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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가족이 잠든 사이에

옆방엔 그녀의 가족이 잠들어 있다. 술로 태어난 용기와 섹스에 대한 욕구가 만들어낸 추억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취기로 인한 가물가물한 영상을 연꽃 향의 도움을 받아 사죄하는 마음으로 회상해본다. <br><br>[2007년 1월호]

UpdatedOn December 21, 2006

Words 김상욱(프리랜서 카피라이터) Editor 성범수
photography 정재환 cooperation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 model 곽중근, 정희성

익숙지 않은 방이 눈에 들어온다. 은은한 연꽃 향(정력을 보강해주는 기능이 있다)이 방 안을 점령하고 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확실치 않다. 남자 냄새가 아닌 여자의 향기가 가득한 방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확실히 같이 술 마시던 친구의 원룸도 아니다. 족히 방이 5개는 넘을 것 같은 큰 집에 있는 향기 좋은 여자의 방이다. 난 술에 취해 있다. 판단이 흐려지는 건 단지 취해서가 아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난 그녀의 가족이 잠든 사이에 그녀의 침대 위에서 2인1조로 삐걱거리는 소리를 창조해냈다. 그것도 처음 만나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말이다. 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디에 사정을 했는지가 기억나질 않는다. 난 상비약처럼 콘돔을 지갑 사이에 넣어두는 안전지상주의에 푹 빠진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술 마시고 있는 여자를 어떻게 한번 눕혀보겠다는 생각 따윈 결코 없었다. 우리는 그냥 순수하게 작년 삼성의 한국시리즈 승리를 자축하는 술을 마셨을 뿐이다.
난 두 번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세 번 식어빠진 오뎅 국물을 팬츠에 흘렸을 뿐, 그것 말고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니다. 술이 오르기 시작하자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늘 그렇듯, 이맘때가 되면 어깨도 괜스레 뻐근한 것 같고,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는 우리에겐 훌륭한 안마가 필요하다는 당위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파한다. 그리고 다음 달 카드 명세서에 찍힐 알 수 없는 업소, 18만원의 부담은 뒤로한 채 이름난 안마시술소를 찾아나선다. 그날은 운이 좋았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단비가 내렸으니까. 옆자리의 두 여성과 계속 눈이 마주쳤다. 술은 제대로 올랐고, 이미 달아오른 얼굴 덕에 퇴짜를 맞는다고 해도 더 이상 빨개질 여지도,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절로 용기가 났다. 의외로, 아니 우리의 매력이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탓인지 어느 순간 난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 오늘의 여정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는 범법 행위를 할 필요가 없는 그날이 반갑기만 했다.
술값도 누가 냈는지 모를 정도였지만, 모텔에 가자는 말은 잊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모텔에 가자는 나의 제안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금요일 저녁 문전성시를 이루는 모텔에서 방 2개를 찾아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돈도 아끼고, 처음 만난 여자 방에서 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땐 이런 계산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을 뿐이다. 잘 알겠지만, 아랫도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두뇌란 건 무용지물일 뿐이니까.
우리는 택시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다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어색할지 모르는 분위기를 대비해 술을 조금 샀다. 아파트였고, 집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원룸이 아니었다. 섹스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방이 넘쳐날 것 같았다. 아빠는 출장 중, 엄마는 여행 중, 동생은 유학 중이겠거니, 그냥 빈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꽉 들어찬 신발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조용히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내기까지 했다. 벼락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고, 섹스에 대한 희망은 날아갔다. 아무리 하고 싶다고 해도 가족들이 잠든 사이에 어찌 옆방에서 옷 벗고 뒹굴 수 있겠나. 잘못하면 처음 만난 여자와 같이 살아야 될지도 모른다. 그녀가 부족한 건 아니지만, 어찌 모르는 여자와 한 번 자고, 부모님께 들켰다고 평생을 같이할 수 있겠나. 만약 그런다고 해도 이미지 나쁜 사위를 그들은 대략 외면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냥 사온 술이나 마셔야 했다. 아랫도리는 식어버렸고, 더 마신 술로 얼굴은 달아올랐다. 그녀가 만든 계란말이만 먹어댔다. 난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내내 싫었다.
