집을 출판하기 시작한 ‘눈빛’은 그럼에도 끈질기게 본질을 더듬고 탐구한다. 눈빛이 2014년 겨울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눈빛사진가선’ 역시 사진을 이루는 수많은 조각을 촘촘한 그물망으로 거르고 걸러 본질을 이루는 조각만을 제시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눈빛사진가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출간된 책은 총 36권이다.
골목의 음험한 가장자리에서, 무지근한 삶이 묻은 장터에서, 시대의 징후를 드러내는 장소에서 채집한 사진만으로 착실하게 1백여 페이지를 채웠다. ‘눈빛사진가선’에서 사진가들은 작가주의로 현혹하지 않고, 역사성과 시대성을 담아 텅 빈 프레임을 농도 짙게 채운다. 구본창의 <DMZ>는 전쟁기념관의 포탄과 무기, DMZ에 두른 철조망을 포착하여 한국전쟁 속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는다.
장영식의 <골매마을>은 한국 핵발전사에서 가장 잔혹한 유민의 역사를 간직한 골매마을을 찾아가 그 상흔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전시한다. ‘눈빛사진가선’을 펼치면 이 세계에서 출렁이는 박자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판형은 문고본이다. 언뜻 시집으로 보일 정도로 크기가 아담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인선보다 가로로 손톱만큼 길고 문학동네의 것보다는 키가 조금 작다. 출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도 펼쳐볼 수 있다.
박정근 <잠녀>, 김흥구 <좀녜>
물기 짙은 두 권의 사진집이 있다. 두 사진가는 모두 제주 해녀를 필름에 담았다. 해녀를 향해 셔터를 누르던 사진가들은 실은 과거부터 아주 많았다. 심연으로 자맥질해 들어가 거친 바다를 끌어안는 작업 과정에는 여성이 견디기 힘든 큰 파고가 깃들어 있고 사진가는 그 특별함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향했다.
여기서 파생된 다양한 작업이 이미 세상에 아주 많다. 그래서 해녀를 찍는 것은 무척 지난한 작업이다. 해녀들에게 입힌 기존의 이미지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고, 사진가는 스스로 시험대에 오르는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작년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발맞춰 박정근의 <잠녀>와 김흥구의 <좀녜>가 출간됐다.
두 권 모두 기존 해녀 사진집들과 무늬와 색깔이 많이 다르다. 오히려 형형하다. <잠녀>의 박정근은 해녀를 둘러싼 고착된 이미지를 모두 걷어내고 평범한 주부로서 해녀를 바라본다. 해녀가 바다와 조응하는 추상적 이미지를 ‘물옷’과 ‘물숨’이라는 두 가지 테마로 풀기도 했다.
사진가 김흥구는 15년이라는 시간의 담금질 끝에 <좀녜>를 세상에 냈다. 해녀들의 촘촘한 일상을 오랜 시간 곁에서 함께했기에 김흥구의 사진에서는 어떤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상과 거리가 좁고, 사진가의 시선이 대상에 아주 깊숙이 스며 있다. 같은 듯 다른 두 권이기에 책상 위에 나란히 두고 번갈아가며 읽는 즐거움이 있다.
보스토크 프레스 <VOSTOK> 매거진 창간호
사실부터 먼저 털어놓자면, 이 잡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VOSTOK>를 처음 본 것은 지난 11월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였다. 표지에 적힌 창간호 주제를 언뜻 보고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페미니즘 : 반격하는 여성들’. 메갈리아 사건과 강남역 살인 사건, SNS에서 해시태그 ‘#살아남았다’를 달고 연속해서 올라오던 일련의 피해 증언까지. 작년 한 해 페미니즘은 가장 많은 말의 축제를 빚어낸 키워드였다. 이는 성별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화두이기에 그 중요성을 빌려보려는 심사 같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잡지의 마지막 장을 덮자, 처음의 생각은 완전히 전복되었다.
잡지를 여는 창간사에서는 사진 역사가 주로 ‘근대화된 국가의 중산층 비장애인 남성’ 위주로 서술되어왔으며 우리 시대의 사진은 ‘가혹한 제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창간호의 주제 선정에 대해 명백하게 설명하는 문구다. 바로 다음 장을 넘기면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에세이가 등장한다.
황현산은 패션 사진가 레스(Less)가 찍은 관능적 키스 사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황현산과 레스는 얼마나 겹치고 또 얼마나 멀던가! 그 뒤로는 하시시박, 니나 안 등 젊고 논쟁적인 여성 사진가 여섯의 인터뷰를 다룬다. 또 일본의 거장 사진가 나라하라 잇코,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가 사진집 <빛의 화랑>의 디자인, 서체, 제본 등을 논하며 책의 물성을 해부하는 좌담을 실었다. 구태의연한 콘텐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VOSTOK> 매거진은 지금 가장 ‘동시대적’인 사진 잡지다.
요세프 쿠델카 <집시>
1900년대 후반 서유럽에서 살던 집시들은 이제 이 땅에 없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던 그들은 벼랑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을 테고 종내엔 삶의 저편으로 향하는 긴 터널을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담은 사진은 남는다. 1975년 미국 애퍼처 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요세프 쿠델카의 첫 사진집 <집시>는 1900년대 후반을 살았던 집시에 대한 방대하고도 집요한 기록이다.
하지만 쿠델카는 냄새 나는 골목을 떠돌며 집시를 우직스럽게 찍은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언젠가 남긴 “나는 언제나 끝나가는 것, 곧 존재하지 않을 것에 늘 끌려왔다”는 쿠델카의 전언에서, 1970년 그가 무국적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지닌 사건에서, 이후 1988년 <망명>이라는 이름의 사진집을 출간한 사실에서 그 이유를 조금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쿠델카의 <집시> 연작을 특별히 좋아하는 까닭은 아마 <집시>가 품고 있는 모호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더럽고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집시가 사진집에서는 삶의 터전을 몰수당한 인간으로 쓰라리게 그려지지 않는다. 쿠델카는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단순하게 기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기록하되 그 기록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함께 찍었다.
그 모호한 지점에서 다양한 해석을 도출할 수 있는 즐거움이 생긴다. <집시> 한국판 사진집은 한미미술관에서 4월 16일까지 열리는 동명의 전시를 기념하기 위해 출간한 것으로 총 1백9점의 사진을 싣고 있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