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오승환
이번 시즌 76경기 6승 3패 19세이브(S), 평균자책점 1.92. 아마 오승환은 이 숫자를 평생 기억할지 모른다. 메이저리그 첫해 그가 기록한 성적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끝판대왕’으로 군림하던 그에겐 낯선 숫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승환은 시즌 중반까지 셋업맨으로 뛰었다. 마무리로 바뀐 7월부터 세이브 상황은 23차례. 그중에서 19세이브라면 평가가 달라진다. 그의 세이브가 늘어날수록 반응이 달라졌다. ‘Final Boss(끝판대장)’라고 적힌 옷을 입은 관객이 늘었다. 언론에서 ‘The Stone Buddah(돌부처)’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늘었다.
한국에서 부르던 별명이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도 통했다. 오승환은 미국에 가기 전부터 이 모습을 예상했을까? 그가 말했다. “미국이란 나라에 간 거잖나. 모든 것을 내게 맞추려고 하지 않고, 내가 다 맞추려고 간 거다. 어떤 문화라도 받아들이려고 했다.” 오승환은 각오했다.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덧붙였다. “미국에 가기 전 일본에서 2년간 활동한 경험이 도움이 됐다. 낯선 환경을 처음 겪어보는 게 아니기에, 무대는 다르지만 조금은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덤덤하다. ‘조금은 쉽게 풀어’나간 정도 이상이었으니까.
마운드 위 오승환의 모습을 보면 그 덤덤함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별명대로 오승환이 무뚝뚝해서 그런 건 아니다. 감정을 눌러 상대를 질리게 하는 전략도 아니다. 집중해서다. 당연한 말인데, 특별하게 다가왔다. 오승환이 말했다. “마운드에서 의도한 건 전혀 없다. 오히려 경기하는, 집중하는 상황에서 그런 걸 의도하고 의식해서 하는 선수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거다. 경기 중 세리머니나 제스처도 마찬가지다. 정말 기뻐서 나오는 거다. 내가 마운드에서 표정이 없는 건 의도가 아니라 집중하다 보니 편하고 자엽스럽게 나타난 거다.”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기에 더 강력하다. 이런 면이 오승환을 한국, 일본, 미국으로 이어줬으리라. 올해 오승환은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이곳저곳 앞다퉈 평한다.
그 평은 곧 내년을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오승환의 평가와는 다르다. 그가 말했다. “올 시즌을 잘했다고 해서 내년에는 좋은 성적을 내야지, 한 적은 없다. 애초에 이런 성적을 내야지 하고 시즌에 임한 적이 없다. 과거에 수술하고 재활하면서 아파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성적도 분명히 중요하지만 부상 없이 아프지 않고 운동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아프지 않고 열심히 하면 성적은 따라온다.”
그럼에도 한 해를 돌아봤을 때 그를 괴롭힌 단어가 하나 있다. “블론 세이브(Blown Save). 세이브는 너무 좋은 단어인데 앞에 블론이 붙어버리면 팀 선수나 팬에게 너무 미안하더라.” 다행히 그를 심하게 괴롭히진 않았다. 대신 ‘메이저리그’라는 단어는 그를 웃게 했다. 덕분에 동갑내기 친구들과 함께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 책도 내는 것일 테니까. “첫 번째로 좋은 일에 쓰인다는 게 제일 와 닿았다. 나중에 뜻깊은 사진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 야구 팬들에게 색다른 모습, 사복 입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도 될 거다.” 오승환이 웃었다.
그럼에도 추신수
추신수는 올해 오만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뜨거우면서 차갑고, 설레면서 허탈했다. 시즌 시작할 땐 누구보다 뜨거웠다. 그가 말했다. “시즌을 준비할 때 사실 너무 좋았다. 스물일곱, 여덟 살 때 몸 컨디션이었다. 올해는 정말 일 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부상을 네 번이나 당하면서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나.” ‘부상’이라는 단어는 한 해 동안 추신수를 괴롭혔다. 몸 상태가 좋았던 점 외에도 올해는 그에게 특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같이 야구 하던 이대호 선수가 메이저리거가 됐으니까.
대표팀에서 뛰며 친해진 동갑내기 오승환 선수 역시. 1982년생 세 메이저리거가 미국이라는 야구의 정점에서 공을 던지고 칠 수 있는 해였다.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럼에도 추신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어쩌면 ‘부상’과 ‘희망’은 그가 야구선수로 살아가며 매번 품어온 단어일지 모른다. “야구를 얘기할 때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1회부터 3회까지 좋은 일이 생기다가도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고, 다음 타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생도 마찬가지잖나. 부상을 당했지만, 이런 시간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도 안다.”
