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프들 사이로 신혜선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빨갛고 달게, 수박처럼 웃었다. 웃을 때마다 눈이 동그랗게 휘었다. 목소리는 아삭거리며 공기를 갈랐다.
쨍쨍하기만 한, 습도 30%의 목마른 여름날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챙길 때, 신혜선은 낭창낭창한 팔을 스스럼없이 뻗어 상대를 끌어안았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다. 처음 본 사이니까, 하며 괜히 혼자 허물을 뒤집어쓰고 주춤거렸다면 창피했을 거다.
우리는 터미널 대합실에서 가져온 듯한 벤치형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새끼손가락만 한 웨하스를 작은 테이블 위에 쌓아놓고서. “하나 먹어도 될까요?” 생각 없이, 이런 말이 그녀 앞에서는 그냥 흘렀다. 신혜선은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빨갛게 웃었다. 바닐라 맛 웨하스를 한 조각 쥐어주면서.
해가 뜨겁네요.
비가 올 거라 했는데, 안 오네요. 저 여름 좋아해요. 쨍쨍한 날도 좋아요. 그런 날의 장면이 좋아서요. 여름 냄새도 좋아요. 이 동네 분위기가 재미있네요. 합정역 근처죠?
이 동네는 생소한가요?
몇 년 만에 와봐요. 사는 곳이 건대 근처거든요. 주로 건대나 강남 쪽에만 머물러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썩 좋아하지는 않아요. 한적한 곳을 선호하는데 집 밖으로 나설 때면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요. 하남이나 팔당 같은 곳에 가요. 드라이브 한 번 하고 오면 좋아지더라고요. 혼자서도 종종 가요.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없으면 못 버티는 사람이에요.
사람들과 어울리길 즐길 거라 생각했어요. 스태프들에게 먼저 손 내밀고 사근사근하게 대하기에.
와글와글 웃고 떠드는 것도 잘해요. 그런 걸 싫어한다기보다는, 늘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일을 하니까 쉴 때면 혼자 있고 싶어져요. 아니면 몇몇 친구들을 만나서 노닥거리거나. 그래야 정화되는 기분이에요. 매일 단것만 먹으면 혀가 지치잖아요. 비슷한 것 같아요. 가끔 맹맹한 맛도 보고 그래야 좋잖아요.
<해피투게더>에 출연한 걸 봤어요. 자신의 모습을 다 보여주는 데 저렇게나 주저함이 없을 수 있을까 했어요. 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더라고요.
꾸미는 건 더 자신 없거든요. 하하. 예능 프로그램 좋아해요. 너무 재미있어요. 그런데요. 저는 그런 프로그램에 자주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요. 꾸며서 보여주는 걸 못하니까요. 솔직한 모습도 한두 번이죠. 많이 보여주면 질릴 거예요. 만약 즉흥으로 춤추거나 노래하라고 했다면 정말 망했을 거예요.
춤추고 노래하는 흥은 없나 봐요.
어렸을 땐 뭐든 나서길 좋아했어요.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숫기가 없어졌어요. 사람들 앞에 나서 뭘 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예고를 나왔어요. 예고에서는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끼리 한 명씩 무대에 서듯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고 장기자랑을 하며 놀아요. 연기하려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부끄럼 없이 설 수 있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저는 춤을 못 추니까 그런 시간이 즐겁지 않고 지옥 같았어요. 한편으로는 나도 잘 놀고 춤 잘 추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훨씬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죠. 고등학교 때는 그런 게 제일 고민이었어요.
그 학교에는 그런 거 잘하는 친구들만 가득이었을 텐데.
다 잘했어요. 춤과 노래를 못해서 배우가 되지 못하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스러웠어요. 가게를 차릴까? 노래방이나 할까? 어렸을 땐 노래방을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요. 있으면 당연히 더 좋겠죠, 그런 끼. 그런 끼가 없다고 해서 연기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에요. 연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니까. 다른 일이라 느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연기자를 꿈꿨다고 했죠?
초등학생 때부터요. 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땐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목받고 사랑받는 걸 엄청 좋아했거든요. 방송인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제게는 주목받는 직업으로 보였거든요. 나도 주목받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 어릴 때만 해도 배우나 연기자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무조건 ‘탤런트’였지. 게다가 탤런트가 꿈인 사람도 거의 없었고 배우나 연기자가 되고 싶어도 그냥 다른 꿈을 적어내는 친구들이 많았죠. 저는 그래도 늘 장래 희망에 ‘탤런트’라 썼어요.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캐릭터는 배우의 기억에도 오래 남나요? 드라마 <아이가 다섯> 속 연태는 어떨 것 같아요?
연태로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기억에 오래 남겠죠. 그런데 사실 저는 연태보다는 성격이 시원시원해요. 연태는 많이 답답하잖아요.
답답하지만, 그만큼 감정에 있어 느긋한 사람인지도 모르고요.
맞아요. 요즘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천천히, 마음이 일어나는 아이인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다른 면은 답답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남자한테만 유독 그래요. 자기 속마음은 절대 얘기 안 하죠. 모태 솔로라서 그런가? 저는 그게 제일 답답했거든요.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거. 저는 좋아해서 만나는 남자한테는 꼭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혜선이라면, 자신의 마음에 완전히 솔직할 수 있어요?
