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이 오는 곳
작가는 본인이 원하는 걸 하지만 디자이너는 다르다. 의뢰를 받아서 작업을 시작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물을 전달하려다 보니 영감을 얻는 경로가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자료 조사다. 아메리칸 스탠다드 비데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보자. 프로젝트 의뢰를 받고 나서 분석 작업을 시작했다. 기존 비데와 차별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고, 소비자가 불편하게 느낀 점은 무엇인지를 조사했다. 번뜩이는 영감을 토대로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리서치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한 점이 가장 중요하다. 많은 소비자가 비데의 변기 커버 드는 것이 찝찝하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변기 커버가 변기와 닿지 않는 자연스러운 조형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때 찾은 게 그릇이었다. 그릇은 잘 잡기 위해 아래쪽이 파여 있는 구조다. 테이블에 그릇이 놓여 있는 이미지가 좋았고, 그 행위 자체도 비데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이 비데는 지면에 그릇을 얹어놓은 플레이팅 형상으로 만들었다.
분석파 디자이너
철저한 분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를 응용하는 것이다. 많은 경험을 했어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일상의 경험을 응용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음식 먹을 때 갑자기 비데 프로젝트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디자인과 생활을 동일시한다. 내 이름을 건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고, 그래서 모든 프로젝트가 중요하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머릿속에 드라이브처럼 나뉘어 있다. 그래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꺼내 생각할 수 있게끔 정리한 상태다.
공간 디자이너
인테리어는 제품 디자인을 위해 브랜드 콘셉트 잡는 과정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패션업계 쇼룸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과는 완전히 다르다. 쇼룸은 시크하고, 에지가 있는 반면 먹고 차 마시는 공간은 대부분 따뜻한 느낌이다. 아크네 스튜디오 매장을 보니 차가운 느낌으로 인테리어했지만 유리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사람들의 방문으로 차가우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냈다. 그런 느낌을 반영해 성수동의 에젤 커피(EZER COFFEE)를 디자인했다. 공장 지역의 거친 느낌과 시크한 느낌을 합쳤다. 여기에 식물과 자연스러운 채광을 더해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보버 라운지
가구와 조명 디자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나니 다음 단계는 공간이었다. 공간에는 가구가 필요하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공간에 기성품을 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스토랑 공간에 완벽히 맞는 가구와 조명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왔다. 첫 프로젝트는 주유별장이라는 한식당이었다. 이를 계기로 공간에 맞는 가구와 조명을 디자인하다 공간까지 제대로 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그게 보버 라운지 프로젝트였다. 의미 없는 것을 공간에 넣는 것을 싫어한다. 물건이 거기에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보버 라운지가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것들만 디자인해 구비했다. 샹들리에부터 가구, 조명, 쇼케이스 바 등을 전부 디자인했다.
상업 디자이너
상업 디자인은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레스토랑 작업 일정은 상당히 빠듯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샹들리에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얇은 삼각기둥 형태의 크리스털 기성품을 제조하는 공장이 있었다. 그래서 그 크리스털 길이와 개수만 변형해 4개의 샹들리에를 만들었다. 그렇게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상업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팔리는 디자인
공간, 가구, 제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건 어렵다. 쉽게 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내 이름을 내세우다 보니 욕심을 부리게 된다. 좋은 사례들을 선보이면 클라이언트가 기본적으로 내 스타일을 존중해서 프로젝트를 맡긴다. 그래서 시안을 많이 제안할 필요가 별로 없다. 하나를 할 때 완벽하게 해나가고, 클라이언트와 작업 상황에 대해서 고민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에 클라이언트의 상황, 회사의 현재 상황 그런 세세한 부분을 전부 듣는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예산으로 어떤 타깃을 노리는지 명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팔리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생명력이 없다. 소비와 직결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좋은 성과를 내려면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모두 다 아는 사람
해외에서 언급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디자이너가 있지만 해외에서 유명한 한국인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떠올리기 쉽지 않다. 디자이너들끼리는 잘 알지만 대중적으로 유명한 한국인 디자이너가 없다. 해외 유명 가구 브랜드나 제품 브랜드는 디자이너와 협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리빙 브랜드만 해도 유명 디자이너 라인이 따로 존재한다. 브랜드의 철학에 디자이너의 색을 입혀서 출시하는 것이다. 아직 한국에는 그런 사례가 없다. 나는 아메리칸 스탠다드나 3M 같은 해외 브랜드와 종종 작업하는데, 이런 일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국내에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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