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러려고 감독이 됐나
<아가씨> 미국 개봉에 맞춰 출국해 무려 47일 동안 외국 홍보 투어를 다녀왔어요. 그저께 막 도착했죠. 토론토 영화제부터 시작해서 뉴욕, 텍사스, 오스틴, LA, 다시 뉴욕, 그다음에는 런던, 파리, 리옹, 다시 런던 이렇게 돌았어요. 내가 이러려고 감독이 됐나, 자괴감도 막 들고.(웃음) 마지막 날 즈음엔 앞으로 감독을 그만두고 제작자로만 남는 게 어떨까 심각하게 고민도 했어요. 그럼 인터뷰 따위는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막 이러면서.(웃음) 그래도 LA에서 다음 작품 제안이 꽤 들어와서 각본을 잔뜩 받아왔어요. 이제부터 읽어보고 좋은 작품이 있는지 확인해봐야죠.
# 영화보다 사진이 먼저였다
아버지가 건축과 교수여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사진과 친해졌죠. 아버지가 펜탁스 카메라로 우리 삼남매를 흑백 필름으로 종종 찍곤 하셨거든요.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 때 사진반에 들어가서죠. 당시 영화는 좀 겁나서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한 사진반에 들어갔거든요. 당시 서강대 사진반은 다큐멘터리 기풍이 강한 모임이었고, 그래서 거리 사진을 많이 찍었죠. 조형적이고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는 태도가 지배적이었어요. 그 속에서 일종의 드라마를 찾았죠. 그런 접점이 나를 점점 영화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 영화와는 반대되는 즐거움
실제로 감독이 된 다음부터는 양상이 달라졌어요. 요즘 내가 만들고 있는 영화는 대학 사진반 때 추구한 것과는 정반대에 있어요. 세공되고 만들어진 거죠. 인위적이라는 것과는 좀 달라요. 내 영화 세계는 다 면밀한 계산과 계획 속에 설계되고 디자인된 것들이죠. 자연스러움조차도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반대급부적으로 감독이 되고 나서 찍은 사진들은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연출이 없는 것, 디자인이 없는 것, 계획 없이 우연히 포착된 것.
그래서 지금의 내 사진에는 드라마보다는 단일한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시적인 감흥이라든가, 명상적인 면이라든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리하여 영화감독으로서 이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영화와 반대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작업이죠. 만드는 게 아니라. 특별한 구도를 따로 만들지도 않아요. 그냥 정직하게 그 순간을 포착하는 거죠.
# 사진은 또 하나의 직업이다
영화를 쉴 때, 또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하는 취미는 아니에요. 난 좀 심각해요. 또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진을 찍기 위해 시간을 점점 더 많이 내려 하고 있어요. 뭐, 나이가 들수록 내 영화가 점점 더 젊은 세태를 쫓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영화로 투자받기는 어려워질 테니까.(웃음) 사진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겠죠. 어떤 면에서는 그럴 때가 기다려지기도 해요.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죠.
# 사진을 찍는 순간들
아, 보통 어떤 순간에 사진을 찍느냐고요? 사진반 후배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이 친구가 뉴욕에서 사진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다른 직업을 갖게 됐어요. 가구 만드는 장인의 공방에 조수로 들어갔죠. 점심시간이면 밥을 서둘러 먹고 그 근처인 퀸즈 지역을 카메라 들고 다니는 거예요. 그렇게 매일 1시간 동안 사진을 찍었어요.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그런데 그 시간대의 광선은 사진에 적합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주어진 시간이 그때밖에 없기 때문에 같은 동네를 같은 시간대에만 계속 찍었어요. 그리고 사진집을 낸 거예요. 사진이 기가 막히게 좋아요. 그래서 내가 그 사진집에 서문까지 썼죠.
나도 마찬가지예요. 매일 산책하다 보면 늘 같은 풍경인데도 늘 새롭게 찾는 뭔가가 있어요. 사실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집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감독 일이라는 게 영화를 찍으려면 돌아다녀야 하고, 영화를 완성하면 세계 곳곳으로 프로모션이나 영화제를 다녀야 해요. 남미도 가고, 보통 관광객이라면 가지 않는 도시도 가죠. 그나마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억지로 견디고 즐길 수 있는 거죠. 내 사진은 그래서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보통 관광객은 잘 가지 않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접한 느낌과 이미지들을 찍은 거예요.
# 사진이 영화에 영향을 미친 케이스들
물론 사진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가씨> 히데코의 이미지에 결정적 영향을 준 흰 고양이 사진, 조진웅의 손 사진 등은 확실히 사진이 영화에 영향을 준 경우죠. 나중에 영감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배우들을 계속 찍는 경우도 있고요. 고양이 사진처럼 그냥 개인 작품으로 찍은 사진인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저절로 영화에 영향을 주게 될 때도 있죠.