그가 희망을 꺼낸 이유를 설명했다. 야구의 신이 올해 추신수에게 시련을 줬지만, 그럼에도 잊을 수 없는 일도 있었다. 메이저리그 개막전. 4월 5일이었다. 수영초교 야구부 파란 유니폼을 입던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구장에 섰다. 대타로 출전한 이대호가 수비 볼 때 추신수는 1루로 진루했다. 그때 찍힌 사진은 화제가 됐다. 추신수는 그때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말이 안 되는 스토리다.” 그가 덧붙였다. “대호와 1루에서 찍힌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놓았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당시에는 못 느꼈다. 시간 지나고 보니 다시 올 수 없는 순간이었다.” 오승환과는 더 뜨겁게 만났다.
타자와 투수. 6월 19일이었다. 3구째 151km 속구를 추신수가 받아쳤다. 중전 안타. 고교 시절 추신수가 투수, 오승환이 타자로 만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둘은 역시 야구의 정점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셋은 그들이 함께 써내려간 추억을 기록에 남기기로 했다. 추신수가 말했다. “사실 아무래도 책을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셋의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내기로 결정했다.” 부상으로 한 해 좌절한 추신수에겐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함께하기로 했다. 감정이 뒤섞인 한 해지만, 동갑내기 친구들과 메이저리그에 선 감회는 꽤 진했다. 그리고 책을 통해 기부한다는 좋은 뜻도 모았다. 추신수가 품은 ‘희망’은 꼭 자기 얘기만은 아니었다.
도전하는 이대호
걸쭉한 부산 사투리가 스튜디오에 울렸다. 농담처럼 진담인 듯 툭툭, 자기를 표현했다. 이대호에게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포즈는 조금 불편한 일이었다. 불편해도 할 건 하기로 했다. 그냥 찍는 것도 아니라 친구들과 찍었으니까. 시즌이 끝났지만 할 일은 많았다. 아껴둔 시간을 써야 할 곳이 수두룩했다. 보통 때라면 카메라 앞에 굳이 서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대호가 말했다. “개인적으로 할 여유가 없는데, 우리가 어릴 때 꿈꾼 미국이라는 곳,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친구 셋이 함께 섰기에 추억을 만들려고 했다. 미국에 같이 있지만 의외로 함께할 시간이 없어서 결정했다.” 추억이면서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좋은 일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그가 덧붙였다.
“수익금을 좋은 일에 쓰기로 했다. 같이 하는 추억이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으니까.” 이대호는 올해 미국행을 결정했다.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실력보다 그가 맺은 조건에 갸웃거렸다. 일본 소프트뱅크에선 고액 연봉도 제시했다. 이대호는 꽃마차에서 내려 황무지로 들어섰다. 그 상황을 이대호는 ‘도전’이라는 단어로 함축한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다. 대우받으려고 간 건 절대 아니다. 1~2년 열심히 해서 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늦기 전에 좀 더 힘이 있을 때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잖나. (추)신수가 있는 곳이라서 부딪쳐보고 싶었다.”
이대호는 미국에 갔고, 추신수를 만났다. 초등학생 시절 꿈처럼 얘기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소년 야구 만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일 테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대호를 반겼다. 뭉클한 일화도 있었다. 추신수는 개막전을 꼽았지만, 이대호는 다른 순간을 떠올렸다. 그가 말했다. “내가 소속팀에서 운동할 때 신수가 찾아와줬다.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선 완전히 신인이기에 선수들이 아무도 날 모를 때, 메이저리그에서 톱 선수가 날 보러 찾아온 거니까. 모든 선수가 아는 유명 선수가 친구라고 찾아와 힘주고 코치들과 인사하는 게 든든했다.”
물론 개막전에서 만난 감동도 잊지 않았다. 그가 덧붙였다. “개막전 구장에서 몸 풀면서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느낀 감격은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한다. (초등학교 시절) 신수가 전학 왔을 때 받은 느낌과 개막전에서 받은 느낌이 비슷했다.” 이대호에겐 잊을 수 없는 한 해일 수밖에 없다. 도전했고, 꿈같은 순간을 맞닥뜨렸다. 하지만 매 순간 좋았던 건 아니다. 미국은 처음이었고, 상황도 그의 바람대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해서 이대호는 올해 지우고 싶은 단어로 ‘마이너’를 꼽았다. “일단 못해서 마이너에 갔기 때문에 솔직히 마이너란 단어는 이제 안 듣고 싶다. 한국, 일본에도 있었지만, 메이저와 마이너의 차이가 많이 나는 건 진짜 미국이다. 마이너란 단어를 지우고 싶다.” 올해 이대호는 꽤 파란만장했다. 그 과정 또한 그를 성장시킬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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