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품고 걷다
성북동 성곽길 따라 낙산공원까지,
조선 왕조 5백 년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태조 5년(1396)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성이 한양도성이다. 전체 길이가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 현존하는 도성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1396~1910)인 5백14년 동안 도성 기능을 수행한 사실로도 유명하다.
한양도성 성곽길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성대입구의 혜화문에서 출발해 와룡공원을 거쳐 삼청각, 한용운의 심우당, 현재는 찻집인 수연산방, 법정의 길상사를 거쳐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한나절 마음을 비우고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코스다.
혜화문을 통과해 주택들 사이 골목길을 걷다 와룡공원으로 오르는 언덕길이 성북동 성곽길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성곽을 오른쪽에 끼고 푸른 숲과 멀리 오밀조밀 정겨운 성북동 주택들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어느새 와룡공원에 이른다. 군사보호구역이 있는 숙정문이 아닌 삼청각 방향의 성벽 문을 통과해 이번에는 성곽을 왼편에 두고 숲길을 걷는다. 서울 안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나무와 풀 향이 가득한 길이다.
삼청각은 이제 레스토랑이자 찻집으로 운영한다. 삼청각 노천 테라스에 앉아 차 한잔 음미하며 걸어온 성곽길을 돌아보면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삼청각을 나와서 주택가 인도를 걸어 내려오다 보면 한용운이 살았던 생가, 심우당이 달동네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만해의 굳건한 기개와 소박한 삶을 돌아보며 심우당 마루에 잠시 앉아본다.
심우당을 나와서 상허 이태준의 고택이었던 수연산방 벽에 기대어 옛 문인의 삶을 떠올려본다. 이제 오밀조밀 낡은 성북동 골목길을 빠져나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 주인공 자야(김진향)가 평생 모은 재산을 기증해 지은 길상사로 향한다. 자신의 전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한 그녀의 고백이 세속의 가치관에 물든 정신을 깨운다.
길상사를 둘러보고 이제 다시 출발점인 한성대입구로 돌아와 낙산으로 향한다. 낙산공원은 석양이 지고 푸르스름한 어둠이 몰려오는 시간이 가장 좋다. 가로등이 켜지고, 오순도순 정겨운 집들마다 불이 켜진다. 자연의 푸른빛과 인간 세상의 조명이 어울린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길을 걷는다는 건 그 길의 좌우로 펼쳐진 공간과 시간을 두루 살펴보는 지혜로운 행위다.
구불구불한 성곽을 따라 걷는 길에는 과거와 현재가 이웃한 경계를 넘나드는 즐거움이 있다. 서울의 밤을 응시하면서 가끔은 한 발짝 벗어나서 풍경처럼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그 시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먼 미래를 아우를 수 있는 혜안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은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걸어야 한다.
성북동 >> 낙산공원
반포에서 느끼는 파리 감성
서리골 공원에서 몽마르뜨 공원까지,공원과 공원을 연결해주는 계단. 등산복 차림의 주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쓰고, 또 쓴다. 그간 독립 장편, 단편 영화를 여러 편 만들면서 참 많이 썼다. 상업 장편 영화 입봉을 앞둔 요즘엔 작업량이 배로 늘었다. 쓰고, 고치고, 다시 쓴다. 어느 한 장면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노트북을 덮고 길을 나선다. 반포에 이런 숲속 공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몇 년 전 일이다.
바람이 솔솔 부는 늦여름과 초가을 저녁이 산책하기 좋지만, 아무렴 어떤가. 한낮에 햇살을 받으면서 광합성을 하기에도 아주 좋은 길을 발견한 이후 머릿속이 헝클어질 때면 이곳을 찾았다. 먼저 그 시작은 고속터미널 역이다. 지하철 7호선 3번 출구로 나오기 전 편의점에서 이온 음료를 하나 산다.
그리고 연결된 육교를 따라 걷다 보면 서리골 공원 숲길 입구가 나온다. 제법 울창한 숲이 펼쳐지는데, 바로 건너편에 화려한 쇼핑센터를 마주하며 산을 오르는 기분이 재미있다. 우렁찬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열심히 오르다 보면 팔각정 쉼터 푯말이 보인다.