먼저 고백해본 적도 있어요. 그래도 나중에는 상대방이 저를 더 좋아하게 되었죠. 헤헤. 그때 한 번 그래 봤어요. 근데 괜찮은 것 같아요. 거절당하면 진짜 창피하지만 속은 후련하잖아요. 안 되는 일이구나 하며 털어버릴 수 있으니까.
여자든 남자든 어떤 관계이든 저는 좋아하는 마음, 호감이 생기면 그와 친해지려고 먼저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제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하는 날이 자주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때마다 말해버리고야 말 테니까.
연태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답답한 순간도 있었어요. 요즘에 저런 여자가 어디 있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맞아요. 정말 요즘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심지어는 ‘원나이트’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인데. 게다가 요즘 여자들이 얼마나 시원시원해요.
신혜선도 요즘 여자인가요?
감정에 많이 솔직하다는 점에서는요.
요즘 여자 맞군요.
그런데요. 그게 참 그래요. 한창 만날 때는 상대방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 제일 가까운 사람인데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먼 사람이 되잖아요. 저는 그게 늘 이상했어요. 말이 나온 그 시점부터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 생이별하는 느낌이니까. 이성적인 관계는 끊어버릴 수 있어도 정 떼는 게 늘 힘들었어요.
신혜선은 어떤 것을 할 때 가장 적극적이에요?
심심할 때 친구들 끌어모아서 노는 거 잘해요. 몇몇 친한 친구들이 있어요. 근데 또래 친구들이랑 어울리려면 클럽 같은 데도 가야 하는데, 한두 번 이끌리듯 가보기는 했지만 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밤 문화도 좀 즐기고 싶은데 막상 쉽지 않더라고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미리 알아봤는데, 알 길이 없었어요.
하하하. 소속사에 생년월일은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아직 신인인데 너무 나이가 많은 것 아니냐는 이야길 들을까 해서. 듣는 건 괜찮은데 누군가는 색안경 끼고 볼 것 같았어요. 그런데 어찌해도 다들 알게 되더라고요. ‘생각보다 나이는 좀 있는 편’이라는 댓글을 보기도 했어요. 그때 느꼈어요. 제 나이가 사회적으로는 많은 축에 드나 보다. 저 스물여덟이에요.
스물여덟 신혜선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나요?
원래는 먹는 걸 너무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요즘은 입맛 도는 게 싫어요. 입맛 돌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거든요. 친구들이랑 서로의 집에서 노는 걸 좋아하고요. 혼자 있을 때는 ‘미드’나 애니메이션 보길 즐겨요.
어릴 때부터 영상물 보는 게 굉장한 취미였어요. 하나에 빠지면 끝까지 봤죠. 병적으로 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요. 그게 저한테는 치유하고 충전하는 시간이었어요. 요즘은 이걸 못하고 있어요. 적어도 일주일은 칩거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요.
시간이 주어질 땐 주로 어떤 걸 봐요?
안 가리고 다 봐요. 시트콤을 좋아해요. 특히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같은 ‘병맛’ 코미디 드라마요. 블랙 코미디예요. ‘블랙 병맛’이죠. <빅뱅이론>도 재미있었는데 ‘너드물’은 이제 좀 질려요.
영화도 많이 봐요?
옛날에 정말 많이 봤어요. 데뷔 전과 초기예요. 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문제는 우리나라 것을 거의 안 봤다는 거죠. 아무래도 우리 정서는 제게 익숙하고 외국 정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저는 영화에 표현된 정서를 재미있어 했거든요. 개그 코드도 마찬가지고요. 일본식 개그, 영국식 개그, 미국식 개그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웃기는지, 그런 걸 발견하는 게 진짜 재미있었어요.
코미디나 개그물을 좋아하면, 직접 하고 싶은 욕심도 있겠어요.
저 시트콤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요즘 시트콤이 다 없어졌잖아요. 아쉬워요.
늦게 데뷔했다는 마음이 여전히 들어요? 마음도 급하고?
요즘은 워낙 다들 일찍 데뷔하니까요.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그렇죠. 데뷔하기 전이랑 직후에는 마음이 급했어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힘들더라고요. 쫓기는 꿈도 꾸고요. 지금은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요. 다 놓아버리자고 생각해요.
막연하게 꿈꾸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들어요. 그중에서 불안한 마음은 덮어둬야겠죠. 모른 척하려고요. 저는 이 일이 너무 좋아요. 성공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떤 길을 그리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그냥 가는 대로 가보려고요. 지금은 마인드 컨트롤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어요.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으니까. 지금 저는 그냥 연태이고, 연태 말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원래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못하거든요.
배우가 일생일대의 꿈이었잖아요. 그 꿈이 현실이 되었는데, 어떤가요?
살아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소의 저는 무기력하거든요. 감정도 일정한 선을 유지해요. 하지만 연기할 때는 감정을 끌어올렸다가 내동댕이치고 다시 달래서 가져오기도 하잖아요. 배우일 때 나라는 사람한테 엄청난 생동감이 생겨요. 그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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