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꾸었다고요, 며칠 전에.
본명인 김고운에서 채서진으로 바꿨어요. 이제는 채서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요. 천천히 하나씩 바꾸고 있어요. 하루는 인스타그램의 이름을 바꾸고 또 하루는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되는 이름을 바꾸고요.
예명을 쓰는 경우야 흔하지만, 새 이름을 짓는 게 예삿일은 아니잖아요.
좀 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고 싶었어요. ‘고운’이라는 이름이 흔하니까요. 또 배우로서 길을 가는 데 언니(김옥빈)와의 분리가 어느 정도 필요할 것 같았어요. 너무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 검색어에 ‘김옥빈 동생 김고운’으로 제 이름이 올랐어요. 김고운의 당연한 수식어가 되더라고요.
많은 이름 중에 채서진이 좋은 이유가 있어요?
이름 뜻이 ‘서쪽에 향기를 널리 풍겨라’예요. 뜻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발음을 해보니까, 저랑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언니랑 머리 맞대고 3일 밤낮을 고민하면서 정했어요. 언니가 저보다 더 많이 고민해줬고, 성명학까지 공부했어요.
새 이름으로 나선 영화 <초인>이 어린이날 개봉했어요. 저는 두 번 봤는데, 영화가 가진 기운이 무척 좋았어요.
<초인>은요, 학교 선배와 동기가 함께하다 보니 현장이 꼭 교실 같았어요. 게다가 다들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첫 주연이고 상대 배우인 (김)정현 오빠는 첫 출연이고, 서은영 감독님은 첫 장편 영화이고요. 다들 너무나 설레는 마음으로 무작정 열심히 했어요. 패기, 패기, 열정, 열정. 이런 단어가 모두의 이마에 쓰여 있었어요. 하하. 그렇게 똘똘 뭉쳐서 다 같이 달려들었어요. 생각해보면 독립 영화는 그런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미세한 부분까지 다 함께 신경 쓰고, 이야기 나누고. 촬영하는 내내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어요. 다들 처음인데도.
맑고 밝지만 사실은 아주 어두운 일을 겪은 고등학생 역을 맡았잖아요. 인물이 지닌 마음의 진폭이 커서 표현하기 쉽지는 않았겠어요.
어느 날 세영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될 줄 까맣게 몰랐잖아요. 서은영 감독님께서는 제 나름대로 세영이를 만들어갈 수 있게 절 믿고 기다리셨어요. 그런데 세영이 겪은 일이 너무 거대해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러자 감독님께서 한마디 해주셨어요. “그 일을 겪기 전의 세영이는 너처럼 밝고 맑았을 거야”라고요. 마냥 어둡게 표현하지 않으려고, 그 중간의 어떤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요즘은 또 다른 영화를 촬영 중이라고 들었어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라는 영화예요. 김윤석 선배님과 변요한 선배와 함께 출연해요. 이제 절반 정도 촬영을 마쳤어요.
그 영화에서는 어떤 인물이 되나요?
일단 정신력이 강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밝게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하면서 살아요. 시대 배경이 1985년도 즈음인데, 국내 최초의 여성 돌고래 조련사거든요. 어떤 분야에서 최초의 인물이 된다는 게 여간 씩씩하지 않고는 어렵잖아요.
예뻐서, 예쁘다는 이야길 많이 들으며 살아왔을 것 같아요. 그런데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하는 구석은 또 따로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좀 진득해요. 많이 진득해요. 그게 저는 좋아요. 배우는 속도가 느리지만 한번 시작하면 끈질기게 해요. 근데 이런 면이 사람을 대할 때도 나오나 봐요. 친구들이 저한테 그래요. 나무 같다고요. “너는 나무처럼 항상 그 자리에 있다”고 자주 말하거든요. 친구들이 어떤 실수를 하든, 무슨 일을 겪든 저는 원래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편이에요.
침착하고 긍정적인 편인가 봐요.
아주 많이 긍정적인 편이었는데, 요즘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하하. 침착하고 차분한 것도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언니랑 생긴 것만 닮았지, 성향이나 성격은 많이 달랐거든요. 언니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반면에, 저는 집에 머무는 걸 좋아했어요.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기고요. 사고도 안 치고, 사춘기도 없었어요. 엄마가 편했죠.
사춘기가 없었다고요?
네, 이상하죠? 정말 사춘기가 없었어요. 저는 대학 입시도 즐겁게 준비했어요.
어떻게 입시가 즐거울 수 있어요?
예고에서는 1, 2학년 때 친구가 3학년이 되는 순간부터 경쟁자로 돌변해요. 서로 눈치 보면서 적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요. 전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입시 준비를 외부에서 했어요. 동아리 같은 형태로 소수 그룹을 만들어서 했어요. 그렇게 레슨 받은 곳이 신논현역 부근이었거든요. 당시 집이 한티역 부근이고요. 입시 레슨이 끝나면 신논현역에서 한티역까지 걸어서 갔어요. 걷다 보면 생각 정리도 되고, 바람도 쐬고, 자연스럽게 다이어트도 됐죠.
배우는 언제부터 되고 싶었어요?
꿈이란 걸 생각하던 때부터요. 아무래도 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중·고등학교 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소설보다 언니 시나리오를 더 많이 읽었어요. 식탁 위에 있는 걸 밥 먹다 읽고, 텔레비전 보다 소파 옆에 있는 걸 또 읽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재밌는 거예요. 나랑 맞는 것 같고. 그래도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배우가 되겠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서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동기, 선후배를 만나면서 연기를 배우면서 진지해졌어요. 생각도 엄청나게 확장됐고요.
그럼 연기를 배우는 사람일 때와 지금은 다른가요?
본격적으로 뛰어들어보니 요즘은 자꾸 욕심이 나요. 성공도 하고 싶어요. 욕심이라기보다 바람에 가까우려나? 20대가 가기 전에 인생작 하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 20대가 가기 전에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절 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많이 경험하고 성장해서, 30대가 되면 ‘배우’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20대의 꿈이 ‘배우’로서 기틀을 제대로 닦는 거라면, 배우로서 일생을 두고 표현해보고 싶은 감정도 혹시 있을까요?
인간이 품은 가장 밑바닥 감정, 악이라는 감정에 대해서예요. 일본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의 소설이 엄청 어둡거든요. 그의 작품 중에는 일단 <그로테스크>랑 <아웃>을 읽어야 해요. 그럼 관심이 생겨서 <다크> <아임 소리 마마>까지 줄줄이 찾아보며 읽게 될 거예요. 어둡고 추악한 감정을 다 드러내는 작품들이에요. 잔인하다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공감하는 지점이 보여요. 이해와 이질감이 동시에 들죠. 두려움과 짠한 마음도 함께 생기고요. 나도 살면서 언젠가는 이런 감정을 겪을까? 싶은 마음에 흥미가 생겼어요.
‘초인’이라는 제목은 영화 초반에 세영이 읽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단어잖아요. 세영이는 끝내 초인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세영을 연기하는 동안 배우 채서진은 ‘초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을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 정의 내린 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게 초인이 아닐까 싶어요. 성공하는 길이든 아니든,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 힘든 세상이니까요.
초인이 되고 싶은가요?
네. 그리고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더라도 갇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연기가 제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발전하고 경험하고 성장하면 연기도 같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요. 영화 <커튼콜>로 만난 전무송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연기를 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요. 전무송 선생님은 그 말씀과 너무나 일치되는 삶을 사세요. 그분처럼, 그분의 말씀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가면서, 조금씩 발전하면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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