# 디지털로 넘어온 이유
내가 디지털로 옮겨온 이유가 바로 태블릿 PC 때문이에요. 사진을 태블릿 PC에 옮겨 가지고 다니면서 계속 볼 수 있다는 것. 시간 날 때마다 찍은 사진들을 계속 보면서 조금씩 초보적인 후보정을 하죠. 필요 없는 것들은 없애기도 하고요. 처음에 찍었을 때는 좋다고 느꼈던 것도 한두 달이 지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보면서 계속 없애요. 사진을 들여다보며 참 잘 찍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대목에서 반했나, 무엇을 원하고 있나, 이런 것들을 성찰하게 돼요. 자연스럽게 그즈음 만드는 영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죠.
# 라이카를 좋아하는 이유
라이카는 색깔이 유난스럽거나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아요.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제품이 아니잖아요. 그냥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방해되는 것들을 배제한 미니멀한 디자인인데 그 어떤 스타 디자이너의 작품보다 우월하죠. 물건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물건을 만든 장인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하는 제품이에요. 영화를 만든다는 건 여러 기술자들이 모여서 일하는 것이거든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지만 순간적인 영감을 쫓아서 막 분출하는 게 아니라 톱니바퀴처럼 계산하는 수학에 가깝죠. 그래서 촬영감독, 세트를 만드는 목수, 송강호까지 다 완벽한 장인이에요. 송강호는 정말 최고의 기술자죠. 나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톱니바퀴처럼 잘 조율된 기계처럼 돌아가는 현장을 볼 때 어마어마한 존경심과 감동을 느껴요.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물건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죠.
# M 모노크롬을 사용할 때
디지털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이상한 물건이어서 좋아해요.(웃음) 이 시대에 흑백 전용 카메라라니. M 모노크롬이라면 굳이 필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기계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품들은 솔직히 디지털 시대에 빛이 좀 바랜 느낌도 있어요. 필름 시대의 완벽한 기계는 1백 년도 쓸 수 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기술이 계속 바뀌니까 완벽할 필요가 없는 기계가 되어버렸어요. 그래도 렌즈에는 아직 완벽함이 남아 있죠. 35mm 주미크론 첫 세대, 아포 주미크론 50mm를 보면 알 수 있어요.
#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는 윌리엄 이글스턴입니다. 코냑 한 병 사들고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죠. 내슈빌에서 <스토커>를 찍었는데 자택이 그 근처여서 찾아갈 수 있었어요. 하모니 코린이라는 친구 감독이 내슈빌에 사는데 <스토커>에도 짧게 우정 출연했어요. 그가 윌리엄을 소개해줬죠. 캐비닛을 열어서 보여줬는데 라이카 보디가 50개 이상 쫙 깔려 있었어요.
그 밑에 있는 리모와 트렁크를 열면 아끼는 라이카 보디만 30개 정도 따로 모아놓았어요. 이글스턴이 다이 트랜스퍼 프린트(Dye Transfer Print) 기법으로 유명한데 전시장에도 작품이 다 나오지 않아요. 전시장에서는 유리가 반사되기 때문에 디테일을 보기도 쉽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구경했죠. 황홀했어요. 사진은 복제할 수 있는 예술이지만 윌리엄 이글스턴의 다이 트랜스퍼 기법으로 만든 프린트는 그런 게 아니니까.
*다이 트랜스퍼 프린트(Dye Transfer Print) 기법
젤라틴 판에 용액을 바르면 염료를 흡수해 컬러 이미지를 형성하는 프린트의 한 방법. 색상이 영구적으로 보존될 정도로 보존력이 좋고, 색감을 풍부하게 하는 데도 유용하다. 이 프린트 방식을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윌리엄 이글스턴이다.
#사진가 박찬욱은 언제쯤
전시도 구상 중이고, 영화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진적 가치로만 접근한 책도 내려고 해요. 언젠가는 꼭 사진가 박찬욱을 보게 될 겁니다.
라이카로 영감을 찍는 사람들
<아레나>는 2017년 특별한 기획을 시작한다. 인터뷰라는 장르를 새롭게 해석한 기획 기사들을 준비할 예정. 이 기사도 그에 상응하는 1년 연속 기획이다. ‘라이카’ 브랜드를 바탕으로 영감을 얻거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본다. 박찬욱 감독이 그 첫 번째 인터뷰이다. 박지호 편집장이 직접 인터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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