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가 다시 한 번 상한가다. 반면 DC 영화는 연일 체면을 구기고 있다. DC 코믹스 원작으로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트맨 대 슈퍼맨>)과 마블 스튜디오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캡틴 아메리카 3>)의 ‘코믹스 영화 승부’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마블의 압승으로 끝났다. DC의 <저스티스 리그>는 야심 찬 ‘시작’이 무색하게 자중지란에 빠진 분위기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 실망한 팬은 영화를 만든 잭 스나이더가 이후 발표할 <저스티스 리그>에서 하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DC 코믹스의 또 하나의 대표 히어로 <플래시> 프로젝트도 시끄럽다.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링컨: 뱀파이어 헌터>의 원작자) 감독이 워너브러더스 경영진과 갈등해 하차하면서 2018년 개봉에 차질을 빚게 됐다. <플래시>와 같은 해 개봉 예정이던 <아쿠아맨>도 제작이 위태롭다. 감독으로 내정된 제임스 완(<컨저링> <쏘우> 등 연출)이 프로젝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뜬소문이 돌고 있다.
제작 시스템 문제라는 게 일각의 분석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걸출한 제작자 케빈 파이기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를 총괄해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것과 다르게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DCCU’)는 사공이 너무 많다는 게 요지다. 원작 측인 DC 코믹스에, 기획과 제작 측인 워너브러더스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크리스토퍼 놀런(<다크 나이트> 시리즈)에, 최근 총괄 프로듀서 역할까지 맡은 벤 애플렉까지, 의사 체계가 분산되니 영화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DCCU 세계관은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근간으로 한다. MCU가 만화적 상상력을 그대로 살리는 쪽이라면 DCCU는 슈퍼히어로의 사실적 묘사에 신경 쓰는 편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시작만 하더라도 뉴욕을 연상시키는 메트로폴리스의 고층 빌딩이 무너져 지상이 쑥대밭이 되는 장면은 9.11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를 자아내는 오프닝에도 불구하고 잭 스나이더는 DCCU의 색깔을 밀어붙이는 대신 현실성 떨어지는 ‘빌런’ 둠즈데이를 등장시켜 그 자신의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배트맨 대 슈퍼맨>의 결정권자는 이후 이어질 DCCU가 사실주의 슈퍼히어로, 즉 예술적인 블록버스터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듯하다. MCU가 철저히 대중 취향에 맞춰 흥행 고공 행진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크리스토퍼 놀런과 잭 스나이더가 제시한 애초의 비전이 대중적으로 수정되기를 바랐을 터다. 9.11의 현실 이미지로 시작한 <배트맨 대 슈퍼맨>이 어느 순간부터 둠즈데이와 같은 공상과학 세계로 급우회전을 감행한 배경이다. 그렇게 영화는 기대와 다르게 산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결과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정 하나. DCCU도 처음부터 잭 스나이더와 같은 개성 강한 감독 대신 MCU처럼 자기 색깔을 지우고 스튜디오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겼다면 지금과 같은 처절한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까? 흥행에서는 지금보다 나았겠지만, 그렇다고 MCU를 넘어서거나 버금갈 정도 성적을 얻기는 역부족이었을 것 같다. 아무리 잭 스나이더가 <배트맨 대 슈퍼맨>을 뛰어난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도 슈퍼히어로를 향한 대중의 열망은 이미 MCU에게로 넘어간 상황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시대에 민감하다. 리처드 도너가 1978년 연출한 <슈퍼맨>이 성공한 데는 개봉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미국과 구(舊)소련이 첨예하게 맞붙던 냉전 한가운데서 미국은 자기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할 스펙터클이 필요했다. 슈퍼맨은 제격이었다. 크립톤 행성에서 지구로 이주한 슈퍼맨의 성장 배경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지금의 미국을 일군 국가 정체성과 맞아떨어졌다. 성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유니폼에서부터 슈퍼맨은 미국 그 자체였다.
