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이 땅의 최초 개항지이자 번성하던 항구 도시였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물러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산업의 제일 전진 기지였다. 서영춘 선생의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곱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운운하던 사설도, “인천에 배 들어오면 행복하게 해줄게” 하던 이야기도 모두 인천의 발흥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인천은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유이하게 ‘미두취인소(일종의 쌀 선물거래소)’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도시였다. 돈과 남자들, 여자와 술이 넘쳤다. 이런 분위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중앙동, 신포동 일대는 인천 최고의 중심지였다. 시청이 이전하고, 새로운 주택지가 개발되면서 구시가로 밀려버렸지만, 여전히 옛 인천의 흥취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특히 문화 예술인, 근처에 많던 회사원들이 다니던 술집 골목은 신포동에 마지막 흥을 남겨놓았다.
인천 신포동에 1972년 개업한 ‘대전집’의 최재성(51세) 사장은 2대째 가게를 잇고 있다. 창업주인 어머니 오정희(78세) 여사도 가게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대전집은 백항아리, 신포주점, 다복집과 함께 신포동, 아니 인천 구시가의 어떤 상징이었다. 손님들이 끓었고, 매일 화제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옛 영화를 기억하는 올드 팬과 언론을 보고 찾아오는 젊은 층이 가게의 맥을 잇고 있다. 백항아리는 현재 없어졌다. 색소폰 부는 전설적인 풍류객, 문화 예술인, 가객, 술꾼들이 단골이었다. 신포주점은 현재도 영업을 하고 있는데,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다복집과 대전집은 대를 이어 운영하는 몇 안 되는 집이다.
“장사가 정말 잘되었죠. 하루에 족을 얼마나 많이 삶았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옛날보다 메뉴가 줄었어요. 그래도 스지탕과 족발은 여전합니다.” 스지탕(소 힘줄탕)은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요리다. 일본인이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이것이 이 골목의 전통 요리로 남았다. 소 힘줄을 푹 삶고 고춧가루와 간장으로 양념해서 끓여 낸다. 시원하고도 얼큰하다. 무엇보다 힘줄 씹는 맛이 좋다.
보통 서울에서 ‘도가니탕’이니 하는 것에 이 소 힘줄이 들어간다. ‘스지’ 값이 요새 아주 비싸다. 특히 국산은 더하다. 그래도 기어이 이 메뉴는 지켜갈 것이라고 한다. 대전집의 상징이니까. “보쌈도 유명했는데 이제는 안 해요. 손님이 줄었으니까. 그래도 주말에는 자리가 없어요.” 한때 주방에만 직원이 다섯 명이 넘었다. 족발 수십 개가 나갔고, 삶아서 식힐 틈도 없이 팔렸다. 전도 엄청나게 많이 팔렸다. “옛 기억을 찾으러 오시는 분들이 꽤 많죠. 이민 갔다가 오시는 분, 나를 보고 ‘어머니 얼굴이 있네’ 하며 끌어안는 분도 있고. 제발 없어지지 말고 유지해달라고 간청들을 하십니다.”
대전집은 원래 적산 가옥이었다. 일본인이 패망 후 두고 간 건물이다. 불하 등의 과정을 거쳐 민간에 넘어왔는데, 어머니 오 여사가 힘들게 남의 집 일해 번 돈으로 사들였고 수리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 집의 ‘싱건지’가 아주 걸작이다. 일종의 동치미인데, 짜게 담가 발효시킨 후 맑은 찬물에 섞어 낸다. 탁월한 맛이 있다. 자꾸 청해 먹게 된다. 무려 3년을 묵은 것이라고 한다. “이게 소금과 재판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하.” 재판이란, 그만큼 까다로운 소금 다루기란 뜻이다.
이 집에서 요즘 철에 꼭 먹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덕적굴이다. 덕적도는 인천에서 한 시간 걸리는 앞바다의 섬이다. 이곳의 자연산 굴을 할머니들이 캐서 인천으로 들여오면 아는 사람들만 구해 먹는다. 대전집의 오랜 겨울 메뉴다. 덕적굴은 까맣고 잘다. 제대로 먹는 법을 알려주겠다. 젓가락을 쓰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굴을 일고여덟 개쯤 푹 푼다. 그다음에 숟가락 밑을 간장에 대고 살짝 찍는다. 그럼 간이 짭짤하게 맞는다. 가게를 나서는데, 2층에 거주하는 오정희 여사가 내려온다. 이제 장사할 기운은 없다는데 걸음이 기운차다. 노포의 한 시대를 주무른 여걸이다. 참고로, 인근 차이나타운을 소재로 한 너무도 유명한 소설 <중국인 거리>의 작가 오정희 선생과 성함이 같다.
대전은 본디 이 창업주들의 고향이다. 최 사장의 말투에서 대전 사투리가 배어나온다. 어머니의 고생이 말도 못했다고 말하는 최 사장은 입맛이 쓰다. 혼자 되다시피 하여 돈을 벌러 타지로 다니셨고, 인천에 자리 잡았다.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술집 운영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을 게다. 아닌 게 아니라 별일이 다 있었다. 한번은 술 취해서 주정 부리는 지역 조폭의 두목과 다투게 됐는데 어찌어찌 그 두목이 칼을 들고 덤볐다. 두목은 살인미수로 잡혀 들어갔다. 그러자 부하들이 매일 까만 양복을 입고 가게에 진을 쳤다고 한다. 겨우 사건이 무마되고 이후 조폭들이 오정희 여사를 어머니처럼 깍듯이 모셨다는 전설이 있다.
동인천-신포동으로 이어지는 동네는 한때 돈이 돌았고 유흥가가 꽤 컸다. 인천서 자란 사람들은 최대 인천 유흥지로 당연히 동인천을 꼽았다. 운이 저물려고 그랬는지, 시청도 이전하고 연수동 등지에 새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더구나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동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다수의 청소년들이 숨지자 유흥 경기가 아주 싸늘해졌다. “아주 힘들었어요. 요새는 차이나타운 경기가 오르면서 괜히 있던 집들도 쫓겨나고 더 안 좋아요. 그래도 이곳이 전통 지역으로 옛날에 대한 향수를 느끼려는 분들이 찾아와 영업은 유지하고 있는 정도지요.”
최 씨가 가게를 맡으면서 실내를 추억의 상징으로 조금 꾸며놨다. 사라진 은행들의 옛 통장들, 이름만 들어도 아스라한 가계수표(이건 직접 받았다가 부도가 나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도 있다. “제발 가게가 없어지지만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십니다, 손님들이. 작은 사명감이 생겨요. 그런 말씀을 들으니까 잘해야지요.” 그의 손이 묵직했다. 막걸리 맛이 유난히 좋았다. 감자가 포실하게 익어가는 스지탕이 비어갔다. 그 쫄깃한 식감 같은, 옛 신포동의 전설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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