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건, 송중기와 송혜교가 아니었으면 이 드라마의 거의 모든 장면은 무의미했을 거라는 점이다. 송중기가 그랬다던가. 이 드라마는 커플이 연애하기 위해서 헬기도 띄우고 전쟁도 나고 지진도 나는 이야기라고. 정확한 표현이다. <태양의 후예>는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살짝 얹은 로맨스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이유를 따지면 복장만 터진다. 많이 언급된 장면을 알고 있나? 한국에서 군 헬기가 병원 옥상에 착륙해 군인 한 명 실어가는 그 장면은 봐줄 수 있다. 작전 시간이 정말 촉박하고 그가 꼭 필요한 요원이라면 그러지 못할 게 뭔가. 하지만 이 드라마는 총체적으로 모든 디테일에서 현실성과는 담을 쌓았다. <태양의 후예>를 보면서 특수부대가 한밤중에 왜 개활지에서 플래시를 환히 켜고 교전 지역에 들어가는지, 저격수 옆에는 왜 감적수가 없는지, 북한군 특수부대원이 왜 제임스 본드나 쓰는 발터 PPK를 들고 있는지, 작전 투입 전에 전사했을 경우 신분이 알려지면 안 된다며 군번줄은 회수하면서 왜 군복은 멀쩡히 차려입었는지 따위를 궁금해하면 더 이상 이 드라마를 볼 수 없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그런 현실성이 아니다. 재미있는 건, 특전사만을 배경으로 찍은 장면이 이런 비현실감을 선사하는 반면에 특전사 요원인 유시진 대위가 의사인 강모연 선생을 만나는 장면은 훨씬 납득이 된다는 점이다. 이유의 절반은 송혜교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만남 덕분이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메디컬 드라마는 병원에서, 밀리터리 드라마는 군대에서, 수사 드라마는 경찰서에서 연애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수부대와 병원 전문의가 연애를 한다. 새로운 조합이다. 그것만으로 이야기는 흡인력, 정확히는 재미를 만들어낼 조건이 갖춰진다.
심리학자들은 어떤 이야기에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우선 기대를 깨는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의식적으로 예측한다. 만약 그 이야기가 예측대로 흘러가면 우리는 맥이 빠진다. “이거 완전 뻔한 얘기 아냐?” 더 이상 재미는 없다. 하지만 내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우리는 긴장한다. 이제야 비로소 이야기 흥미진진해지는 거다. 덧붙여 사소한 디테일이 관객의 예측을 미묘하게 벗어날수록 실재처럼 느낀다. 언제나 실제 사건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기 마련이니까. 이 드라마는 군 특수부대라는 낯선 전문가 집단과 병원 전문의라는 또 다른 전문가 집단이 송중기와 송혜교의 얼굴을 하고 만나는 이야기다. 이들은 늘 각자의 전문적인 일 때문에 얽히고설킨다. 대부분 시청자는 이 두 전문가 집단이 뭘 하는지는 대충 알아도,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낯설고 일반적인 예측과는 다르게 진행된다. 게다가 그 낯선 두 집단이 교묘하게 얽혀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이렇듯 예측 불허의 사건이 마구 터지는 와중에 커플이 연애를 계속 이어가는 거다.
그렇다고 계속 예측 불허의 상황만 벌어져도 안 된다. 그러다간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고로 재미를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예측을 배반하며 동시에 충족시키는 줄타기를 해야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유시진과 강모연은 다시 만날 것이고, 둘은 서로 구하거나 도와줄 것이며, 그래서 서로의 감정을 더 확인할 뿐이라는 믿음을 시청자에게 줌으로써 이 줄타기에 성공한다. 변태 이사장이 등장하는 것도, 돈만 아는 현장 책임자가 끼어드는 것도, 뜬금없는 외국인 악당이 이들만 괴롭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물론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도 있다. 유시진 대위와 강모연 선생은 모두 각자의 조직에서 중간 정도 지위에 있다. 위치가 그러니 늘 외부 요인에 영향받으며, 든든한 빽도 없기에 늘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좌절할지언정 굴복하지는 않는다. 불합리한 횡포 앞에서 이성을 잃고 버럭 화를 내지도 않고, 차분하게 할 말을 하는 여유를 잃지 않는다.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감의 배경에는 자기 능력과 동료에 대한 믿음이 있다. 아무리 잘해도 조직이나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한 방에 훅 가는 요즘 세상에서 이들의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태도는 그 자체로 멋지다. 이들은 아무리 밖에서 자신을 흔들어대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운명이 던진 찰나의 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젊은이를 불합리하게 윽박지르고 기죽이는 세상에서 전문가로서의 능력과 자부심으로 일도 잘하고 연애도 하는 사람들이라니! 다시 살아도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없을,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잠깐이나마 행복을 제공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장근영의 타심통
장근영은 심리학자다. 하지만 딱딱한 심리학자가 아니다. 게임 <리니지>를 소재로 심리학 논문을 발표하고, 영화를 보고 심리학 칼럼을 쓴다. 대중문화와 사회현상을 심리학이라는 큰 바탕 속에서 유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매달 바라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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