정확히 명시한 건 아니었지만, 극 중 슈퍼맨의 적수인 렉스 루터는 구(舊)소련으로 치환해도 무방했다. 렉스 루터는 군사용 미사일을 조작해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계획을 세운다. 외부 침략에 민감한 미국은 이와 같은 설정을 전가의 보도 삼아 자신을 선으로, 이에 반대하는 인물이나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며 유리하게 여론을 이끌었다. 실제로 <슈퍼맨>은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흥행에 성공했고, 속편을 거듭 내놨다. 그리고 구(舊)소련이 점점 힘을 잃어가자 <슈퍼맨 4: 최강의 적>(1987)을 끝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현실의 거대한 적이 사라지자 슈퍼히어로 영화의 미학을 결정 짓던 미국의 시선이 달라졌다. 내적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적이 없어지면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는데 변한 것이 없었다. 너무 바깥의 정의에만 몰두한 탓일까. 미국 내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강력 범죄가 횡행했다. 구(舊)소련이 붕괴했다고 하지만, 세계 곳곳은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으로 신음했다. 미국이 부르짖던 정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미국은 세계 경찰로서 자격이 있는 걸까? 이제 슈퍼히어로는 얼굴을 드러내는 대신 가면을 썼고 음지로 숨어들어 정체를 숨겼으며 자기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다. 바야흐로 배트맨 시대가 도래했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배트맨을 ‘다크 나이트(Dark Knight)’ 즉, 밤의 기사로 규정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정의는 반쪽짜리였다. 미국이라는 슈퍼히어로는 적이 있어야 자신을 증명하는 모순적 존재였다. 흑과 백, 동전의 양면. 현실의 미국이 전쟁을 조장해 세계에 힘을 과시하듯 배트맨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악을 불렀다. 조커가 필요한 건 그래서였다. 마침 <다크 나이트>가 개봉한 2008년은 조지 부시 이후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가 부상하던 시기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새 시대의 도래가 유력해지면서 미국에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했다. 진보는 환호했고 보수는 기득권을 뺏길까 노심초사했다. 힘의 균형이 필요한 시기였다. 여기서 크리스토퍼 놀런은 배트맨과 조커가 호각세를 이루는 대립을 봤다. 슈퍼히어로물이 코믹스의 외피를 벗고 사실주의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현실에서 선과 악은 나와 너를 가르듯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과 조커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선과 악이다. 배트맨은 조커보다 선한 존재고, 조커는 배트맨보다 악인일 뿐이다. 정의를 구현한답시고 배트맨이 조커와 맞설 때마다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다. 고담의 여론은 배트맨에게 좋지 않다. 배트맨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배트맨에게 많은 이가 열광했다. 초인으로 알았던 존재에게서 인간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배트맨 대 슈퍼맨>에 혹평을 쏟아내고 <캡틴 아메리카 3>, 그중에서도 아이언맨에 열광하는 걸까. 슈퍼히어로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제 슈퍼히어로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이 아니라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입지적 경지의 존재다. 토니 스타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천문학적인 유산과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놀기를 좋아하는 재능을 더해 아이언맨으로 거듭났다. 실제로 토니 스타크의 모델이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이자 거물 사업가인 일론 머스크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들에게는 고민할 시간도 아깝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신소재 수트를 개발하거나 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의미 있다. 아이언맨에게는 정의도 놀이요, 재미다. 아니, 정의 따위 지키지 않은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정의가 문자로만 존재하는 시대에 자기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하지만 해를 입힌다면 복수만으로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데드풀>이 그렇다. 개인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현재 세계 평화가 웬말인가. <데드풀>의 성공이 뜬금없지 않은 이유다. 이제 슈퍼히어로에게도 개인적인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 <엑스맨> 이후로 슈퍼히어로가 팀을 이루는 것이 유행이지만, 슈퍼히어로의 개별성도 그에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 이를 간파한 것이 마블 스튜디오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앤트맨 등등 개별 영화로 슈퍼히어로 개인을 조망한 후 ‘어벤져스’를 통해 시리즈를 총정리하는 전략을 취한다.
요컨대 MCU 슈퍼히어로들은 독립적인 존재다. 이는 캐릭터 설정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DCCU와 비교해도 더욱 확연해지는 대목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확인된 바, 배트맨과 슈퍼맨은 여전히 아버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배트맨은 부모님의 죽음이 여전히 마음 한쪽을 무겁게 누르고, 슈퍼맨은 우주의 아버지와 지구의 아버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대립하던 배트맨과 슈퍼맨이 어머니의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손을 잡는 설정이 자체 논리력을 갖더라도 관객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의 실현에 목매는 슈퍼히어로가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니, 덩치만 컸지 정신적으로는 아이라는 엇박자 때문이다.
그에 반해 MCU 슈퍼히어로들은 아버지를 넘었거나 맞서는 패기로 성인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천둥의 신’ 토르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명령에도 불구, 신의 전쟁을 일으킨 죄로 아스가르드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지구로 추방당한 전력이 있다. 지구에서 토르는 잃어버린 해머 ‘묠니르’와 힘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허송세월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잃어 슬퍼하고 엄마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DCCU 슈퍼히어로가 MCU를 이길 수 없는 결정적 이유다. 둘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그동안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대변되었던 슈퍼히어로의 무게중심은 아이언맨과 데드풀 등에게로 넘어갔다. DC 슈퍼히어로가 군림하던 영화계에서 마블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이는 마블의 슈퍼히어로가 잘나서도, DCCU의 세계관이 허술해서도 아니다. 시대는 마블을 요구하고 있다. <배트맨 대 슈퍼맨>이 지금보다 더 대중적이고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MCU를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DCCU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배트맨 대 슈퍼맨> 이후 DCCU 영화는 <수어사이드 스쿼드> <원더우먼> <플래시> <아쿠아맨> <사이보그> <그린 랜턴> 등 배트맨과 슈퍼맨의 기존 캐릭터에서 벗어난 슈퍼히어로와 이야기로 기대감을 높인다. 물론 <닥터 스트레인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블랙 팬서> <캡틴 마블> 등으로 무장한 MCU와 힘겨운 대결을 펼치겠지만, 슈퍼히어로를 향한 시대의 요청이 언제 또 어떻게 변화할지 모를 일이다.
당사자 간에는 박 터지는 싸움으로 전개되지만,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 입장에서 이 대결을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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