이 집을 빠져나가야 했다. 내 친구와 그녀의 친구는 순간 보이지 않았다. 거사를 치르러 어디라도 떠났나 보다. 내 집으로 가려면 움직여야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 옹색하게 누웠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의 손이 날 만지기 시작한 거다. 정신만 말짱했다면 벌떡 일어나 그녀를 눕혔을 텐데, 화들짝 놀란 가슴과 벗겨진 팬츠(물론 내가 엉덩이를 살짝 들긴 했다), 그리고 밖으로 급작스럽게 노출된 내 물건이 빨갛게 흥분하는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서툴렀지만, 과감했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성의가 넘쳐났던 오럴섹스와 내 위로 올라온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난 말을 타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반응이 쉽게 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녀의 집에서 부모가 잠든 사이에,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면, 술을 먹었다 하더라도 이미 사정의 끝을 봤을 거다. 그리고 체외 사정을 위해 그녀에게 “지금이야”라고 소리치며 내 몸에서 내려오라고 외쳤을 거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그런 치밀한 계획은 없었다. 취기가 날 지배하는 상황에 그냥 내 위에 있는 그녀가 위로 이동할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내 몸의 일부를 고개 숙여 응시하고만 있을 뿐. ‘오르가슴’이라는 정상에 올라 내려갈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나 보다(흥분해 있던 내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소리와 함께 용수철처럼 내 위에서 내려왔다. 바지춤을 올릴 새도 없이 누군가 문을 열었다. 그녀의 가족이라면 난 죽었을 거다. 다행히 가족은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가 낮은 목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뭐하는 거냐며.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끌고 나가버렸다. 그녀의 친구도 바지춤을 무릎까지 내리고 있는 내 밑을 봤다. 만약 그녀가 내려갔을 때 내가 사정을 했다면, 그들은 못 볼 걸 봤을 거다. 사정의 분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건 포르노 배우에게나 익숙한 일이다. 그리 유쾌한 건 아니었을 거다. 어쨌든 난 그 정신에 바지를 올렸다. 서운한 2퍼센트가 날 짜증나게 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말아든 휴지를 왼손에 들고 끝장을 볼 순 없었다. 그러다 들키면?
내 친구와 그녀의 친구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나가자며 나를 일으켜세웠다. 지금 생각하면 난 미쳤던 거다. 마무리 못한 욕구가 나를 움직였다. 아랫도리의 힘은 정신을 잃을 정도의 술에도 거뜬히 날 움직이게 했다. 내 친구와 그녀의 친구에게 먼저 나가 있으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은 어디선가 모든 일을 끝내고 들어온 것 같았다. 그들은 내겐 없는 2퍼센트를 가진 자들일 거다. 부러웠다. 사라진 그녀를 찾아야 했다. 난 거실로 나갔다.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잡히는 문을 열었다. 어두웠다. 누군가의 방이었다. 두 명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난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주름의 골이 여러 곳에 패인 부모님이었다. 그녀가 아니구나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옆방으로 갔다. 누군가 혼자 자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은 명료하게 사물을 분간해내고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내가 남동생인지 오빠인지 모를 남자의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난 그녀를 무작정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강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저돌적이었다(물론 그녀가 날 뿌리치거나 거부하진 않았으니 강간은 아니다). 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섹스는 남녀의 완벽한 호흡을 통해 삽입과 사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아니다. 잠시 쉼표를 찍었을 뿐 우리는 2퍼센트 남은 작업만 마무리하면 됐기에 그날도 그리 이기적인 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결국 난 무식하게 삽입을 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몸은 준비가 된 상태였다. 이번엔 내가 위에 있었다. 그 와중에도 두 가지 체위를 사용했다는 뿌듯함이 날 계속 움직이게 했다. 사정을 한 후 안 사실이지만 급해도 정말 급했나 보다. 방문도 안 닫고 섹스를 했으니까. 밑에서 기다리는 친구, 부모님이 잠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정을 한 후에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날 후희를 외면하는 예의 없는 남자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부모님을 영접한다면, 그냥 밤늦게 여자친구 집에 술 마시러 온 개념 없는 친구 대접을 받을 뿐이지만, 그녀와 단둘이 있다 걸리면 ‘섹스’라는 두 글자가 그녀의 부모님 머릿속을 점령할 거다. 난 의심과 함께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연락처도 모르고, 아파트 동과 호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마포의 어느 아파트 정도였다는 것 외엔 전혀 기억이 없다. 그 일이 있은 지 10개월이 지났다. 마포에서 나를 닮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면 연락 부탁한다. 체내 사정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은 투명하지 않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여자이길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그냥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 후 내 지갑 사이엔 오카모토 스킨레스 2000이 적어도 한개 씩은 들어 있다. 돌발 섹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렇게 철두철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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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김상욱(프리랜서 카피라이터)
Editor 성범수
photography 정재환
cooperation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
model 곽중근, 정희성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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