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줄기
이런저런 많은 일을 하고 가끔 매체에도 소개되다 보니 ‘대체 차인철은 뭐하는 사람인가’ 헷갈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딱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차인철이란 이름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한다. 원래 내 활동의 시작이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두 번째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 김용권과 공간을 디자인하고 브랜딩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브리콜랩으로 활동한다. 브리콜랩은 공동 작업실이라는 개념으로 여러 다른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일도 한다. 이 두 가지 줄기를 모두 명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서 ‘아트 디렉터’라는 직함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우연의 시작
정식으로 맡은 첫 번째 일은 문제집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는 거였다. ‘핵심 다지기’ 옆에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시작해서 주어진 일들을 하나씩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거창한 계획도 없었고 큰 비전도 없었다. 브리콜랩도 처음부터 기획한 건 아니었다. 일단 우리가 일할 공간이니까 두 사람의 개성을 담아보자고 합의했다. 그렇게 마음대로 꾸미는 우리를 보고 다른 친구들이 합정동 ‘리얼리티 바이츠’라는 공간을 소개해줬고, 브리콜랩이 작업하게 된 거다. 이게 또 ‘효자 샘플’이 되어서 이걸 보고 작업 의뢰를 하는 분들이 많았다. 늘 우연이 닿고 닿아 좋은 기회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따뜻한 정서
내가 그리는 그림, 일러스트나 그래픽 디자인에서 따뜻하고 친근한 정서를 느꼈으면 한다. 처음부터 그런 톤의 그림 작업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도 일러스트 분야에서는 이런 분위기의 작업을 많이 의뢰하는 편이다. ‘서울 재즈 페스티벌’ ‘청춘 페스티벌’ 등의 포스터 작업을 비롯해 많은 광고에 참여했다. 공간을 만들 때도 타이포그래피를 직접 손으로 쓴 느낌을 준다든가, 색감을 위트 있게 배열한다든가 하는 시도를 한다. 시간이 흘러도 따뜻한 정서는 변함없이 간직하고 싶다. 감성은 그대로이되 세심하게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음악과 디자인
음악을 좋아했고, 주변 친구들이 음악을 하게 됐고, 그래서 그들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꾸며주는 일을 도와줬다.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앨범 커버였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빈지노의 <24 : 26>등이었다. 이후에도 뮤직비디오, 무대 뒤 영상 등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최근에는 LP 디자인을 했다. 굉장히 모던한 그래픽, 독특한 소재 등을 활용해 실험적인 프린트를 했다. DJ들이 스크래치할 때 사용하는 샘플을 담은 LP인데, 한국 버전으로 한번 만들어보자고 DJ 돕쉬가 제안해서 작업하게 됐다. 유명한 래퍼들의 인용구를 직접 발췌해 넣었고 우리나라 래퍼들의 관용어 등도 넣었다. 박스 구성도 단순하면서 현대적이라, 기존의 내 작업과는 다른 분위기를 담을 수 있어 즐거웠다.
브리콜랩의 대표작
브리콜랩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정리된 포트폴리오를 볼 수 있다. 어떤 한 가지 방향을 꼽기엔 제각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요소가 담겨 있다. 한남동의 ‘루루디숍’은 앤티크한 감성으로 완성한 공간이다. 공간의 밀도가 높고 완성도도 마음에 들어 손에 꼽고 싶은 곳이다. 용인에 크로스핏 메이트라는 곳을 현재 작업 중이다. 약 397㎡ 되는 체육관을 전혀 체육관 같지 않은 느낌으로 만들고 있다. 언뜻 보면 갤러리 같기도 할 정도로 시야가 탁 트이고 시원한 분위기다. 아마 완성되고 나면 이런 시각으로도 체육관을 디자인할 수 있구나, 할 거다.
영감의 공간
여행을 자주 다니지는 못하지만, 1년에 한 번 정돈이 잘되어 있는 도시로 떠난다. 거리마다 특색 있는 가게가 있고, 눈여겨볼 만한 디자인이 있는 도시로 말이다. 공부도 할 겸 사진기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그런 것 외에는 사실 ‘영감을 위한 무엇’을 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거나 혹은 생각을 깊이 해야 할 때는 이곳, 스커피에 온다. 브리콜랩이 작업한 공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편안해서다. 게다가 커피도 맛있어서 하루를 정리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작업실과도 가까워서 하루에 네 번 정도는 들르는 것 같다. 여기서 일하는 모두가 다 친구들이고 내가 만든 친숙한 곳이라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브리콜랩이 아닌 차인철
의뢰받은 작업 중간중간 개인 프로젝트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진짜 내 작업. 재미있는 건, 이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생각 외로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좋고 나도 마음에 쏙 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걸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대외적인 작업에 녹이고 싶은데, 막상 그런 기회는 잘 오지 않았다. 대부분 기존의 내 작업을 보고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오피셜한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다 보면 또 어느 새 외부 작업이 들어와 결론을 맺지 못했다. 한 1년 정도, 나만의 생각으로 채워서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한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들을 결정할 때가 온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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