이때 팔각정 쉼터에 앉아서 아까 구입한 이온 음료를 시원하게 들이켜면 뭔가 뿌듯해진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면서 머릿속에는 이 능선을 넘어 몽마르뜨 공원을 가야겠다는 목표 의식뿐이다. 그렇다. 오늘 산책의 메인 코스는 몽마르뜨 공원이다. 얼마 전, 칸 영화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파리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숙소 근처 공원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 기억이 참 좋았다. 그러고 보니 서울의 우리 동네에도 몽마르뜨 공원이 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쨌거나 팔각정에서 누에다리 푯말을 따라 걷다 보면 미래 지향적으로 디자인한 은색 누에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 너머에 초록 잔디밭과 탁 트인 하늘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몽마르뜨 언덕이 있다. 한불 수교 1백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하지만 어쩐지 스케치북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 공원이다. 복잡한 생각을 구름 위로 띄워버리고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면, 여기가 진짜 몽마르뜨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서리골 공원 >> 몽마르뜨 언덕
서울의 기억을 품은 북촌한옥마을길
북촌전망대에서 이준구 가옥까지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삼청동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코리아 사우나. 바로 옆에 복정 우물이 있다.
2008년, 가로수길에서 삼청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한 뒤부터 내 일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선우와 서우의 아빠가 됐다. 삼청동은 빠르고 복잡한 서울의 삶에서 쉼표 같은 소박한 마을이다. 작은 산동네에 낮은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시야가 넓고 정취가 좋다.
특히 어두운 밤 고즈넉한 마을에서 반대편 불빛 가득한 도시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많은 생각이 든다. 공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어 그런지 장소를 보는 방법이 조금은 복잡하고 구체적인 편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온전한 나로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마음을 다스리고 싶을 때, 어김없이 산책에 나선다.
가끔은 일의 영감을 얻기도, 복잡한 생각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좋은 장소는 좋은 친구처럼 마음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삼청동에서 사계절을 여러 번 보내면서 익숙해진 길에서 새롭게 발견한 장면을 소개하고 싶다. 먼저 전망대길이라고 불리는 북촌로5나길은 북촌한옥마을을 대표한다. 인왕산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고 계절의 변화를 가장 빨리 느낄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큰 계절에는 초저녁 아름다운 노을도 볼 수 있다. 삼청로4길 어귀에는 복정 우물터가 있다. 도로가 있는 넓은 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드는 삼청로4길은 방향 전환이 잦아 장면의 변화도 많다. 자칫 헤맬 수 있으나 복정 우물터를 기점으로 삼으면 내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다. 돌계단과 경사로가 재밌게 연결되어 지루하지 않고 장면에 이끌려 오르게 된다.
북촌로11가길은 주차장이 달린 주택단지에 기와지붕만 얹은, 이 동네에서 가장 현대적인 마을길이다. 주로 주한 대사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좁은 계단 길을 통과하면 다시 북촌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준구 가옥을 경계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 특징. 가장 높은 곳에서 보이는 남산타워와 빌딩, 관광객이 빠지고 동네 어르신들이 아이들과 산책을 마친 한적한 시간에 그 장소에서 보는 서울 야경이 가장 좋다.
북촌전망대 >> 이준구 가옥
오래된 골목의 매력
을지로부터 충무로까지몇십 년의 역사가 한눈에 보이는 을지로 건물의 옥상.
생각이 많아질 때, 그 무게를 조금 덜어내려고 걷는다.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걷다 보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고민, 해결되지 않은 어려운 문제를 똑바로 바라본다. 산책이 끝나면 정리된 생각이 남고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개운해진다. 생각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걸을 땐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음악을 듣지 않는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리다 그 곡에 빠져 생각을 멈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그날의 산책에 어울리는 노래를 찾고, 스마트폰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산책은 실패다. 또 다른 규칙은 풍경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걸으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침을 뱉는다거나, 쓰레기를 던진다거나, 새치기하면서 버스를 타는 광경 같은 것들. 그럴 땐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모든 규칙이 깨지는 산책길이 서울에 있다. 사무실과 책방 근처인 을지로부터 충무로까지 이어지는 인쇄골목이다. 좁은 골목, 낡은 건물, 종이를 실은 지게차, 오토바이, 기계 소리, 잔뜩 무언가를 들고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 분명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는 편인데 이 골목에 들어서면 사람들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정신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쇄소, 지류사, 제본소, 후가공 업체들이 좁은 골목에 즐비했고 지게차나 오토바이를 피하기 바빴다. 그런데 인쇄골목에는 에너지가 있다. 이곳을 걸으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쇄골목 전성기에는 우리나라 인쇄 물량의 70%를 처리했다고 한다.
과거부터 축적된 강력한 노동의 힘일까? 강남역, 광화문 사거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을 바라볼 때와는 분명 다른 마음이다. 그래서 가끔은 큰길로 가지 않고, 작은 골목으로 걷는다. 출근 후 사무실에 가방만 두고 나와서 이 인쇄골목을 걸을 때가 있다. 하루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열심히 살자! 성실하게 노력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라는 약간은 거짓 같은 희망을 품게 된다.
을지로 >> 충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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